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연해주 시절의 이상설 선생.

야촌(1) 2012. 4. 26. 18:18

■ 연해주 시절의 이상설 선생.

 

글쓴이> 민충식[閔忠植) : 1890년(고종 27)∼1978년]/독립운동가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상설선생은 망국의 의로운 나그네로 해외에서 만난을 겪으며, 민족 치욕의 한을 만회코자 원대한 포부를 품었으니~~~

 

[1]

  남달리 나는 별에대하여 신비를 느낀다. 밤하늘을 수놓아 무수히 반짝이는 성군(星群) 가운데서도 육안으로 또렸이 보이는 남십자성은 더욱 고귀하고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은 밤 하늘의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을 내는 이 남 십자성과도 같은 분이었다. 남 십자성을 어찌하여 보재선생으로 비견하는가?

 

  그것은 대자연의 불가사의한 암흑속에서도 남십자성의 투명하고 휘황한 광체가 암흑속에 파묻혀 있는 수억의 성군을 영도하는 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2]

  1905년(광무 9)의 을사오조약과 1907년의 정미칠조약으로 우리나라는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 강도에 늑탈(勒奪) 당하였고, 2천만 우리민족은 일적(日敵)의 포로가 되었다. 한말(韓末)의 임종을  지켜본 우리 우국지사 들은 비분과 강개로 순사(殉死)와 일적에 대한 항쟁을 벌여 그 의기가 도처에서 끊이지 아니하던 때이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강압적으로 오조약이 체결된 전말이 장지연(張志淵) 선생에 의해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대서 특보로 알려지자 장안은 걷잡을수 없는 통탄과 울분속에 빠젔다.

 

  을사오조약을 체결한 적신(賊臣)들을 치죄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 앞에서 배복대죄(拜伏待罪) 하면서 통곡하던 보재선생을 이 때 나는 뵐수 있었다. 나는 그때 나이가 얼마 되지 아니하였으나 역시 의협심을 누를수 없어 우국 선배들의 수종(隨從)이라도 들기로 결심하고 애국 지사들이 암암리에 모여 회합하였던 서대문 밖의 양기탁(梁起鐸) 선생 댁을 자주 드나들었다.

 

  양기탁(梁起鐸)  선생댁에 자주모여 회합하던 지사들은 얼마 뒤 임치정(林蚩正)선생댁으로 밀회장소를 옮기고,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조성환(曺成煥). 전덕기(全德基). 안태국(安泰國).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노백린(盧伯麟). 장지연(張志淵). 이시영(李始榮) 선생 등. 여러분께서 왕래하며 회합하였다.

 

  그런데 임치정(林蚩正) 선생댁에서 밀회하던 인사들 가운데서 전덕기(全德基) 목사와 이동녕(李東寧)선생은 서로 친교가 아주 두터웠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상면을 삼가고 있었고, 또 이 두분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과도 서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역시 내왕을 피하였다.

 

  월남(月南)선생은 마침 내가 재학중이었던 경신(儆新)학교의 한문교수로 재직하여 나는 수강생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나의 선친과도 막역한 구우(舊友)였기 때문에 나는 월남선생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 세분 선생은 서로 중요한 용건으로 연락을 취할때에는 나를 전달자로 택하여 전서(傳書)를 보내곤 하였다. 뒤에 안 일이었지만, 당시 내가 비밀리에 전서인(傳書人) 노릇을 하게된 밀의(密議)내용은 전덕기 목사의 처형인 궁인(宮人)을 시켜서 헤이그(海牙) 밀지(密旨)를 취득하는 공작이었다.

 

  경신(儆新) 학교를 수료한 후 나는 일본에서 수학하다가 1913년 봄에 미국으로 건너갈 목적으로 몰래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때마침 상해 프랑스 조계에는 일찌기 국내에서 망명해 들어온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趙素昻) 등의 인사가 배달 학원을 설립하여 해외 망명 인사들의 연락과 구국활동을 위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명사들과의 접촉으로 외교활동을 넓히고 우리의 고유 민족문화를 선전하고 독립정신을 알리며, 《한국통사(韓國痛史)》.《안중근전(安重根傳)》.《한국혼(韓 國 魂)》등을 순 한문(漢文)으로 출판하였다.

 

  또 한국 청년들을 중국 혁명당이 경영하는 군관학교에 취학시켜 군법과 폭발물 제조법을 배우게하여 실제로 우리 독립군 전투 부대에 배치하였다. 이범석(李範奭) 장군 등 만주에서의 독립군이 사용한 폭발물의 출처가 바로 이 배달학원을 거점으로 하였다는 것은 그 폭발물을 공급받아 사용한 사람 마저 알지 못하였으리라!

 

  지금까지도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를 주관하였던 두세 사람은 타계하고, 당시 그 폭발물을 제작하였던 인사 두분이 아직 생존하여 있을 뿐이다. 나는 상해의 이 배달학원에서 기숙하던 중 1913년 겨울에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의 친서를 받았다.

 

  러시아 령(領)연해주에서 김동형(金東瀅). 김진숙(金晋肅) 두 동지가 상해로 가지고 온 이동녕선생의 친서 내용인 즉 "군(君)이 차처(此處)에서 전개되는 대사(大事)에 적격인즉 종기속래(從機速來)하여 대업(大業)에 협조키를 간촉(懇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년 정초에 나는 블라디보스톡(海蔘威) 항에 도착하여 한국인 이주 동포가 집단 거주하고 있는 신한촌(新韓村)의 김원식(金遠植) 동지를 찾아 갔다.

 

  신한촌(新韓村)은 블라디보스톡(海蔘威) 항구 서남쪽 아무르 만(灣) 근처의 두리 산정(山頂)에 있었다. 당시 이 신한촌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는 1백여 가구의 약 3. 4백명 정도였으며, 생계는 거의 노동으로 꾸려가고 있었다. 

 

  한인(韓人) 집단 거주민촌을 이루고 있는 우리 동포가 블라디보스톡 항에 정착하게 된 것은  1860년 부터 러시아가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기도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의 개항을 서둘러 축항공사를 시작할 무렵 부터였다. 

 

  이 축항공사에 동원된 인부는 대다수가 중국인과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인은 거의 함경도 사람들로서 두만강을 건너가 축항 노동에 동원되었다가 그곳에서 영주하게된 사람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의 항구 시가가 정비됨에 따라 이곳 저곳에 흩어져 바라크 가옥을 짓고 살던 한인들을 한 곳으로 집단 거주지를 정해준 것이 바로 이 신한촌이었다.

 

  신한촌 뿐만 아니라 연해주에 걸쳐 이렇게 수백명씩 집단 거주지를 만들어 노동이나 혹은 농경생활로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촌의 인구를 합친다면 수십만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한인으로서 비교적 성공하여 치부한 사람은 6. 7인 정도가 되는데, 해운업을 하고 있는 최재형(崔在亨)이란 사람은 2. 3촌톤에 달하는 기선을 서너 척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러시아 군단(軍團)을 상대로 용달업(用達業)에 종사하여 매일 근 10만 명분의 식용 우육(牛肉) 용달을 대규모로 하여 치부하기가 용이하였지만, 때로는 도산(倒産) 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제씨의 힘으로 한인 이주 동포들을 위한 우리말 신문인《권업보(勸業報)》가  발행되었는데, 주필은 김하구(金河球)씨였고, 이 신문의 간행을 도운 분은 윤해(尹海). 한형권(韓馨權). 김학만(金學萬) 등 제씨였다. 매월 2. 3회 간행하는 이 신문의 발행 부수는 3 . 4백부 정도였으며, 인쇄는 복사판이었다. 

 

  국내에서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장지연(張志淵) 선생 등의 유명 인사 및 독립운동가들이 이 신문사를 다녀간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찍 부터 이곳에 와  정착한 한인동포들은 본국을 떠난지 오래 되어서인지 또는 노령(

老齡) 이라서인지 그들의 2세들마저도 러시아의 교화를 받았음인지 조국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 들어온 한인 동포들에 대해 기우심(杞憂心) 마저 가지는듯 하였다.

 

  그러므로 본국에서 망명해 들어온 구국 지사들과의 합심 조화가 잘 이루어 질수 없었기 때문에 연해주에 새로 들어온 망명객들과는 자연히 파벌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김원식(金遠植) 동지의 안내를 받아 신한촌에 거주하고 있는 장호문(張浩文). 이필수(李弼秀). 임석호(林奭鎬). 김완수(金完洙). 이규풍(李奎豊). 홍범도(洪範圖) 등의 우리 동지들을 일일이 만나 연해주에 있는 동포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존숭(尊崇)하고 있는 그 막하(幕下)였다. 블라디보스톡의 정세를 살핀 후에 나는 다시 니콜리스크(雙城子) 시에 거주하는 이민복(李敏馥) 동지에게로 가서, 당시 하바로프스크에 와있던 이상설(李相卨) 선생에게 내가 러시아로 들어와 있음을 인편으로 통고하였다. 

 

  몇일동안 이민복(李敏馥)  동지의 집에서 지내며, 그의 소개로 황두진(黃斗珍). 김현토(金顯土). 윤일병(尹逸炳). 구덕상(具德相). 안기선(安基善). 이종익(李鍾翼). 정연택(鄭連澤)등의 동지와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들도 역시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막하로서 모두 러시아 어에 능통하였고, 러시아 관청 및 군(軍)의 공직자들이었다. 1914년 1월 15일 나는 니콜리스크를 떠나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였다. 역두에는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선생 등이 출영해 주어 나는 뜻밖에도 황송한 대우를 받았었다. 

 

  그 다음날에는 이동녕 선생의 설명을 배청(拜聽)하고, 대종교(大倧敎)의 교주였던 백순(白純) 선생 앞에서 선서(宣誓) 예(禮)를 행함으로서 나는 비밀 결사 단원이 되었다. 이상의 기록은 내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상면하게된 전말과 연해주 일대의 우리 한인사회의 정황을 약술한 것이다. 다음은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자세한 행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3]

  고종(高宗) 황재의 특사(特使)로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선생이 밀지(密旨)를 품고 네델란드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코자 하였으나 일본 대표의 방해 정략과 반대 휼계(譎計)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준선생은 헤이그에서 분사(憤死)하였고, 이상설(李相卨)선생은 비장한 심경으로 장차 이 치욕을 만회코자 자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러시아 등. 5. 6개국을 역방(歷訪)하고, 난 다음, 고국이 가깝고 망명 애국지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만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전 가족을 이끌고 망명해 들어온 이시영(李始榮)선생을 비롯하여조완구(趙琬九). 박찬익(朴贊翊). 이동녕(李東寧). 윤기섭(尹琦燮). 김동삼9金東三). 이상룡(李相龍). 나철(羅喆)등의 애국지사들을 상면하고, 경학사(耕學社)란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분열되는 것을 보고 뜻한바 있어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다시 러시아 령(領) 연해주로 들어갔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이곳에서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권대동(權大東) 등과 대종교(大倧敎)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종교는 표면적으로는 교리를 포교하는 종교활동을 하였으나 이면으로는 독립 투쟁을 위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서 독립군을 정규적으로 양성시킬킬 계획이었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본래 타고난 준골(俊骨). 준재(俊才)로서 특출한 분이었고, 정신이 현명하며, 사고(思考) 또한 깊고 무궁하였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자연히 존숭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신한촌이나 니콜리스크 등지의 동지들은 모두 이상설(李相卨)선생을 쫒아 추종한 단원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러시아 극동(연해주)의 수도이며 총독 주차지(駐箚地)인 하바로프스크에서 러시아 황제의 척숙戚叔)인 보스타빈 총독을 방문하였다. 하바로프스크는 흑룡강(黑龍江)과 우수리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랄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베리아 안에서 가장큰 도시다.

 

  이곳은 캄챠카 반도로 부터 블라디보스톡 항을 연(沿)한 국방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 주(洲)의 총독에게는 국방 책임상 선전(宣戰) 명령을 중앙정부의 지시 없이 먼저 내릴 수 있는 특수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총독은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신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면 인사로 옛 친구를 만난듯 숙친하게 담소할수 있었다.

 

  보스타빈 총독은 정치. 경제. 사상의 경륜과 세계 대세의 전망, 국제 정세 변화까지를 설파하는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대가(大家)로 극진히 존대하게 되었고, 그 뒤에도 이들은 자주 만나 주식(酒食)을 함께 나누며 교담(交談)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스타빈 총독의 가족들까지도 이상설(李相卨) 에게 예우로서 친절을 다해주었다. 한번은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보스타빈 총독의 자녀들에게 러시아의 불규칙 품사류(品詞類)를 세세히 교정해서 설명해 주자, 보스타빈 총독과 그 가족들은 선생의 박학다식(博學多識)에 경탄하였다. 이 뒤 부터 보스타빈 총독은 러시아인 학자를 불러들여 이상설선생과 강론케 한 일도 있었다.

 

  선생은 본래 학문은 물론 수학에도 천재였었고, 영어. 일어. 러시아어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까지도 능통하였다. 당시의 러시아 상류사회는 독일어와 러시아 어를 혼용해서 쓰는 풍습이 있었다. 나는 시간만 있으면 러시아어 문법 사전을 편찬하는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자주 목도 하였고, 매일 새벽 5시만 되면 선생은 우리들에게 러시아 어를 강습시켰다.

 

  러시아는 당시 노일전쟁의 패전국이였지만, 태평양 진출을 위한 욕망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가 종전(終戰) 즉시로 내륙철도(만주 횡단선)의 부설을 시작한 것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대일(對日) 전기(戰機)가 발생할것을 예척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세를 간파한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러시아가 일본과 다시 개전(開戰)할 경우 한국의 협력을 구할것이고, 한국도 이 기회를 타서 항일 결전을 치러야한다고, 보스타빈 총독에게 설명하였다.

 

  많은 한인 애국지사들이 러시아 영내와 만주 일원으로 이주. 망명해들어와 극렬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희생만 거듭되고 국부적인 활동에 그치므로 지금 당장 필요한 한인의 군사 교육과 군대 양성소의 설치를 지원 해줄 것을 총독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총독도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이 제안에 즉각 공명하였으나, 한인 독립군 지원 사실이 대외로 알려지게 되면 국제적인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까 해서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이에 물러서지 않고 극비의 방안을 역설하여 끝내 총독을 납득시켰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우선 독립군 양성소의 후보지를 시베리아 동북 야블로노이 산 북단에 있는 레나 강(江)의 상류로 가정하였다. 이곳은 궁곡(窮谷=깊은 산골짜기) 이면서도 목재가 풍부한 광산 지대로서 짧은 시일에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이다. 

 

  일력과 양도(糧道)는 독립군이 자작농으로 자급 자족 할수 있도록 확보하고, 그 외 1천여명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건물 등은 러시아 관(官)에서 조달키로 한다는 방안을 세웠다. 다만 연습용 병기는 러시아 군의 구식 총검과 포륜(砲輪) 등을 이용하는데, 이들 군기품(軍機品) 만은 러시아 군으로 부터 불하 형식을 취하는 동시에 형식상 최소한의 댓가로 약 십만 루우불을 납입키로 하였다. 

 

  보스타빈 총독과 위와 같은 협약을 하고 난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이의 실현을 위해 여러 방면에 걸쳐서 신중히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때 나도 각처로 열락하는 일임을 담당하였었다. 그러나 가장 큰 난관은 십만 루우블의 주선이었다. 암암리에 진행되는 군비 주선을 어찌 외부에 떠들고 모금 하겠는가?

 

  더구나 망명해 나온 우리 동포는 모두 빈한 하였었고, 몇몇 부자가 있긴 했으나 상의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전전 긍긍하며 궁극의 깊은 생각 끝에 지난날 고종황제 때 고관을 지낸이의 장손으로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이모(某) 씨가  이 금액만은 염출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대사(大事)의 협력자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자 그는 쾌히 승락하였다. 

 

  대 난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각 동지들은 모두 부서별로 배속을 시작하였다.

나도 러시아 관리[俄官]로 봉급을 받기로 하고 역시 비밀직을 맡았으며, 북만주 전역과 중동 시베리아 지역을 활보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직책은 일본인들이 변장을 하고, 러시아 영내로 몰래 들어와 군사 기지와 시설을 밀정하고 사진을 촬영하고 지형도를 작성. 모사해 가는 행동을 수색, 미행하여 러시아 참모부로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런 일로 나는 각 지역을 자유로이 순방하였고, 또한 우리 결사 단체의 지령을 수행키 위해 한인 거주 부락의 방문과 독립군의 연락을 수시로 취하였다. 그러던중 1914년 10월 부터 이상하게도 본부로 부터 모든 지시와 연락이 끊어져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니콜리스크의 이민복(李敏馥) 동지로 부터, 래신(來信)이 있었다.

 

  사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참모부의 진용이 교체되어 우리의 거취가 난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자 나의 입장도 호소할 곳이 없게되었다. 망국민의 신세를 한탄할 뿐, 만사는 휴(休)였던 것이다.

 

  뜻한바 있어 나는 만몽동기(滿蒙冬騎)와 시베리아의 적설견빙(積雪堅氷))을 주파하고, 감연히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로 들어갔다. 전쟁은 더욱 심각해져 갔고, 묵가는 폭등되어 결국 모스크바 유랑생활 3년만인 1916년 여름에 나는 다시 니콜리스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떼 영수(領首) 이상설(李相卨) 선생과 이동년(李東寧)선생. 이민복(李敏馥) 동지는 건재하고, 있었으나, 그밖의 많은 동지들은 각처로 흩어져있었다. 러시아 정국의 소란으로 말미암아 관직의 인물이 교체되고, 또한 기구의 변동으로 인해 보스타빈 총독과 협약하여 결탁한 일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동지들은 실직이 되어 각처로 이산한 것이었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표정은 태연한 듯 보였으나 활기가 소침하였고, 심경이 무척 우울해 보였다. 참으로 이상설(李相卨) 선생에 대한 가석한 마음을 참기어려웠다. 그러나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희망을 잃지않았고, 언제나 우리들에게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계 대세는 장차 다각도로 변해가고, 약소국들이 사회주의 사상으로 공며와는 경향이 점진되어 자유주의. 즉 민주주의 국가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들은 야욕을 달성키 위해 약소국의 원조를 미끼로 외교 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급기야는 세게대전이 틀림없이 발발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동지들은 잘래의 이러한 기회를 잘 포착하여, 현명한 지략을 발휘하라고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당부 하였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나 개인에 대해서도 아직 나이가 어리니 상해나 미국으로 건너가 면학에 정진하고, 대세를 통찰함에 게을리 하지말라고 권하였다.

 

  나는 선생의 권유도 있고 하여 1917년 초에 러시아를 하직하고 중국 상해로 다시 들어갔다. 이것이 이상설(李相卨) 선생과의 마지막 영별(永別)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으니, 같은해 내가 상해로 온 얼마뒤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부음(訃音)을 들었던 것이다.

 

  배달학원을 중심으로 이상설(李相卨) 선생에 대한 애도(哀悼) 예식이 슬픔 속에 올려졌다. 이 자리에는 조성환(曺成煥). 박남파(朴南坡).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조동우(趙東祐). 민제호(閔濟鎬)등 수십명이 참석하였으며, 장부천(張夫泉)등 중국 혁명당 요인 몇 명도 참석하였다. 

 

  그로 부터 2년 후인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각 지역에서 망명 활동을 하고 있던 우국지사 6. 7천 여명이 상해로 들어왔으 때, 나는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동녕(李東寧) 선생과 상회에서 재회하였다. 그 때, 이동녕(李東寧) 선생으로 부터 참으로 구곡(九曲)이 메어지는 듯한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임종 소식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임종 당시에 13명의 동지가 모였는데,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마지막 유지(遺志)는 "우리나라에 회복할 기회가 올 것이니 모두들 낙망 말고 분발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종을 지켜본 동지중의 한 분이 선생의 유품과 저작한 원고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 하고 묻자, 선생은 "모든 것이 미완성이며, 또 내가 후세에 무슨 면목으로 무엇을 끼칠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 동포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모던 것을 이미  불태워 없애 버리고 말았다. 다만 지금 당장 남은 것은 나의 죽은 시체가 있을 뿐이니 이것 마저 부로 태워 바다에 바다에 뿌려주기 바라며, 행여나 죽은 찌꺼기를 조금이라도 남기지 말기를 원한다.

 

내 국토를 잃어버렸는데, 어느 곳 어느 흙에 누를 끼치리오"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지들은 선생의 유지대로 화장(火葬)으로 모시고, 분골(粉骨)은 바다에 뿌렸다고 한다.

 

[4]

  연전에 서울의 이준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헤이그에 있는 이준선생의 유해를 본국으로 모시는 이장식이 성대히 집행되었을 때, 나는 장의(葬儀) 의전 책임을 맡아본 일이 있엇다. 당시의 나의 심경으로는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해가 어느곳에 모셔져있다면, 이장이라도 할 것을 하는 유감스러움을 느꼈다.

 

  본래 헤이그 밀사 사건을 맨 먼저 발의한 분은 이상설(李相卨)선생과 이동녕(李東寧)선생으로 사료되고,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통하여 밀지를 취득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잇다. 이준선생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1903. 4년 경에 황성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소년부 토론회가 매주 1회씩 개최되었는데, 이준선생은 그 때 비판위었고, 당시의 관직은 평리원(評理院) 검사였었다. 어떤 때에는 이준선생이 내게 촉사(囑使)하는 일이 있어 수행한 적도 있었다.

 

  이준(李儁)선생도 역시 내가 숭배하는 인물중의 한분이다. 이준선생의 성격은 좀 괄괄한 듯 하였으며, 약주를 즐겨서 그런지 간혹 패혈증(敗血症)이 있었다. 언젠가는 천년회 주체의 전국민에 대한 단발(短髮) 강연회에서 연사로 열변하였는데, 그 때 이준(李儁)선생은 "미개한 인종은 산발(散髮)이며, 우리 한국인은 현시대에 있어 개(犬)xxx같은 상투를 머리위어 틀어 얹고 망건으로 이마를 질끈 동여 양미(兩眉=양쪽눈섭)가 자연형을 잃어 무슨 벌을 받는것 같다고"고 과격한 상투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사건은 남한 유림단(儒林團)에서 망측한 xxx석자에  대한 시비 공격을 벌인 일이었다.

 이준(李儁)선생의 과격한 성격을 짐작하고 있었음으로 나는 이준(李儁)선생이 헤이그 사절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할복 자결 운운함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본즉 선생은 지병인 패혈증(敗血症)이 있는 데다가 중대사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발분(發憤)하여 과음하자 토혈(吐血)하여 치명이 된 것이었다. 만국평화회의 석상에서 할복 자살했다는 설(說)은 천부당 만부당한 이야기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상설(李相卨)선생은 망국의 외로운 나그네로 해외에서 만난(萬難)을 겪으며, 민족 치욕의 한을 만회코자 원대한 포부를 품었으나 그 심경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고, 망국의 원한과 상심이 마침내 병이 되어 천명(天命)이 아닌 48세의 한창나이로 타국에서 순사(殉死=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하고 말았다. 

 

  차라리 유해라도 잘 모셔졌던들 반 토막의 국토라도 독립이 되었으니, 모국에 이장하여 옛 넑을 회상이라도 해볼 것을 이도 못하니 애닯기 그지없다.

 

[5]

●중매를 선 이상설선생

  니콜리스크 시(市)의 이민복(李敏馥)이 거처하는 집의 주인인 황두진(黃斗珍)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前) 한국정부 고종(高宗) 때에, 러시아어 통변관(通辯官=外部主事)이란 관직을 지낸 호인이다. 이 황두진(黃斗珍) 만은 한국 풍속과 예의법도를 숭배하는 동시에 이상설(李相卨)선생을 정말 양반이라고 하여 퍽 존경하였다.

 

  이 황두진(黃斗珍)의 매부가 되는 이춘식(李春植)이란 노인은 리콜리스크 시(市) 서남쪽 60리의 거리에 있는 육성(六城)이란 마을의 촌잔이었다. 한인 거주 약 1백여호에 러시아 인이 10여 호 정도 같이 섞여 살았는데, 러시아 인도 이 촌장의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이 노인에게는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이 촌장의 딸과 김원식(金遠植)을 성혼시키기 위해 황주사에게 중매를 넣었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이러한 중매의 뜻은 토박이 교포들이 새로 이곳으로 들어온 남한인들과 잘 인화되지 않음으로 만일 한사람 씩이라도 혼혼(混婚)하게 된다면, 점차로 지방의 구별을 가리지 않고, 서로 융화되리라는 심산에서였다. 다행히 이 중에는 양쪽이 모두 승락하여 성혼이 이루어졌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이 예견한 대로 신부쪽의 촌민 전부가 새로 이주해온 남한인들에 대해 한결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고, 다른 토박이 교포들도 남한인들과 결혼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그러나 소위 지도자란 인물들은 남북 성혼을 반대하고, 비방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였다. 그 이유는 구태여 이곳에서 밝히려 하지 않기로 한다.

 

 ● 비밀 결사의 배후에 선 이상설선생 □

 

연해주 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 두령은 왜 하필 백순(白純) 선생인가?

내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이 비밀결사에 입단하여 선서를 할때, 마땅히 이상설(李相卨)선생 앞에서 선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외로 백순(白純)선생 앞에 선서를 한것이 못내 궁금하여 뒷날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때 이동년(李東寧)선생이 이상설(李相卨)선생을 대신하여 대답해 주었다.

 

  즉 국내에는 아직 반상(班常 :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광범위한 인화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상. 상하를 물론하고 평등한 교제를 할 수 있는 백순(白純)선생의 신분이 이 일을 위한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중들을 포섭하는 데에도 한결 쉽다는 것이며, 대사(大事)의 패자는 선두에 나서지 않는 것이 라고 했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늘 헤이그밀사 사건의 패자로 자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동지 김완수의 살인사건 □

김완수(金完洙)는 서울 한강에 사는 사람으로서 힘이 장사였다. 한번은 일인이 한인에 대해 너무나도 오만 무례하게 거들먹 거리므로 분기를 참지 못하고 일격을 가하자, 그 일인은 그만 죽고 말앗다. 그리하여 강물속에다 시신을 집어 던진 것이 탄로가 나자 김완수(金完洙)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피신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규풍(李奎豊). 홍범도(洪範圖) 등의 지사를 만나 항일 결전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만주 국경을 무대로 일군 수비대를 만나는 대로 모두 사살하였다. 이들은 겉 모양을 장백산(長白山) 속의 수렵꾼으로 위장하고 일본에 접근하였다.

 

  한인 독립군을 탐색키 위해 일군 수비대가 3. 4명씩 산속으로 행군해 오면, 몸을 숨기고 은밀히 일본군의 뒤를쫓다가 그들이 식수로 쓸 만한 맑은 계곡의 물가에서 식사하기 위해 무장을 풀고 방심해 있을 때, 일제 사격을 가하곤 했다.

 

  일군 수비대가 몰살하면, 총기를 거두어 들였는데, 이때, 이규풍(李奎豊) 동지는 반듯이 일군의 오른쪽 귓바퀴를 칼로 잘라 내었다. 어느 여름날에 그가 이것을 열 일곱개나 햇볕에 늘어 말리는 것을 보고, 내가 궁금해서 그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그건 장래 기념할 일군의 귓바퀴"라고 대신 대답해 주엇다.

 

  김완수(金完洙). 이규풍(李奎豊). 홍범도(洪範圖) 세 동지는 한겨울에는 항구도시로 나가서 막벌이 중노동을 하였고, 벌어들인 돈으로는 궁색한 동지들을 도왔다. 본래 김완수(金完洙)는 완력이 대단하여 별명을 장군이라 하기로 하고, 역사(力士)라 하기도 햇다. 

 

  신한촌에도 역시 엄(嚴)장군이라는 역사가 있었으나, 이 김장군에 비하면,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김장군은 누구보다 힘이 역강 하였으나 성품은 언제나 온순하였고, 행동은 강유(强柔)를 겸전하여 남달리 의협심이 뛰어났다.

 

  신장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체구속에 지님 위력은 보통 사람의 5. 6배나 강한 셈이었다. 그가 하바로프스크의 시베리아 내륙철도 부설철교 공사장에서 날마다 중노동 할때의 일이다. 그때 그가 받는 노임은 다른 인부들에 비해 4. 5배 정도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 작업이 석괴(石塊)를 운반해 나르는 일이였는데, 하루 종일 운반된 석괴수를 세어서 노임을 지불하기 때문이였다. 다른 인부들은 세 사람이 한조를 이루어 두 사람이 석괴를 들어 올려  한 사람의 등에 지워 세 사람이 함께 운반 하였지만 김장사는 단독으로 석괴 한덩이는 어께에 메고, 또 한덩이는  오른쪽 팔에 껴서 운반하였다.

 

    그러므로 그 능률에 있어서는 자연히 3인 1조가 옮긴 석괴보다 김장사가 혼자 나른 수량이 배나 되었다.

 그가 보통 인부의 4. 5배나 되는 노임을 받을때 마다, 다른 인부들은 그를 몹시 시기하였다.

 

  그래서 러시아인 노동자가 잔꾀를 부려 김완수(金完洙)가 옮겨 놓은 석괴를 몰래 자기네 쪽으로 슬쩍 옮겨 놓았다. 이 꼴을 발견한 김완수(金完洙)는 몇번쯤 눈감아 주었으나, 너무 자주 그 짓을 하므로 한번은 이를 제지하였다.

 

  이것이 시비거리가 되어 러시아인 노동자 10여 명이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와 김완수(金完洙)를 구타하려 하였다.

 김완수(金完洙)는 몸을 피하며 맨 앞에서 달려드는 러시아인 노동자의 두 발목을 잡아쥐고, 몽둥이를 휘두르듯 그들의 무리에게로 내리질렀다.

 

  이 유혈극으로 몽둥이처럼 내던져진 러시아인 노동자는 절명하였고, 나므지 무리들은 부상을 입은 큰 소동이 벌어져 김완수(金完洙)는 살이죄로 체포되었다. 이때 이상설(李相卨)선생은 김완수의 구명을 위해 보스타빈 총독을 만나 교섭을 벌였다.

 

  보스타빈 총독은 한사람에 대한 10여명의 집단 폭행이 아니라, 10여 명에 대한 한사람의 집단폭행 이란 묘한 말에 흥미를 느끼고, 진상을 조사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사건이 작희(作戱) 같기는 하나 살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상설(李相卨)선생은 관선 변호사를 부탁하고, 가능 할 수 있는 모던 방법을 동원 구출 교섭을 다하였다.

 

  이 사건의 재판은 러시아 인의 절도행위와 집단 폭력 앞에서 무고한 1인으로서 부득이한 정당방위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변론쪽으로 기울어져, 결국 무죄가 인정되었고, 사건은 무마되었다. 보스타빈 총독은 오히려 김완수를 사사로이 불려들여 그의 독립활동을 격려해준 일 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완수(金完洙)는 그뒤 하바로프스크 지경에서 퇴거하였으며, 러시아 혁명 내란 때에, 행방을 감추었다.

 

[문헌자료]

1975 나라사랑 제20집(보재 이상설선생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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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민충식(閔忠植)

   1890년(고종 27)∼1978년. 서울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일본동경(東京) 유학 때 엄영달(嚴永達)‧ 조소앙(趙素昻)과 같이 이승만(李承晩)을 미국으로 환송하고, 독립운동지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13년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이전하여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등의 밑에서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