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158

수학자 이상설이 소개한 근대자연과학 <식물학(植物學)>

수학자 이상설이 소개한 근대자연과학: Botany: A Modern Natural Science Book Written by Mathematician Sang-Seol Lee 발행기관 한국수학교육학회 발행정보 E-수학교육 논문집, 25 권, 2호, Startpage 341, Endpage 360, Totalpage 20 저자 박영민(Young Min Park), 김채식(Chae Sik Kim), 이상구 (Sang Gu Lee), 이재화 (Jae Hwa Lee) 가격 4,500 원 발행년도 2011 주제키워드 이상설, 李相卨, , , Robert Hart, 혁덕, 赫德, Joseph Edkins, 애약슬, 艾約瑟, , Sang-seol LEE, Botany, Science Primers, Botany, R..

항일투쟁의 원로 이상설선생.

■항일투쟁의 원로 이상설선생. 글(1972. 01) : 광복회 회원 이용화 이상설(李相卨, 1870(고종 7)∼1917)선생은 당시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우리나라 독립기관의 최고 지도자였으므로 북경. 상해. 북간도. 미주등지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오면 으례 선생을 찾고, 국권회복을 위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였다.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려던 밀사의 사명이 싪패로 끝나자, 이상설선생은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호소하고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상설선생은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후대를 받았는데, 루우즈벨트 미국대통령은 사견례(私見禮)로써 면접을 하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재미 한교(在美韓僑)들..

중국 이상설선생 전람관

■ 보재 이상설선생전람관 주유천하선생님과 만대선생님 께서 지난 5월과 이달 7월에 중국 여행차 길림성 용정시 용정중학(구 대성중학) 교정에 있는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의 역사전람관 방문 사진이 있어 일부를 옮겨와서 소 개 올립니다. ↑용정중학교(전 대성중학교 정일권 전 국무총리를 비롯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학교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2000년 경주이씨중앙화수회와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가 건립하고 역사자료들을 전시했다. 所在地: 中國 吉林省 龍井市 民生街 789號 龍井中學 ↑보재이상설선생 역사전람관준공기비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일본의 강압에 의거 강제 체결되자 이상설(李相卨)선생이 항일 구국운동을 결심 1906년 만주로 망명하여 그해 8월에 룡정(龍井)에 자기의 사비(私費)로 근..

이상설 선생이 편지를 쓰면서 흘린 눈물

헤이그 밀사 파견 당시 비화 중,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밀사 일행들이 헤이그로 가기 전에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상설은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 영어에 능통한 통역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당시 미국에서 명성을 떨치던 젊은 이승만에게 만국평화회의에 동행, 통역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박용만이 뒤늦게 윤병구,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냈다. 이후 이준을 헤이그 인근의 공원묘지에 묻은 뒤 이상설은 미국에서 이승만에게 재차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은 당시 이상설이 이승만에게 보낸 한문 편지다.(번역본) '지난번에 만나서 할 말을 다 했기에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소이다. 큰 국면을 둘러보건대 오직 이 한 가지 방법뿐이외다. ..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 이후 이상설 선생의 행적

■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 이후 이상설 선생의 행적 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이위종 선생이 1907년 8월 1일 뉴욕항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은 해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 현지에서 분사(憤死)하자 장례식을 치르고 대서양을 건넌 것이다. 박용만이 뒤늦게 통역으로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에 파견했으나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 한다. 이들의 입국기록에는 '미국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none)'고 적혀 있다. 2.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박용만이 소개한 윤병구, 송헌주와 함께 다시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이들은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일본의 침략성과 극동의 평화를 위한 영세중립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8년 3월 윤병구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이상설..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요약]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이끈 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망명정부이다. ◈구분 : 망명정부 ◈설립연도 : 1914년 ◈설립목적 : 조국의 독립 쟁취 ◈소재지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요활동 : 독립전쟁 수행, 병사 훈련 [본문]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권업회는 이상설(李相卨)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3년 사관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극동지역 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이 사용할 군영지를 조차하고, 광복군 병사의 양성을 위하여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

비운의 천재 독립운동가‘이상설’ - 불꽃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다

비운의 천재 독립운동가‘이상설’ - 불꽃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다. 다 태워라, 하나도 남기지 마라 헤이그 밀사로 이준은 알아도 이상설은 모른다. 미국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윤병구는 알아도 이상설은 모른다. 시베리아 독립운동사에선 유인석이, 성명회 활동에선 유인석과 김학만이 더 유명할 뿐 이상설의 이름은 숨겨져 있다. 그는 안중근이 말하던 당대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는데 왜 후손들에게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1917년 3월초 낯선 땅 연해주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일화를 대략 소개하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해진다. “모든 것이 미완성이다. 내가 후세에 무슨 면목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동포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에 내 모든 것을 이미 불태워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상설 정통령(正統領)

상해 임시정부는 그 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상 해산상태에서 무려 20년 가량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그렇게 유명무실하게 간판만 달고 있다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찾아와 찬란한 위업을 쌓아 준 것이니까 별로 칭찬할 것이 없는 조직이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에게 수류탄을 구해 준 것이 공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장엄한 애국을 한 데에 비해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오죽하면 강제 징집된 학병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장준하가 회고록에 쓰길, 자기들은 다시 일본군에 투항하여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임시정부를 공습해 폭파해 버리고 싶다고 격렬히 분노하는 글을 남겼겠는가? 그에 비해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스리스크에 있던 애국지사들은 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