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선생의 유훈

야촌(1) 2012. 5. 1. 00:35

보재 이상설선생의 유훈

 

선생은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깨끗했고, 선사(仙師)와도 같이 단정했다.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부사존장(父師尊長)을 경모하며, 연하를 사랑하고 생양부모(生養父母)에 극진한 봉양은 남촌의 효자로 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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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완희(보재 선생의 조카)

 

[1] 나의 시신과 유품을 불태우고 광복을 보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전기를 위한 자료를 모아 보려는 생각은 일제 치하에서는 감불생심(敢不生心)이었고, 해방이 된 후에야 만시지탄(晩時之嘆)이나 서둘러 보게 되었다.

 

현재에 모여진 자료가 선생의 하신일을 낱낱이 드러낼 수 있는 고증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보재(溥齋) 선생의 48년간의 생애를 통하여 하신 일을 잘라 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망국늑약(亡國勒約)을 한사코 저지하고자 벌였던 국내에서의 구국활동 시절.

둘째는 국권회복의 방향을 해외로 돌려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려던 밀사(密使) 결행시절.

셋째로는 구미 열강을 순방하여 일본의 불법 무도를 세계 만방에 증식(證識) 시킨 후 본국과 해외에 산재한 교포를 규합하고, 구국 운동의 거점을 노만(露滿) 접경에 두고 교포의 자활책과 교육. 양병(養兵) 등 독립 세력의 태반(胎盤)을 기르던 시절이라고 하겠다.

 

보재선생의 행적은 조국을 떠나신 이후로는 해아밀사(海牙密使)로 출정하신 동기와 선행 공작 등 당시에 감행된 모든 일이 일제의 엄중한 감시하에 있었던 만큼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져야만 했기에 일반 세간에는 드러날 길이 없었고, 그 후의 사실은 끝끝내 이면 공작에 묻혀서 노령(露領)에서의 조국 광복을 위한 부절(不絶=끊이지 않음)의 경륜과 심혈을 다한 활동을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더욱이 당시 비분강개(悲憤慷慨)에 잠겼던 조국 땅에 전해진 만국평화회의장(萬國平和會議場)에 나타난 한국 밀사의 할복 자결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는 분명히 본국 국민에게 독립 항쟁의 자각을 일깨워 줌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너무나 찬연한 공명 담을 정점으로 밀사의 보다 알차고 보람 있는 그 후의 활약사는 들어 볼 흥미조차 잃고 헤아가 구국활동의 종국인양 진정한 사실(史實)은 영영 땅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선재생의 행적이 전혀 현양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선생이 해아에 정사(正使)로 수명(授命) 되시고 그 후 왜정(倭政)이 집행한 결석재판(缺席裁判)에서 수괴(首魁)로 언도되어 교수형의 처단을 받았다는 것이다(이준. 이위종 양 밀사는 종범이라 종신형에 처단되었다)

 

그뿐 아니라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오(伊藤博文) 저격도 보재선생의 지령이라고 일인은 단정하였으므로 해방 전까지도 선생의 단 한분의 동기(同氣)인 나의 선인(相益)과 독자(獨子) 종형(從兄=4촌형) 정희(庭熙)는 조그만 사건만 있어도 항시 그 동정을 감시당해 오던 처지라 다소간의 유물. 유필(遺筆) 등을 친척집에 나누어 맡겼더니 피난통에 그나마 소실된 바도 있고, 선생의 사실(史實=역사적 의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왜정 때는 혐의를 받을까 남에게 옮기려 들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한스럽고 유감된 일로는 보재선생의 운명 때, 그 유언이 너무도 지엄하여 이에 거역치 못하고 선생의 유품과 유필 전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선생의 눈 앞에서 소각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최후까지 모셨던 이동년(李東寧) 씨의 너무나 순종에만 치우친 당시의 자신을 뉘우치는 후일담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해방 직후 우리는 부족한 자료나마 선생의 전기를 먼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씨에게 상의하였다. 위당(爲堂)도 의당 자기의 임무인양 생각하고 흔쾌히 응락하였다. 그러나 위당은 애석하게도 6.25동란 때, 납북 당하고 말았다.

 

그후 자료를 들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씨를 찾았다. 당초 우리는 부탁을 주저한 바도 있으나, 육당도 자신의 전과(前過)를 속죄하는 뜻에서 꼭 보재선생의 전기를 피로서 써 보겠노라 하면서 굳게굳게 자신에게 다짐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미구에 육당도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는 이미 당시의 사적(史蹟)이 왜곡된 채 읽혀지고 있어 보다 보다 정곡(正鵠)한 사실을 밝히려고 자료와 집필자를 얻기에 지친 가운데 선생의 죽마고우였던 이시영(李始榮) 부통령도, 최후까지 모시었던 동지(同志) 조성환(曺成煥) 옹도, 선생을 가장 경모하고, 당시의 양병기지(養兵基地) 와 계획까지를 설명하시던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마저도 돌아가시고, 또 노령(露領) 시대의 동지 윤일병(尹逸炳)씨를 위시한 당시를 고증해줄 증인들이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시니 되도록 광복 30년을 기하여 전기 출간을 서두르고자 한다.

 

해방된지 이제 30주년, 보재선생의 사적도 차차 햇빛을 볼날이 멀지 않은것 같다. 그러나 가끔 문득 생각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8.15광복이 우리의 힘으로 전취(戰取)한 것이 못됨을 한하는 선생의 고혼(孤魂=문상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이 아직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지금도 자신의 생전의 행적을 남기려 하지 않고 그 이름도 흔적조차 없애려는 유지(遺志)를 고집하시는 것인지 알 길이 없음을 한하고 있다. 

 

[2] 일화의 출처

내가 일찍이 들었던 보재선생에 관한 일화는 주로 나의 선비(先妣=돌아가신 어머니를 말함)가 우리집으로 입가(入嫁)하여 선생이 출국하실 때 까지 10년간 시숙(媤叔=남편의 형제)으로 가까이 모시며 겪었던 일들을 들어 두었던 것이다.

 

입가(入嫁) 이전의 일들은 나의 선고(先考=돌아가신 아버지)와 백모(伯母) 님으로부터 선비가 들어두었던 것이며, 수학시대의 일은 한 동리 옆집에서 7. 8세 때부터 동문수학(同門受學)으로 조석 상봉하던 전 부통령(副統領) 이시영(李始榮)씨가 환국한 후 여러 날 그 댁에 찾아가서 상세히 들어둔 것을 그대로 옮긴다.

 

●천하대재(天下大才) 

   보재선생은 당시에 개세(蓋世)의 고재(高才) 또는 신동, 남촌(南村=오늘날 서울의 중구 남산동, 필동, 묵정동에 이르는 남산기슭의 동리)의 3재동『才童 : 치재 이범세(恥齋 李範世). 취간 서만순(徐晩淳 등 3인』으로 칭송되었음은 누가 집필한 인물평에서도 볼 수 있다.

 

선생의 공부는 거의 자습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그 한 예로 러시아에 가서 처음배운 러시아 어를 두달 만에 능통하여 재로교포(在露僑胞)에게 문법까지도 가르치셨다고 한다. 보재선생은 학문 연찬(硏鑽)의 자세가 비범하여 배우기 시작하면 지정지밀(至精至密)하여, 그 학문의 근굴(根窟) 까지 뚫어보는 철저한 습성을 가지고 계셨다.

 

외국에 가서 법률. 수학을 전공했다는 당대의 제1인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귀국하여 선생과 토론한 후. 자기의 스승이라고 경복하는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보재선생이 18세 때, 선생 격으로 학우 7. 8인과 신흥사(新興寺)에서 합숙(合宿) 공부하실 때의 일(李始榮선생의 회고담)이다.

 

선생은 동문 7. 8인중 매일 제일 늦게 자고,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셨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 한낮에 반듯이 30분간 낮잠을 잦는데,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3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특히 기이한 것은 선생이 취침 중에 옆에서 한 이야기를 깨어 역역 히 옮기며, 또한 풀지 못하던 난 문제를 꿈속에서 풀었다는 설명 등, 그 두뇌야 말로 분석. 종합을 겸비 한듯 했다.

 

이같은 박식포재(博識抱才)였으니 동분서주의 망명생활이 아니었더라면 평생의 저작도 무수했겠지만, 적었더라도 이 가운데 한편의 유서도 후세에 전하지 못함은 이 또한 한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에 계실 때, 장호문(張浩文)이라는 한교(韓僑)가 하던 한약방(漢藥房)에 보재선생이 자주 들르시더니, 미구에 근동(近洞)에서 원동(遠洞)으로 점차 의술의 고명함이 자자하게 전파되었다 한다.

 

●선탈(禪脫)한 사상.

   도오(到奧)한 관념 보재선새의 인품은 유리(儒理)에 깊은 연구와 선전(禪典)의 두터운 궁리(窮理)를 다한 분이라 평하고 있다. 선생이 25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에 오르기 시작하여 27세가 되던 1896년 1월에 성균관(成均館) 관장(館長). 4월에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에 임명되었으며, 6월 20일에 의원(依願) 사임 한 후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고 듣고 있다.

 

선생이 34세에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으로 다시 임관되기 전 수년간은 휴관(休官) 중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이름이 나자 시국은 변하였고, 묘당(廟堂)에 참여하니 간신적자(奸臣賊子)의 도량(跳梁)은 일익우심(日益尤甚)이라 국운은 이미 기울었다고 한탄할 때, 한동안 선생은 두문불출 하며, 매일 의관을 정제하고 벽을 향하여 단좌묵상(端坐默想)을 식음조차 잊으시도록 몰입하여 오랜 세월을 보내신 일이 있었다 한다.

 

아마 이때야말로 선생이 혼탁한 세사(世事)를 체념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그 근굴(根窟)을 뚫어 시던 때가 아니었던 가 한다. 그러나 미구에서 주상(主上)이 선생을 불러 조정의 주석지신(柱石之臣=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의 구실을 하는 아주 중요한 신하)으로 지극히 총애하셨고, 선비들이 선생의 옳은 뜻을 믿고, 따르게 되자, 선생은 “성패를 어찌 논하랴. 오직 명(命)을 다해 볼뿐, 이 마음은 오직 상천(上天)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결단을 내리고, 다시금 구국의 길을 조정에서 찾으려 하셨던 것이라고 본다.

 

이는 마치 남양초당(南陽草漆)에서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끝내 고사하지 못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심정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성리학(性理學)으로 깊고 넓게다져진 그의 안계(眼界)에는 자신을 검박(儉朴)하게, 마음을 소담(素淡)하게, 상하를 경애하고, 기호(嗜好=도락. 취미)를 성색(聲色=말소리와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고, 항상 공(功)에는 남을 앞세우고 자기는 물러서며, 대사(大事)만을 이룩하자는 주소일념(晝宵一念=하루종일 한마음)으로 종생일관(終生一貫=살아서 죽을때 까지 한마음) 하셨던 것이다.

 

인간은 제 잘난 맛에 산다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망을 버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든 행동은 자기 발현의 수단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의 최후의 바람이 있다면 “내가 이 같은 잘나고 훌륭한 일을 했노라”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인 관설재(管雪齋)가 집필한 .『한국지사소전(韓國志士小傳, 1339년 중경 刊)에서도 선생의 인간으로서의 범속한 경지를 초극한 위대함을 찬양하여 선생의 관념과 담담한 심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분의 평생에 저작이 퍽 많았는데, 어느날 초고를 꺼내어 다 불태워 버리고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하늘을 나는 새와 똑 같다’ 아예 흔적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일장환경(一場幻境=꿈나라. 유토피아. 선경(仙境)이다.

 

하필이면 저 환경(幻境)을 가지고 실지와 같이 만들겠는가” 선생은 항상 염원을 이루지 못함을 괴로워 하시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自責)하시며 자기를 빛내고자 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세상에 왔던 흔적조차 남기기를 원치 않으셨다.

 

자기 생전에 자신의 공적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서둘러 동상까지 세우게 했던 위대한 영도자의 작태(作態)나 내부(乃父=네 아버지)의 공적이 굳이 역사 교과서에 실어보려고, 떼를 썼다는 영달(榮達0한 후예들의 심리는 간단히 짐작해 넘길 수 있다.

 

이같은 자기 발현의 욕구가 인간 심리의 속성(屬性)이요. 생리인줄 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통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인의 훼예포폄(毁譽褒貶=비방과 칭찬)에 개의치 않고, 애당초 영욕(榮辱) 조차 무시하는 보재선생의 범속(凡俗)한 사념(思念)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범속한 우리로서는 어름해 헤아려 볼 수조차 없다고 하겠다.

 

●죽음을 보람 높게

   옛말에 『강개부사이 종용취의난『慷慨赴死易 從容就義難=몽골 초원에서 발원한 원나라가 중국 송나라를 멸망시킬 때, 송나라의 충신 사방덕(谢枋得)이 한 말로, “분을 참지 못해 나아가 죽기는 쉬우나 치욕을 참고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라는 뜻. 즉 때를 기다리기 위해 물러서는 것은 지는 게 아니다. 기다릴 줄 아는 것도 능력이고 용기다』이라는 어귀가 있다.

 

격분하여 사결(死決) 하기는 쉬워도, 어떤 치욕도 인내하며, 생존하여 대의(大義)에 종신(終身)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또 ‘땅밑에 해골 되어 세상변고 나라걱정 잊으려 했었다면, 목 찔러 죽을 칼 한 자루 못 구하랴만’ 하는 속담도 있다.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선생과 같이 떳떳이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죽음을 종용한 분도 없거니와, 더 한층 놀랍게도 임금에게 죽음을 강권한 무엄한 신하도 없으리라.

 

보국판서(輔國判書) 계정(桂庭) 민영환(閔泳煥) 충정공(忠正公)의 자결은 물론 국망족멸(國亡族滅)의 비통을 못 이긴 죽음이었으나, 을사(乙巳) 년에 이르러 왜적의 침략마수가 노골화함을 직감하신 보재선생은 지기요 문경(刎頸=목을베다의 비유말)의 벗으로 당시의 참정(參政)인 한규설(韓圭卨) 및 민영환(閔泳煥) 양인과 직도(直道)할 늑약(勒約)의 저지 책을 밀의(密議)한 끝에, 조약이 강요되어 피할 길이 없을 경우에는 군주(君主)나 중신(重臣)중 누구인가 한두 사람이 자결을 감행함으로서 합의 조약이 아니라 강압적 불법처사임을 국제적으로 알려 이를 저지하자는 최후적 대책을 이미 굳게굳게 맹세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죽음을 각오했던 사람은 각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이참찬(李參贊) 상설(相卨)선생이 아니라, 한규설(韓圭卨). 민영환(閔泳煥)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군대에 포위대어 늑약(勒約)이 강행되던 날 저녁, 궁중 의석(議席)에 민충정공(閔忠正公)은 공교롭게도 참석하지 못하였고, 자결의 이행 책임자인 한참정(韓參政)은 때마침 왜경에 의하여 별실에 경리 감금되어 결행의 기회를 놓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새벽에 이르러 참정(參政)을 제외한 소위 매국오적(賣國五賊)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을사오조약의 체결을 알게 된 한규설(韓圭卨) 참정이 왜경의 강금이 풀리고 포위했던 군대가 철거하자, 먼저 청사로 나가 거기서 철야대기 중이던 이참찬 상설선생의 손을 맞잡고 통곡하였던 사실은 저질러 놓은 일도 그렇거니와 이제까지의 맹세를 수행치 못한 죄책을 모면할 도리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 일이 있은 그 다음날 보재 이상설선생은 곧 고종에게 저 유명한 “순사직(殉社稷)”하시라는 상소를 올려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전임(前任) 원로 조병세『趙秉世, 1827~1905. 12. 1』 등을 소두『疏頭=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하여, 오적(五賊)의 단죄와 조약 파기의 선언을 강요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궐문(闕門)에 부복(俯伏)하고 대죄하였다.

 

국권의 수호라는 대의 앞에 임금의 순국(殉國) 권고는 불충(不忠)이루고 처죄(處罪)하기 보다 임금으로서는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의 성충(誠忠)을 가상히 여겼고, 적절한 대책을 색하기에 전념했을 것이다.

 

권국의 유지 회복의 길이라면, 친우의 목숨도 달라 할 수 있고, 또 상대도 혼연히 순응 할 줄 아는 그네들의 지성이 아니었을까! 이점에서 나라를 위해 택하였던 죽음의 기회를 놓인 민 충정공(閔泳煥, 1861.7. 2~1905.11.30)은 마땅히 마침내 그 길을 택하였던 것이고, 보재선생은 이 지기(知己=)의 존귀한 죽음을 헛되이 할세라 그 이튼 날 새벽에 종로 연설의 국민적 시위를 전개하여 국민의 애국 항쟁정신을 고취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보재선생이 국권회복에서 희생된 지사들의 죽음을 거룩한 정화(精華=사물의 더러운 것을 없애 깨끗하게 함)로 승화시킨 장면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또 해아밀사 중 한분의 죽음역시 선생이 베풀어 본 의지의 하나였다고 믿어진다.

 

이역 수만리 권국회복의 결정장에 임하여 고립 무원한 환경에서 동지를 잃게 된 보재선생의 심경은 그를 어떻게 보다 훌륭히 승화시킬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신 나머지 분사라고 하기보다는 금후 맥맥히 계승해야할 국민의 항일정신 진작에 결착시키려 하셨던 것이 틀림없는 당시의 정세를 판단한 선생의 포석(布石)이 아니었을까!?

 

[3] 선생을 무어라 부르오리까.

    인물이 잘나고 보면 항용(恒用=언제나) 옥(玉)에도 비하고 별에도 견주게 된다. 선생은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깨끗했고, 선사(仙師)와도 같이 단정했다.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부사존장(父師尊長)을 경모하여, 수하(手下)를 사랑하고, 생양부모(生養父母)에 극진한 봉양은 남촌의 효자로 칭송되었다.

 

그렇다고 생원(生員)님이 아니라 활달자재(闊達自在)하여 술을 즐겨 마시면 벗들과 담론하기를 좋아했고, 재주 있는 생각이 보통사람과 달리 뛰어났고, 실로 풍채도 유연한 대장부였다. 이 같은 성격의 선생은 언제나 모든 고난에도 용기 백출하여 후배를 격려하고 낙망을 모르며, 새로운 계획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듯이 궁할 줄을 모른다.

 

이 같은 선생의 인물과 풍모를 추앙하는 동지와 시종자들은 그 주옥같은 갸륵한 인격을 평하여 성인(聖人). 위인(偉人) 이라기보다 서인(瑞人)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많은 지사. 지도자격의 인물이 군주(群住)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빛을 내는 휘황한 인격을 보고 남십자성(藍十字星)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4] 광복 활동을 좀먹는 파쟁 병폐

    보재선생은 이조 말엽 국내에서 파당의 고질적 병폐를 일찍이 통감하신 바 있어 오나가나 천시(天時)보다 지리(地利=땅의 이로움)를 생각했고, 지리보다 인화(人和)를 앞세우며, 각별히 융화. 결속에 전념하셨다.

 

망명 중에 각지에서 직업 알선이나 결혼주선 등 갖은 방법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실화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서 듣게 된다. 그 당시 노령(露領)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함경도인 또는 평안 남. 북도 인으로서 남부여대하고 떠나온 사람들이며, 고국에서 국은(國恩)을 전혀 모르고 굶주리던 사람들의 개척민이라 국가에 대한 관심과 관념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선주자(先住者)는 신규 내도자(來到者)를 시기 . 질시하니 독립운동을 밑받침할 결속 단결과 안정이 있을 수 없고, 항상 모략. 중상으로 급기야는 독립지도자의 거성(巨星)이었던 정순만(鄭淳萬)의 피살 사태는 한교(韓僑) 사회에 큰 충격 사건으로 등장되었고, 그 같은 모략이 선생을 괴롭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선생의 기품과 위엄에는 아무리 포악한 상대라도 위압되어 감화되던 일들과 선생의 담박 청렴한 사실을 알자 다시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생이 광복운동을 하는 중에서 이 파쟁으로 인한 불안한 처지와 심경은 해항(海港)에 거주하던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 와의 내왕 서한에 서도 누누이 기록되어 있고, 이로 인한 선생의 고민과, 병환도 여기에 기인되어 있다고 한다.

 

선생과 같은 큰 인물이 공을 남에게 돌리고, 자기를 죽여 대의에 봉사하려다 받은 고충은 실로 애석하기 그지없는 통한사라 하겠다.  이 같은 소격불화(疏隔不和=서로 사이가 두텁지 못하여 사이가 좋지 못함)의 원인을 제거하고자 선생은 대종교(大倧敎)는 종교의 포교를 가장하고 독립운동을 잠행실천(潛行實踐) 할때, 자신은 전혀 감추고, 이 대종교의 교주를 나철(羅喆)로 하고, 백순(白純)을 교주로 하였던 것도 백순의 신분이 본시 전라도에서 아전(衙前)을 지내던 사람이라 반상(班常)이 다 같이 접촉하기 쉬운 중화적 신분을 택하신 것으로 듣고 있다.

 

[문헌자료]  나라사랑 1975년 제20집(112P~1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