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회재 이언적선생 묘(晦齋先生 李彦迪先生 墓)

야촌(1) 2013. 8. 2. 13:12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는 부후묘(婦後墓)로 앞쪽에 회재 묘, 뒷쪽은 부인 함양박씨(박숭부의 딸) 묘이다. 

    묘의 소재지는 경북 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이다.

 

그가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이나 귀양살이 동안 아버지 회재를 효심으로 보살피고 사후에 유해를 석달에 걸쳐 고향까지 운구한 그의 유일한 핏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제도에 따라 종제 경력공 이통(李通)의 둘째 아들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는 부후묘(婦後墓)로 앞쪽에 회재 묘, 뒷쪽은 부인 함양박씨(박숭부의 딸) 묘이다. 그가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이나 귀양살이 동안 아버지 회재를 효심으로 보살피고 사후에 유해를 석달에 걸쳐 고향까지 운구한 그의 유일한 핏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제도에 따라 종제 경력공 이통(李通)의 둘째 아들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회재 이언적선생의 묘는 부후묘(婦後墓)로 앞쪽에 회재 묘, 뒷쪽은 부인 함양박씨(박숭부의 딸) 묘이다.

묘의 소재지는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이다. 

 

그가 평안도 강계에서 6년간이나 귀양살이 동안 아버지 회재를 효심으로 보살피고 사후에 유해를 석달에 걸쳐 고향까지 운구한 그의 유일한 핏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제도에 따라 종제 경력공 이통(李通)의 둘째 아들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行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贈大匡輔國崇政大夫 議政府領議政 謚文元公 晦齋李先生之墓

 

생전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벼슬을 하셨고, 사후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문원공이란 시호가 내려진

회재 이선생의 묘' 이다.

 

 

↑회재선생묘 뒤에서 아래로 바라본 문인석과 신도비의 모습.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이 비는 선조 초 추숭과정에서 비문은 호남의 거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

(李山海)가 쓰고1577년(선조 10)에 옥산서원내(玉山書院) 건립되었으며, 9년뒤 1586년(선조 19)  청허재(淸

虛齋) 손엽(孫曄)의 글씨로 묘소 앞에 신도비가 또 하나 건립되었다.  비석에는 6.25전쟁때의 총탄 자국이  좌측

면과 뒷면 가운데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선생 신도비

 


■ 회재 이언적(1491~1553)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여주(驪州=驪江),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고, 어머니는 계천군 손소(鷄川君 孫昭)의 딸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초명은 적(迪) 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이언적은 1491년 외가인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에게 글을 배우고 1514년(중종9년) 문과 별시에 급제 하면서 관직에 출사했다. 그 후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으며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해 낙향하여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517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지방향교 교사)으로 있던 27세의 나이에 외숙인 망제 손숙돈(忘齊 孫叔暾)과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曺漢輔)간에 벌어진 무극태극논쟁에 가담하여 양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의 견해를 논하였다.

1537년 김안로일당의 몰락 후 홍문관 교리, 직제학을 거쳐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일강십목 상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63세로 죽었다.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하고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여 조선의 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조선의 성리학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성리설(主理的成理說)은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1610년(광해군 2년) 문묘에 배향되고 경주 옥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