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오윤겸 선생 묘.

야촌(1) 2007. 1. 28. 22:18

■ 추탄 오윤겸선생 묘(楸灘 吳允謙先生 墓)

 

오윤겸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산5번지 양촌 해주오씨(海州吳氏) 선영 서남향에 위치해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역을 새로 단장하였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청호공 희(暿)의 현손인 26世 첨사공(僉使公) 응화(應華)의 장녀(長女)]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에 호석 (護石)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고, 상석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다. 동자석 전방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좌우에 비치되 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서 풍우에 의하여 비문의 마모가 심하다. 비좌는 축면에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 모서리에는 복련 (覆蓮)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총높이 292cm, 비높이 226cm, 너비70cm, 두께는 25cm 이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찬하고, 송준길(宋俊吉)이 쓰고, 비문 끝에[崇禎丁亥]라는 년기(年記)가 있어 건립 연대는 인조 25년(1647) 임을 알 수 있다. 묘역은 1988년에 경기도 기녀물 104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5번지 일명 연화봉 아래 추탄공 묘소 입구에 세워진 경기도 기념물 안내

    판이다

 

↑좌측이 오윤겸선생 묘이고 우측은 정경부인 경주이싸 묘이다. 

 

↑오윤겸[1559(명종 14)∼1636(인조 14)]선생은 당대의 거목으로 조선의 5대정성의 한분이다.

 

 

 

↑오윤겸선생 묘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세자사 증시충정오공 윤겸지 묘 부좌. 정경부인경주이씨 지 묘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諡忠貞吳公 允謙之墓 祔左 貞敬夫人慶州李氏 之墓)라고 기록되 있다.

 

 

 

 

↑오윤겸 선생의 묘소 후경

 

 ↑묘역 입구에 잘 조성되어 있는 연못의 물이 거울처럼 맑다 

 

 

 ↑유덕재(維德齋)/추탄 오윤겸선생의 재실.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묘현면 오산리(吳山里) 본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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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

 

1559(명종 14)∼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옥정(玉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경민(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희문(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정수(廷秀)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했다가 부수찬(副修撰)·이조좌랑·지제교(知製敎)·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柎廟 : 상을 마친뒤 神主를 太廟에 모심.)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 :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정치를 잘한 수령(守令)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經濟)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해 ≪동사일록 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 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오윤겸의 조카 달제(達濟)는 병자척화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윤겸의 손자 도일(道一)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현손 명항(命恒)은 병조판서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당쟁이 격화되면서 주로 소론계열에 속하였던 용인 오산리의 해주오씨들은 더 이상 세력을 확대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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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대표적 후손

 

오세훈 서울시장(13대손)을 비롯하여 세정(서울대 자연과학장), 영환(추탄공파종친회장), 동근(해주오씨대동종친회 회장), 세영(미GM 연구실장), 승환(정신과 의사), 경자(연세대학교 여학생 처장), 세종(장기신용은행 행장), 문자(유아심리학 박사, 계명대 교수), 진모(前 초대 강원도 개발원장), 도근(前 보건사회부 약정 국장), 국근(동국대 교수), 세동(용인 수지구청장), 세형(분당 정자중학교 교장), 국환(前 경기 개발공사 사장), 세승(前 성남시 부시장)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