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村 李在薰 102

경언재기(景彦齋記)

■ 경언재기(景彦齋記) 우리영남(嶺南) 고령군은 본래부터 명승지(名勝地)라 일컬어왔다. 물은 대가천(大伽川)이 안고 흐르며, 산(山)은 웅장한 가야산(伽倻山)이 있고, 서(西)쪽엔 만대산(萬岱山)이 우뚝 솥아 그 아래 산맥(山脈)이 다시 동(東)으로 향하여 일국(一局)을 형성하니 이곳이 박곡리(璞谷里)로 즉 김녕김씨(金寧金氏)가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다. 골짜기가 깊숙하고 재실(齋室)이 높고 우뚝하니 이름하여 경언재(景彦齋)라고 하였다. 누구를 위하여 지었는가? 옛 처사(處士) 김녕김씨(金寧金氏) 휘(諱) 광준(光峻), 자(字) 준팔(峻八), 호(號) 언곡(彦谷)은 장릉(莊陵-단종의 능) 순신(純臣)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선생의 구(九)세손이다. 공(公)이 일찍이 언양(彦陽)으로부터 이곳에 이거(移..

이대기 묘갈명(李大期墓碣銘) - 정온(鄭蘊)

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1934년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출생인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1551년(명종 6)~1628년(인조 6)』 묘갈명이다. 묘는 경남 합천군 청덕면 대부리 소부마을에 있다. -------------------------------------------------------------------------------------------------------------------------------------- 형조정랑 이공 묘갈명 병서 (刑曹正郞 李公 墓碣銘 幷序) 동계 정온(鄭蘊,1569~1641) 찬(撰) 내가 공의 얼굴을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일찍이 자리를 함께하여 절차탁마(切磋啄磨)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사람 됨됨이를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1608..

내암 정인홍 묘(來庵 鄭仁弘 墓)

[생년] 1536년(중종 31) [졸년] 1623년(인조 1) [본관] 서산(瑞山) [저작] 내암집 [관직]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옥사] 계축옥사(癸丑獄事) 정인홍(鄭仁弘, 1535년 9월 26일 ~ 1623년 4월 3일)은 조선중기,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과 남명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으며,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 학파의 지도자였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는 강경파로 북인이었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

황기로(黃耆老),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조선시대의 명필.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별좌에 그쳤다.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약간의 진적이 전하며, 《관란정첩(觀瀾亭帖)》‧《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현전하는 《고산서첩(孤山書帖)》은 이백(李白)이 쓴 〈회소상인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를 석각(石刻), 탁본한 것으로(1549년 씀.), 필치가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중 광초(狂草)를 방불 한다.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

[국역] 근역서화징(전3권)

■ 국역 근역서화징(國譯槿域書畵徵) 1998년(초판) - 시공사 출판 ㅣ 구매일자 : 2016. 04. 18 ㅣ 구매금액 : 250,000원. ▲필자 소장본 오세창(吳世昌)이 편찬한 우리나라 서화가의 인명사전으로, 1917년 편찬하고 1928년 대구 계명구락부에서 간행했다. 편차는 범례, 목록, 연대편람, 채용군서목(採用群書目), 인명총목, 권1 나대편(羅代編), 권2 여대편(麗代編), 권3 선대편(鮮代編:태조~인종), 권4 선대편(명종~현종), 권5 선대편(숙종~철종), 대고록(待考錄), 증록(增錄), 씨명자음검색(氏名字音檢索), 씨명자획검색, 별호자음검색, 별호자획검색의 순으로 되어 있다. 채용군서목에는 편찬할 때 인용한 서적을 수록했다. 〈삼국사기〉 외 274종의 서적을 저자의 출생연대순으로 서명·..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1935년 중국을 돌며 선전비행을 하던 당시 조종복을 입은 권기옥. | 국가보훈처 자료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의 비행학교 졸업장이 복원됐습니다. 권 선생의 공훈을 입증하는 기록물입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지난 2일 “권기옥 애국지사가 항공학교에서 받은 필업증서(졸업장)와 국민정부 군정부본부에서 받은 상위 관찰사 위임장 등 기록물 5건을 복원했다”고 밝혔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권 지사는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어린 나이에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어 독립운동가 문일민, 장덕진 등과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

사우재기(四友齋記) - 허균(許筠)

사우재기(四友齋記) 허균 찬(許筠 撰)/ 신해년(1611, 광해군 3) 2월 사일(社日)에 쓰다. [생졸년] :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재(齋)를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것은 왜냐? 허자(許子 저자 자신을 가리킴)의 벗하는 자가 셋인데, 허자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아울러 넷이 된 셈이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날의 선비는 아니고 옛사람이다.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다. 그래서 탄식하며, “벗이란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했다. 물러나와 생각건대, 온 세..

이도(李蒤 : 1593~1668)

■ 이도(李蒤) [생원] 광해(光海) 10년(161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9위(99/100) [인물요약] ◇자 : 자소(子韶) ◇호 : 현와(弦窩) ◇생년 : 계사(癸巳) 1593년(선조 26) ◇졸년 : 무신(戊申) 1668년(현종 9) ◇본관 : 전주(全州) ◇출생지 : 한성[京] ◇부모 : 영감하(永感下/부모가 죽고 없는 처지) ◇거주지 : 오늘날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서재골[書齋谷] [이력사항] ◇생원선발인원 : 100명[一等5명/二等25명/三等70명] ◇전력 : 유학(幼學) ◇부모구존 : 영감하(永感下=부모가 모두 돌아가심)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세량(李世良)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제릉참봉(行濟陵參奉) [처부(妻父)] ◇성명..

우범선(禹範善)-농학자 우장춘박사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우범선 선생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가운데 어린이는 훗날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 춘 박사이고,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1857년(철종 8) ~1903년 때의 조선 말의무신이며 친일파로 본관은 단양(丹陽). 농학자 우장춘(禹長春)의 아버지이다. 1881년(고종 18)별기군(別技軍)의 참령관(參領官)이 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1894년 8월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군국기무처의원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의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의 한명으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민비(閔妃,조선 고종의 황후(1851~1895)의 시해에 참..

부경별장(赴京別章)

구전집(苟全集) 八卷 ■ 김중청(金中淸) 1567(명종 22)∼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할아버지는 정헌(廷憲)이고,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이며, 어머니는 박승인(朴承仁)의 딸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典籍)·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신안현감(新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