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158

이상설(李相卨)

독립운동가 이상설 1870. 12. 7 충북 진천출생~1917. 3. 2.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순국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보재 이상설선생(溥齋李相卨先生) (1870. 12. 7 ~ 1917. 3. 2)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 학문과 관인생활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복남(福男, 相男),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라고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동(才童)-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가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李濟村)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무렵에는 박의암(朴毅菴)이..

勸業會 ㅣ 大韓光復軍政府

권업회(勸業會) 권업회 [勸業會] ...1911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鎔)·엄인섭(嚴仁燮) 등이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주요 도시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같은 해 12月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이에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권업회라는 이름만 보면 정치적인 색을 띠지 않는 순수 경제단체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붙인 위장명칭이고 실제는 항일구국운동이 목적이었다..

비유자문답 서(非有子問答 序)

韋堂 安潚 著「非有子問答」序 [해설]이 글은 이상설(李相卨)선생이 동향(同鄕)의 벗이며, 먼 인척인 안숙(安潚)이 저술한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을 보고 그 서문으로 지어준 것이다. 이 글을 지은 때는 이상설선생이 과거에 급제하고 관계(官界)에 나간 다음해인 1895년 11월로서 약관 26세 때였다. 선생은 이미 전통적 성리학자로 유명하였지만, 한편 개화사상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일가견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의 병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습속(전통과 구습을 말함)에 얽매여 시세(時勢)의 발전을 알지 못하여 개혁을 하지 못하고, 옛것에만 빠져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開化)에만 급급한 것으로 근저를 굳게 갖지 못하고..

동아시아 과학기술의 전통과 미래

동아시아 과학기술의 전통과 미래 이상설(李相卨ㆍ1870~1917)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1907)에 파견됐던 고종의 밀사 이상설(李相卨ㆍ1870~1917, 사진 중앙)은 간도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이란 학교를 세워 조선 민족의 교육을 일으킨 인물이다. 독립운동가로만 널리 알려진 이상설은 1900년에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 책을 썼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上野淸ㆍ1854~1924)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하여 편집한 책이다. 당시에 발간된 송상도(宋相燾ㆍ1871~1946)의 ‘기로수필(騎驢隨筆)’에는 이상설이 이 책으로 당대 최고의 수학자라는 평가를 얻었다고 기록돼 있다. 여하튼 이상설은 이 책을 서전서숙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로수필’..

이상설의 한역육법전서 초고

법률신문 2012. 02. 06 [고미술이야기] (10) 한역육법전서 초고 기고 : 김영복 KBS 진품 명품 감정위원 2000년쯤으로 기억되는 때에, 경주이씨종친회에서 사무를 보던 이 선생이 찾아 오셨다. 통문관 때부터 책을 수집하던 분으로 집안 관련 책이나 문서, 선조(先祖) 간찰을 그동안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두 종의 책을 내놓으시는데 한 권은 이순신장군 관련이고 한 첩은 지금 소개하려는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1870~1917)이 일본글로 된 국제관계에 관한 법령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초고였다. ↑보재 이상설이 국제관계 법령을 한문으로 번역한 친필 초고. 일본책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지만 그 책의 제10장 간섭(干涉)과 제11장 국제쟁의조화방법(國際爭議調和方法) 두 장(章)만 번역한 12쪽에..

이상설선생연보

연대 나이 활동내용 1870년(고종 07) 1세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산직(山直) 마을에서 가난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출생하다. 본관은 경주(慶州), 고려조(高麗朝)의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政丞)을 역임한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22대손이고. 조선조(朝鮮朝)의 인조 원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명신(名臣)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이며. 현종(顯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경휘(慶徽)의 10대손이다. 아명(兒名)은 복남(福男)이고. 자(字)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혹은 碧蘆舫主人)다. 동기(同氣: 형제)로는 11년 아래인 상익(相益)이 있다. 1876년(고종 13) 7세 서울 장동(長洞..

보재 이상설선생 약력

보재 이상설선생 약력 [해설] 이 글은 1975년 5월 31일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남산골에 이상설선생의 숭모사(崇慕祠)인 숭렬사(崇烈祠)를 세울 때 지은 보재 이상설의 약력이다. 이곳의 숭렬사는 1996년 8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의 선생의 생가 경내로 이전 중건하고 주변을 정화하였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1870년(고종 7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잔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忠淸北道 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山直) 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 하시었다. 선생의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慶州)이시고 고려 말의 명유(名儒) 익재(益齋) 이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