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글은 1971년 3월 1일에 이상설선생의 고향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숭렬사에 세운 숭모비(崇慕碑) 비문으로 원문대로 전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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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재 이상설선생 숭모비문
지난날 한국 말엽의 비통한 역사위에 덮쳐오는 노도탁랑(怒濤濁浪) 무릅쓰고, 산같이 우뚝섰던 정기의 인물한분! 그가 바로 저 유명한 헤이그 밀사 세 어른 가운데서도 정사(正使)의 사명을 띠고, 가셨던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선생이시다.
나라가 기울어 나라를 울고, 집을 버려 집을 울고, 제 몸 또한 울어 세울음의 슬픈시를 읊었던 선생을 위해 나는 이제 선생의 풀지못한 천추회한(千秋悔恨)을 다시울어 그 눈물로 먹을 갈고, 그 먹을 찍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니 어찌도 연명이 깨끗한 국화 이슬로 먹을 갈아 그 먹으로 조국 진나라 역사를 쓰던 심경에만 비길 것이랴.
아 슬프다!
옛부터 모든 영웅 의사들이 비록 나가서 죽는데도 죽으서는 그들이 제 고장으로 돌아온다 하건마는 선생은 죽어서도 못 돌아왔고, 한조각 유물조차 끼치지 않아 우리는 다만 아득한 하늘만 바라볼 따름이로되, 후세 만인의 선생을 그리고 우르는 뜻이 결코 형상이나 유물에 있는 것이 정신과 사상에 있을 뿐더러 그 위에 선생의 48년 간의 생애가 바로 민족 정기사의 일절이라 그의 행적을 아는 것이 더 귀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 고종 7년 서기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고을 동쪽 10리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나니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인 고려 말엽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선생의 21대손으로 부친은 행우(行雨)공 모친은 벽진이씨(碧珍李氏)로 7세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용우(龍雨)공에게 입양하여 서울로 왔으나 13세에 양부가 별세하고 18세에 생부 또한 여의어 소년의 몸에 무거운 상복을 잇달아 입었건 마는 꾸준한 노력과 수양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갔던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놀랄 만한 진경을 보여 25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그게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갑오년이요.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철학과 천문. 고등수학. 법학. 의학등에 까지 두루 통달하여 학계의 최고봉이 되었으며, 고종(高宗)의 정치고문 헐버트박사와 친교를 맺어 외국의 신간서적을 섭렵하여 구미 정치 사조에도 밝았던 한편 관계로 나가서는 탁지부 재무관으로 부터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홍문관 시독(弘文館 侍讀). 시강원부담사(侍講院000)를 지나 궁내부특진관. 외부교섭국장. 학부. 법부협판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른것은 을사년 36세 때이었다.
서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종로에서 연설하고 통곡하고 오적(五賊)을 베어 국민들에게 사하소서 하고 불튀는 상소문을 위에 올림과 함께 벼슬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4월 18일 서울을 벗으나 북간도로 망명하여 거기서 서전서숙을 세우고 동포 자제들을 교육하더니,
다시 다음해 서기 1907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본국으로 부터 아우 상익(相益)이 인도해온 이준(李準)과 만나 베드로그라드로 전 공사 이범진(李範晋)을 찾아가 상의하고 선생은 정사(正使). 이준(李準)은 부사(副使)로, 황제의 밀사자격을 띠고서 통역하는 책임을 진 이범진의 아들 위종(瑋鍾)과 함께 3인 동행으로 극비밀리에 네델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도착하니 그것은 6월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적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보장 받으려 함이었으나, 마침내 밀사들의 피듣는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또 기자협회 모임에서 연설한 것도 필경 보람없이 된 후에 7월 14일 이준(李 準) 동지가 통곡하다 못해 피를 토하고 순국하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선생은 그 길로 불국(불란스).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歷訪)하며, 호소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고종 황제를 모셔다가 망명 정부를 세우려 하던중 마침내 1910년 8월에 국치(國恥)를 당하자 권업회(勸業會)를 설립하여 산업진흥에 애쓰고 하바로브스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기도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그 계획마저 꿈같이 사라저 가슴에 사무쳐 오르는 통분으로 침식을 잊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니코리스크로 옮겨 신음하다가 이동녕(李東寧)등 동지들에게 상해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과 그 유물은 모두 불태우고 유해는 가루내어 시베리아에 흩뿌리고 광복하기까지는 제사도하지말것 등을 유언하고서 1917년 정사는 음력 2월 초 9일 바람찬 만리 이역에서 눈 못 감은 천추의 원혼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된 오늘이외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우리의 위로 웃고 받으옵소서.
1971년 3월 1일 이은상(李殷相) 짓고,
이범석(李範奭) 비명,
이상복(李相馥) 비문 쓰고,
보재 이상설선생 유적보존위원회 세우다.
옮긴이 : 野村 李在薰
↑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각
↑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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