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村 李在薰 102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선생의 草書 墨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선생의 草書 墨書 『이태백시(李太白詩)』 한 폭. ↑크기 : 41㎝(가로) × 60cm(세로) / 한옥션 경매시작가 8백만원 ●황기로(黃耆老), 1521년(중종 16)∼1567년(명종 22). 조선시대의 명필.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별좌에 그쳤다.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약간의 진적이 전하며, 《관란정첩(觀瀾亭帖)》‧《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현전하는 《고산서첩(孤山書帖)》은 이백(李白)이 쓴 〈회소상인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를 석각(石刻), 탁본한 것으로(1549년 씀.), 필치가 당나라 ..

강맹경 묘(姜孟卿 墓)

↑멀리서 바라본 묘의 전경 ↑좌는 문경공 강맹경선생묘(文景公 姜孟卿先生墓)이고, 우측은 配位 貞敬夫人 坡平尹氏墓이다. 부부지간 봉분이 다른 쌍분묘이지만 땅콩형상으로 이어져 있는 특이한 봉분 형상이다. ↑좌는 문경공 강맹경선생묘(文景公 姜孟卿先生墓)이고, 우측은 配位 貞敬夫人 坡平尹氏墓이다. ↑문경공 강맹경선생 배위 정경부인 파평윤씨 묘표. ↑아버지 문경공 묘 아래(앞)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아들 강윤범(姜允範)선생의 墓이다. ↑좌측 비각의 묘비가 구 묘비이고 아래쪽 묘비가 후손들이 세로 세운 것 입니다. ↑文景公 姜孟卿先生 神道碑閣/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강희안(姜希顔)이 글씨를 썼다. 1462년(세조 8) 5월 일에 비석을 세웠다. 조선조 영의정 강맹경 부인 묘 훼손 연합뉴스 l 기사입력 199..

淑夫人李氏墓誌銘/백사 이항복의 누님

숙부인 이씨 묘지명(淑夫人李氏墓誌銘) 이항복 술(李恒福 述) 숙부인 이씨는 경주인(慶州人)인데, 신라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인 알평(謁平)의 후예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몽량(夢亮)의 딸이며, 자헌대부 이조판서 눌헌(訥軒) 이선생(李先生) 문강공(文剛公) 사균(思鈞)의 외 증손(外曾孫)이다.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시집가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세량(世良)의 며느리가 되고, 승정원 좌승지 선(善)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은 숭록대부(崇祿大夫)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아내가 되어 아들 미(瀰)를 낳았는바, 미는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가 되었고, 딸 하나는 진사(進士) 이명한(李明漢)의 아내가 ..

도원선생문집(桃源先生文集) - 李末仝 著

[저자] 23世 이말동 李末仝 [판본] 목활자본 [책수] 2권 1책(全) [판식] 광곽크기(반곽기준) 15.2 센티 [행자수(반엽기준)] 10행 18자 [간행연도] 1924년 간행 /1999년 간행-景仁文化社 [기타] 內向2葉魚尾 [주기] 右桃源集詩什九什四附後人之文幷一篇也夫人之有文字猶天之有日星……尙可槩其性情之正學術之 正而亦可見其淸標實德交遊於大賢之世也……上章大淵獻(?) 鞠有華節仁州張錫英謹跋. ■ 도원선생문집(桃源先生文集) [생졸년] 1443년~1518년 1480년(성종 11) 司馬榜目 전체가 수록된 조선중기의 학자 이말동(李末仝/경주이씨 교감공 존사의 현손) 저(著) 목판본 1책 單券. 1443년(세종 25)∼1518년(중종 13). 조선 전기 유학자. 자는 자원(子源)이고, 호는 도원(桃源)이다. 본관은..

성서문집(城西文集) - 李尙彦(제정공후손)

필자소장본 성서문집(城西文集) ◈저자 : 28世 이상언(李尙彦) ◈간행연도 : 金晦鎭(1882~1965)이 跋文을 쓴 것이 1955년 정월이므로 이해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 판 종 : 석인본 ◈ 크 기 : 20㎝(가로) x 30.5cm(세로) ◈ 권차 및 발행사항 : 6권 3책 ◈ 내용 6권 3책. 석인본. 10대손 운호(雲護)· 진호(進護)와 12대손 명직(明職) 등이 편집, 간행하였고, 간행연도는 미상이다. 권두에 정종호(鄭宗鎬)의 서문과 권말에 김회진(金晦鎭)·운호·진호의 발문이 있다. 필자 소장본이다. 권1∼3에 詩 340여수, 부(賦) 1편, 서(書) 5편, 잡저 3편, 권4에 정문(呈文) 3편, 상량문 1편, 축문 11편, 제문 14편, 묘갈명 1편, 권5에 행장 2편, 권6에 가장 2편..

동각잡기(東閣雜記)-이정형(李廷馨)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찬술한 야사 책으로 조선의 건국 배경부터 선조 때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내용] 2책. 필사본.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한 배경으로부터 선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이라고도 하며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조선의 건국 배경으로부터 중종 연간의 기묘사화까지, 하권은 중종 말년의 정치적 사건으로부터 선조 때의 임진왜란까지를 취급하고 있다. 현재 『대동야승』 제53·54권에 상·하 두 권이 모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동야승』 중에서도 야사로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동각잡기』라고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어디까지나..

김효종(金孝宗) - 경순왕의 생부

■ 김효종(金孝宗) 신라시대의 왕족으로 아명은 화달(化達), 신라시대 화랑의 거두였다. 그는 재상 인경의 아들로 문성왕의 4대손이며 경순왕의 생부이다. 왕건의 제5비인 신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억렴의 동생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할아버지인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효종랑-김효종은 헌강왕과의 관계가 돈독해져 그의 딸을 처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들 경순왕이 즉위하면서 신흥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부인은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김효종(金孝宗)의 가계(家界) ◾아들 : 경순왕 ◾며느리 : 죽방부인 박씨. 죽방부인(竹方王后) 박씨(朴氏)는 예부시랑 박광우의 딸이라고도 전하는데, 정사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 는 이름이다. 박광우는 죽산 박씨..

答李方伯碧梧養久(時發) - 徐思遠

■ 答李方伯碧梧養久(時發) 昨日宋上舍學懋之見過弊廬。因渠便拜附起居之問。伏想時未及登達矣。方此懸情。忽奉盛帖。欣悉霜寒。侍奉莅况。與時均福。區區蘇倒。不可言喩也。每想治成制定。卧閣多閒。若非弄故紙一段事業。則他無吾令公足用心者。是以日望德學之盛。殆無異在己飢渴之甚也。玆承令敎曰意思乾沒。長進無期。使人不覺其發嘆也。則此雖出於君子有歿身之憂。而不自滿暇之意也。然例見朋友間石火初頭。雖旣墾良地。又落得嘉種。而緩於灌漑。怠於鋤治。因循汩溺。不知不覺魯莽拋荒。反不如稊稗之有秋。爲外人譏笑者。踵相尋也。有如吾令公美質英才。方進而未已。一時暫輟工程。萬不足奉慮矣。顧吾晩學鈍根。旣以此相終相長之地。而遽聞此消息。則豈不爲大可懼大可憂之甚哉。嘗觀抱卵之鷄。時時或未免出巢飮啄。而未及煖氣之衰歇而趁卽還抱。卒見化雛。吾人今日不遠復之美節。豈莫及於此老禽之能事乎。伏望公餘淸暇。亟親古人遺芳。或夜就短檠。..

인정전상량문(仁政殿上樑文)

■ 昌德宮仁政殿上樑文 이만수 찬(李晩秀 撰) - 甲子年(1804, 순조 4) 伏以六龍捧日。丹扆敞北辰之居。八柱承天。紫殿正南面之位。轉灾爲瑞。雖舊維新。原夫左墄右平之䂓。粤自漢長樂受賀。九室八牕之義。若稽周明堂出治。靈臺之庶民自來。化及鳥獸魚鱉。斯干之百堵皆作。頌叶室家君王。卑宮采椽。雖聖人克勤而克儉。高臺廣廈。顧王者不重則不威。巍乎昌德丕基。儼然仁政法殿。昔英陵文物之大備。實始經營。逮宣廟兵燹之旣平。重新輪煥。瞻璿殿而拱淸廟。配陟降於昭之靈。面引慶而負神嵩。湊山河欝葱之氣。禮重路寢。遠倣太極皇極之儀。史稱正衙。近取勤政明政之制。五禮九功之所惇叙。百官萬民之所瞻仰。辨色入朝。劒佩秩王會之序。按月布令。象魏肅天闕之懸。鏤玉摸金。殿上皆呼千歲。蒐獜羅鳳。日下常奏五雲。昭皇朝九錫之恩。陛級示等威之截。協聖祖重光之譜。庭簴播政敎之和。惟其二字之名。亶在萬化之本。春噓物茁。天地之大德曰..

조천일기(朝天日記) - 李忔 著

■조천일기(朝天日記). 2책. 오계 이흘 저(梧溪 李忔 著) [내용개요] 17세기 초의 文臣 이흘(李忔, 1568(선조 1)-1630(인조 8)이 1629년(인조 7)에 謝恩兼進賀使가 되어 명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 1629년 6월에 明 經略 袁崇煥이 조선의 平安道 鐵山半島에 있던 모문룡(毛文龍, 1579~1629)을 주살한 사건이 있었다. 모문룡(毛文龍)군이 後金에 대항한다는 이유 때문에 군수, 군량을 지원하였던 朝鮮은 모문룡군과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변무사(辨誣使)를 명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謝恩兼進賀正使였던 李忔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본서는 이때의 기록이다. 李忔의 字는 尙中, 號는 雪汀·梧溪,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李天一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에 문과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