■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158

이상설선생의 유훈

보재 이상설선생의 유훈 선생은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깨끗했고, 선사(仙師)와도 같이 단정했다.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부사존장(父師尊長)을 경모하며, 연하를 사랑하고 생양부모(生養父母)에 극진한 봉양은 남촌의 효자로 칭송되었다. -------------------------------------------------------------------------------------------------------------------------------------- 글 : 이완희(보재 선생의 조카) [1] 나의 시신과 유품을 불태우고 광복을 보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전기를 위한 자료를 모아 보려는 생각은 일제 치하에서는 감불생심(敢不生心)이었고, ..

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

[해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일제의 "일제의 한일합병(韓日合倂)"을 계기로 1910년 8월 27일에 시베리아와 간도(間島) 등의 한족(韓族)을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선언했다. 이 성명회가 각국 정부에 보낸 선언문에는 한일 합병에 임한 한국민의 결의와 독립을 다시 찾기 위한 민족의 선언이 표명되어 있다.이 글은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기초하고, 유인석(柳麟錫)이 약간 수정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바, 노문(露文). 불문(佛文)> 중문(中文)으로 작성되어 있다.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한국민을 총 대표하여, 유인석(柳麟錫)이 알파벳으로 Lu in suk이라 서명했고, 그 뒤에 유인석(柳麟錫). 이상설(李相卨) 이하 성명회 회원의 서명록(署名錄)이 첨부되어 있다. 이 서명록은..

연해주 시절의 이상설 선생.

■ 연해주 시절의 이상설 선생. 글쓴이> 민충식[閔忠植) : 1890년(고종 27)∼1978년]/독립운동가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상설선생은 망국의 의로운 나그네로 해외에서 만난을 겪으며, 민족 치욕의 한을 만회코자 원대한 포부를 품었으니~~~ [1] 남달리 나는 별에대하여 신비를 느낀다. 밤하늘을 수놓아 무수히 반짝이는 성군(星群) 가운데서도 육안으로 또렸이 보이는 남십자성은 더욱 고귀하고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은 밤 하늘의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을 내는 이 남 십자성과도 같은 분이었다. 남 십자성을 어찌하여 보재선생으로 비견하는가? 그것은 대자연의 불가사의한 암흑속에서도 남십자성의 투명하고 휘황한 광체가 암흑속에 파묻혀 있는 수억..

보재 이상설선생 숭모비문

[해설] 이 글은 1971년 3월 1일에 이상설선생의 고향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숭렬사에 세운 숭모비(崇慕碑) 비문으로 원문대로 전제하였습니다. ------------------------------------ ■ 보재 이상설선생 숭모비문 지난날 한국 말엽의 비통한 역사위에 덮쳐오는 노도탁랑(怒濤濁浪) 무릅쓰고, 산같이 우뚝섰던 정기의 인물한분! 그가 바로 저 유명한 헤이그 밀사 세 어른 가운데서도 정사(正使)의 사명을 띠고, 가셨던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선생이시다. 나라가 기울어 나라를 울고, 집을 버려 집을 울고, 제 몸 또한 울어 세울음의 슬픈시를 읊었던 선생을 위해 나는 이제 선생의 풀지못한 천추회한(千秋悔恨)을 다시울어 그 눈물로 먹을 갈고, 그 먹을 찍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니 어찌도 연명..

숭렬사 이전중건(1997. 03. 02 준공식)

▲숭렬사 이전 증축당시의 전경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이셨던 보재 이상설선생을 현양(顯揚)하기 위하여 1971년 3월 1일에 보재 이상설선생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출생지인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남산골에 높이 10척의「보재 이상설선생 숭모비」를 건립하였고. 1975년 5월 31일 보재 이상설선생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 면적을 넓혀 이곳에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하고 존영(尊影)을 봉안하였다. 그 후 1996년 8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선생의 생가경내로 숭렬사를 이전 중건을 착공하여 1997년 3월 2일 주변 정화와 함께 준공식을 가졌다.

이상설선생 유품 호패 첫 공개..

▲좌측것은 이상설선생 호패이고, 우측것은 아버지 용우(龍雨)공의 호패이다. (대전) 이상설 선생 최초 유품 호패 첫 공개 헤이그 한국특사의 정사(正使) 이상설 선생의 호패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5일 독립기념관은 고화폐 전문업체인‘고전사`대표 최윤봉(83)씨가 2년 전 수집해 간직해오던 이상설 선생과 부친 이용우(李龍雨)의 호패를 최근 기증해 이를 공개했다. 이 선생의 호패는 상아로 제작됐고 부친 호패는 서각(물소 뿔)으로 돼 각각 출생연도와 문과급제 연도가 기록돼 있다.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상설선생은 1917년 3월 2일 48세로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했다. 대전지방보훈청 / 이동희 / 042-280-1122

서전서숙 세운 이상설/이덕일

서전서숙 세운… 백성들의 복, 사대부의 영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05년의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1907년의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왕은 순종이었지만 모든 주요 직책은 매국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춥고 긴 동토(凍土)였다. 만주 용정촌에 있던 서전서숙.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작업의 일환으로 이상설이 1906년에 건립한 학교다. 절망을 넘어서 ④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

보재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사무소 이전 개소식

보재 이상설선생 사무소 이전 개소식 사단법인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독립운동가)선생의 사무소가 2011년 6월 11일(토) 여의도 가든빌딩 805에서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1가 33-90번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관 3층 307호로 전국에서 오신 100여분의 참석으로 이전 개소식을 가졌다. ▲ 익재 이제현선생 영정(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 본 영정의 진본은 1319년에 익재 이제현선생이 중국에갔을때, 원나라의 화공(畫工)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초상화로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 있다. ▲앞줄 좌측으로 부터 이필우(李弼雨)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장. 이필우(李必雨) 익재공파 대종회 신임회장, 이대희(李大熙) 익재공파대종회 직전회장, ▲(사)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