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村 李在薰 102

예문관(藝文館)

■ 예문관(藝文館) [요약] 고려와 조선 시대, 임금의 칙령과 교시를 기록하던 관청 ----------------------------------------------------------------------------------------------------------------------------- 조선시대 임금의 말[言]이나 명령을 대신하여 짓는 것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원봉성(元鳳省)·사림원(詞林院)·문한서(文翰署)·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한다. 4관(館) 또는 관각(館閣)의 하나이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예문춘추관을 두어 교명(敎命)과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그 ..

홍문관(弘文館)

■홍문관(弘文館) [요약] □ 고려시대 임금의 자문기관으로. 995(성종 14)년에 숭문관을 고친것이다. □ 조선시대의 삼사(三司)의하나. 궁중의 경적(經籍), 사적(史籍) 등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을 맡아 보던 관아이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經筵廳)과 합병하여 이듬해 경연원이라 개칭되었다가 융희원년인 1907년 에 폐지되었다. ------------------------------------------------------------------------------------------------------------------------------------------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

안향(安珦) 문하(門下)의 육군자(六君子)

■ 안향 문하의 육군자(安珦 門下의 六君子) 성리학의 본향인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를 육군자라고 해 추앙해 마지않았다. 육군자는 국재 권부((菊齋 權溥) , 동암 이진(東菴 李瑱), 역동 우탁(易東 禹倬),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덕재 신천(德齋 德齋)등을 일컫는다.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동암의 아들이며, 국재 권부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이 세상을 떠날 때 백이정, 권부 등 문인들에게 “나는 학문이 그대..

회재 이언적선생 묘(晦齋先生 李彦迪先生 墓)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는 부후묘(婦後墓)로 앞쪽에 회재 묘, 뒷쪽은 부인 함양박씨(박숭부의 딸) 묘이다. 묘의 소재지는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이다. 그가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이나 귀양살이 동안 아버지 회재를 효심으로 보살피고 사후에 유해를 석달에 걸쳐 고향까지 운구한 그의 유일한 핏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제도에 따라 종제 경력공 이통(李通)의 둘째 아들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는 부후묘(婦後墓)로 앞쪽에 회재 묘, 뒷쪽은 부인 함양박씨(박숭부의 딸) 묘이다. 그가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이나 귀양살이 동안 아버지 회재를 효심으로 보살피고 사후에 유해를 석달에 걸쳐 고향까지 운구한 그의 유일한 핏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한상질과 권준의 분묘 판결

■ 주인이 바뀐 한상질(韓尙質)과 권준(權準)의 고려벽화묘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 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韓尙質,1350(충정왕 2)∼1400(정종 2)]이 아닌 구안동권씨 권준[權準,1281(충렬왕 7)∼1352(공민왕 1)]이며 안동권씨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6백여 년간 청주한씨 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앞의 묘가 창화공(昌和公) 권준(權準)의 묘이고 뒤의 묘가 문열공(文烈公) 한상질(韓尙 質)의 묘인데 청주한씨 문열공파종중에서는 권준의 묘를 한상질의 부인묘로 알고 600여 년간 묘셔왔다. ◇두분의 인측관계는 권준(權準)이 한..

청음 김상헌선생 묘

청음 김상헌과 조부 김생해선생 묘. ↑군수를 지낸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金生海) 선생 묘이다. ↑앞의 묘는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묘이고 뒷편이 조부 김생해(金生海) 묘이다. ↑김생해 선생묘 뒤에서 내려다 본 안산 전경(아랫 묘가 청음선생 묘이다) ↑사진속 김상헌 가족묘역에는 조부 김생해,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 백부 김극효, 백모 광주이씨, 부인 성주이씨의 묘가 보인다. ↑김상헌선생 묘비석 ↑김상헌선생신도비(金尙憲先生神道碑) / ○김상헌선생 묘의 규모(면적) : 300㎡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100호 ○문화재지정일 : 1987년 2월 12일 --------------------------------------- -----..

이달충(李達衷) - 고려말의 문신

■이달충(李達衷) 1309(충선왕 1)∼1384(우왕 10). 고려 말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권(仲權), 호는 제정(霽亭). 증조부는 문하평리(門下評理-從二品) 핵(翮), 할아버지는 밀직부사 세기(世基), 아버지는 첨의참리(僉議參理- 從二品) 천(蒨), 어머니는 연창군부인박씨(延昌郡夫人朴氏)이다. 1326년(충숙왕 13)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正三品)· 감찰대부 (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正三品)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호부상서로 있던 1360년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으나,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1366년(공민왕 15)에 밀직제학(密直提學-正三品)으로 다시 ..

제갈량(諸葛亮) - 중국의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요 및 전략가

■제갈량(諸葛亮,18~234) ↑제가량 상(諸葛亮像)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낭야군 양도현(瑯琊郡陽都縣;山東省沂南縣)에서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劉備, 161~223)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적벽(赤..

조비(曹丕).

■조비(曹丕, 187~226) - 조조의 장자 자(字)는 자환(子桓), 시호(諡號)는 문제(文帝)로 중국 삼국시대위(魏) 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씨(劉氏)씨가 낳은 조앙(曹昻)과 조삭(曹鑠)이 모두 일찍 죽고, 그의 어머니인 변씨(卞氏)가 황후(皇后)가 되어 조조의 적장자(嫡長子)가 되었다. 조조는 원소에 대항한 관도전투(官渡戰鬪: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화북(華北)의 2대 세력이던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의 일대결전)에서 승리한 뒤 위공이 되었고, 216년에는 위왕으로 봉해져 사실상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조조는 220년 뤄양[洛陽]에서 사망했고, 조비가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의 헌제(獻帝)에게서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중국 한(漢: B..

조조(曹操).

■ 조조(曹操 : 155~220) ↑조조(曹操)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조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에 해당하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된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탁(董卓)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도군의 맹주 원소(袁紹, ?~202)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손권(孫權)·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