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21世 之帶 漢城 判尹公 遺墟碑銘.

야촌(1) 2007. 1. 28. 03:21

■ 한성 판윤공 유허비 명(漢城 判尹公 遺墟碑 銘) / 二十一世  

                                                                                                

    본종 종형 지음(本宗 鍾瀅 撰) /벽오공(碧梧公 九代 嗣孫)

 

경주읍(慶州邑)에서 남쪽으로 약 육십리(六十里)에 아늑한 마을이 있으니 중리(中里)라고 한다.

 

옛날 죽은 이공(竹隱 李公)이 살았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위, 아래 오백년(五百年) 사이에 풍우(風雨)와 성상(星霜)이 여러번 변천되고 산천(山川)과 능곡(陵谷) 옮기었으니 지난일이 아득하여 찾아볼 흔적이 없었다.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모공(某公)이 일찍이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부노(父老)들이 모두 공경 할줄을 알고, 지나는 자 까지도 돌아보고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추었으니, 대개 공을 사모하여 잊지 않았고 땅도 공을 얻어 소중하게 된것이다.

 

공(公)의 후손 규호(圭昊)가 공의 유사(遺事)를 수습하여 나를 찾아와 보이면서 말하기를「 선조(先祖)의 옛 터를 민멸 할수가 없음으로 우리 족형(族兄) 규승(圭升)과 함께 비석을 세워 표시할까 하니 원하옵건데 일언(一言)으로 명(銘)을 지어주오」한다.

 

내가 이에 공경으로 응락하며 이르되「낙안부군(樂安府君) 계번(繼蕃)과 동고조 팔촌(同高祖 八寸)이 되니, 이 일에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으리요」했다. 공(公)의 휘(諱)는 지대(之帶)요, 호(號)는 죽은(竹隱)이니 경주(慶州)사람이다. 고려(高麗) 시중(侍中) 익재선생(益齋先生)의 사세손(四世孫)이요. 휘(諱) 서종(瑞種)은 종부령(宗副令)이요, 휘 원익(元益)은 대사성(大司成)이요. 휘 선(瑄)은 병조판서(兵曹判書)니 이 어른들은 공(公)의 증조(曾祖)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시다.

 

공의 가세(家世)가 귀하고 혁혁(赫赫)하였으나 소시 부터 사치의 습관이 없으며, 안색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나감에 청백(淸白)과 강직으로 칭찬을 받았고, 벼슬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단종(端宗)때에 와서 사육신(死六臣)의 일이 일어남에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내려 은거했으니 중리(中里)가 바로 그곳이다. 

 

평상시에는 때마다 일을 말하지 않고 산인(山人)의 수건과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한가히 스스로 만족하였으며, 점필재(佔畢齋:김종직 선생의 호)와 더불어 날마다 만났으니 이것이 공의 나가고 물러옴의 대략이다. 그 밖에 사행(事行)은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전하지 못하였다.

 

아! 공이 기미를 밝게 보고 용감하게 물러와 세상일에 벗어났으므로 화살을 피하고 나의 생명(生命)을 보전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남았으니 위대 하도다. 또 공은 생(生), 사육신(死六臣)으로 더불어 처의가 같지 않았다. 혹은 생명을 버리어 피하지 않고 혹은 세상을 피하여 가버렸으나 공은 의리를 절충하여 마땅히 행할바를 다 하였으니, 그 도리는 한가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도리는 혹은 나가기도 하고 혹은 물러서기도 한다」하며 또 이르기를「같이 돌아갔으나 길은 다르다」하였으니 이것을 이름인저 공의 세대가 이미 멀고 공의 유적(遺蹟)을 다시 볼수가 없으나 다행히 한 마을에 고택(古宅)의 터가 남아 있으니 비록 집과 담장은 모두 없어졌으나, 그 거쳐하며 편안히 지내던 것을 생각하면 완연히 현존하며 있는 것 같다.

 

산과 내는 감돌고, 숲과 샘은 빛나서 옛날에 지나간 정신, 풍채 애연하여 남은 빛이 있으니, 배회하며 사방(四方)을 돌아보면 울적한 감회가 갱장(羹墻)에 사모(思慕)를 붙일 뿐만 아니라 일의 흥함고 패함과 물건의 나타나고 묻히는 것이 또한 무상한 것이다. 옛날에 세운 것이 지금에 빈터가 되었으니 얼마 후에 그 남은 터까지 처량한 노을과 황무한 풀 속에 민몰되어 기록할 수도 없게 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또 오늘날에 송구 서러운 바이다.

 

공의 후손(後孫)이 된 자는 어찌 급급히 표현하여 영구토록 우러러보고 의지할 곳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이 역사를 가히 늦출수가 없다. 공이 일찍이 손수 은행나무를 집가에 심어서 크기가 여나 뭇, 아름이 된다. 가지와 잎이 번성하여 좋은 일을 점칠 수가 있다하니 기이한 일이다. 유허비(遺墟碑)를 그 나무 곁에 세운다 한다.

 

명(銘) 이르기를「나가서는 절개를 다하고 물러와서는 스스로 조용함을 지키었네. 때를 따라 움직였으니, 이것이 운명을 안다 이르리라. 나에게 그 책임도 없고 나에게 그 지위도 없으니, 초연하여 그물을 멀리함이 이에 공의 뜻이네. 문수산(文殊山) 날등과 고헌산(高巘山) 양달, 그 가운데 한 마을이 있으니, 서식하고 숨을만하네.

 

벼슬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숨어삶도 즐거워함은 아니네. 인간 세상을 위, 아래로 더듬어보며 홀로 적막히 살았다네. 지나간 흔적 아득하니, 전벽해(田碧海) 또 변경했네. 오직 이 터만은 따라서 없어지지않으니,은행 나무 옆에 있고 가지가 뻗어 서로 지키었네. 이 명장(銘章)을 지어 오는 세상에 고징을 삼으리라」

 

옮긴이 : 野村 李在薰

 

● 주(註)

갱장(羹墻)의 사모 : 갱(羹)은 국물이고, 장(墻)은 담장인데 요(堯)임금 죽은후에 순(舜)임금이 국물을 대해도 요(堯)의 생각, 담장을 보아도 요(堯)의 생각을 했다는 말이었음으로 선현(先賢)을 사모함에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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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낙안부군(樂安府君)

    익재공(益齋公)의 차자(次子)인 운와공(雲窩公) 달존(達尊)의 증손자로 21世인 휘(諱) 계번(繼蕃)을 말함.

 

●지은이 : 이종형(李鍾瀅)

    1859년. 12월.1일(철종 10)-1929년. 5월 .29일(왜정 20)

 

조선말의 문신. 자(字)는 범일(範一), 형조판서(刑曹判書) 벽오공 시발(碧梧公 時發)의 9대사손, 생곡(生谷) 인환(寅煥)의 7대사손, 진사(進士) 규철(圭哲)의 아들, 진천 출신이다. 계사(癸巳) 1893년 알성시(謁聖試) 병과1(丙科1)에 급제, 비서원 비서승(秘書院 秘書承)을 역임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었다.

 

경주이씨 판윤공파보 병인보(1986년) 서문(경주양월간행)찬.

동암 문정공 묘비문(東菴 文定公 墓碑文(十六世)찬 *신유(辛酉 : 1921년) 九월에 세운다.

 

글쓴이 :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