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64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1935년 중국을 돌며 선전비행을 하던 당시 조종복을 입은 권기옥. | 국가보훈처 자료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의 비행학교 졸업장이 복원됐습니다. 권 선생의 공훈을 입증하는 기록물입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지난 2일 “권기옥 애국지사가 항공학교에서 받은 필업증서(졸업장)와 국민정부 군정부본부에서 받은 상위 관찰사 위임장 등 기록물 5건을 복원했다”고 밝혔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권 지사는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어린 나이에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어 독립운동가 문일민, 장덕진 등과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

우리나라 첫 여류서화가

우리나라의 첫 여류서화가 “고려 말 익재 이제현의 손녀 경주이씨” 기록공개 一머리말 오문의 족보에는 기록이 없지만 3.1독립운동 33인의 한사람으로 서예가요, 언론인이었던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이 192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서화가의 권위 있는 인명사전《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총1,117명의 인명이 3권으로 분류 수록되어있는데, 그중 여성은 단 10명뿐이다. 그리고 10명의 여성서화가중 기생 이름 2명과 첩의 이름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성씨로만 표기되어 있는데. 이 책에 첫 여류화가로 표기된 고려시대 ‘이씨’의 기록에는 “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로 간단하게 ..

정명공주(貞明公主)

↑정명공주유필(貞明公主遺筆)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선조 36)∼1685(숙종 11). 조선 중기의 공주. 선조의 적녀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비(仁穆王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을 역모 죄로 사사하고 계비 인목대비를 폐출시켜 서궁(西宮)에 감금할 때 공주도 폐서인(廢庶人)되어 서궁에 감금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공주로 복권되고, 1623년(인조 1)에 동지중추부사 홍영(洪霙)의 아들인 18살 주원(柱元)에게 21살의 나이에 시집을 갔다. 인조의 특명으로 사저(私邸)가 중수되었으며, 뒤에 연령군(延齡君-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여섯 째 아들)이 사용하였다.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죽은 뒤 궁중에서 백서(帛書 : 비단 위에 쓴 글)가 나왔..

朝鮮의女流詩人名妓李梅窓墓)

▲매창의 옛 무덤 모습/부안읍에서 1Km 떨어진 동두께 공동묘역내(매창뜸이라고도 함) ▲매창공원으로 개발전의 옛무덤 - 공동묘역내 ▲名技 李梅窓의 墓 ▲묘의 후경 ▲이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쓴 詩 ▲유희경이 이매창을 그리워하며 쓴 詩 ▲허균이 38세에 요절한 이매창의 부음을 듣고 쓴 시 우정을 깊이 나눈 당대 문학의 고수들이 읊은 시어들입니다. 매창은 38세가 되는해 죽었는데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봉분도 좀 커지고 봉분앞에 상석과 향로석까지 갖추어져 있지만, 근년에 부안군에서 매창공원으로 개발하기전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 공동묘지 구역내 볼품없이 작은 봉분에 표석만 세워져있다. 약 1m 높이의 표석 전면에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 쓰여있다. 원래의 표석은..

명재 윤증의 누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누이는 서계(西溪) 박서당(朴世堂, 1629~1703)의 형수이고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양 어머니였다. 명재연보에 따르면 1636년 12월에 호란(胡亂)이 발생하여 부친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선생을 따라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1637년 1월에 강도가 함락되었는데, 22일에 오랑캐 병력이 강을 건너자 성안이 와해되었다. 이때 노선생(老先生)은 사우(士友)들과 모여서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이씨 부인이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여종을 보내어 노선생을 모셔 오게 하였다. 노선생이 집에 이르자, “적의 손에 죽느니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낫겠기에 한번 뵙고 영결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하므로,..

현덕왕후 안동권씨(顯德王后 安東權氏)

현덕왕후 안동권씨(顯德王后 安東權氏) 1418(태종 18)~ 1441(세종 23).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妃), 단종의 생모. 본관은 안동(安東).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 궁녀로 입궐하여 승휘(承徽)·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순빈봉씨(純嬪奉氏)가 부덕하여 폐빈 된 후 세자빈이 되었다. 1441년 원손(元孫:뒤의 단종)을 낳았으나 3일 뒤에 죽었다. 그해 현덕의 시호를 받고, 경기도 안산군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묻혔다. 1450년(문종 즉위) 왕후에 추봉(追封)되었으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문종과 함께 양주(楊州)에 합장되어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고, 1454년 인효순혜(仁孝順惠)의 존호가 ..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 생몰년 미상.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본관은 행주(幸州). 아버지는 자오(子敖)이고, 고려 말의 권신 철(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소종(昭宗)의 어머니이다. 1333년(충숙왕 복위 2)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후인 다나시리(答納失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1335년에 다나시리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바엔(伯顔)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이듬해 2월에 바엔세력이 물러나게 되자 4월에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

덕혜옹주(德惠翁主)

↑덕혜옹주 生母인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덕혜옹주의 生母,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1882~1929)는 高宗의 후궁이다. 덕수궁의 宮女로 있다가 高宗의 承恩을 입어 1912년 5월 25일 덕혜옹주를 낳아 복녕(福寧)이라는 당호(堂호)를 받았다. 그녀는 덕혜옹주 외에 2男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1929년 4월 22일 유방암으로 48세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사삼릉 권역 내 후궁묘역에 있다. ↑오늘날 서울 충무로의 극동빌딩 자리에 있던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재학시절의 덕혜옹주 모습 ↑덕혜옹주 첫돌사진 우연이도 아버지 고종의 나이 환갑이고, 어머니 양씨의 나이 32세 때인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1917년 6세가 되던 해, 일제의 강요로 일본인 학교 일출소학..

장계향 - 정부인 안동장씨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이 때 이름은 명명이라기보다는 명성에 가깝다. 명명이든 명성이든 간에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 명명은 있되 명성이 없다면 그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남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명성이 있어도 명명이 불분명한 사례도 많다. 우리 역사 속의 여인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아버지의 딸로, 남편의 아내로, 아들의 어머니로 일컬어졌다. 부계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울타리 속에서 그 존재가 명명되어 왔다. 그래서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에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변별적 존재로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소서노(召西奴) - 백제 건국왕 온조의 어머니

■ 백제의 소서노(召西奴) ◇시대 : 백제 ◇생몰년 : 미상 ◇활동분야 : 비류, 온조의 어머니 생몰년 미상. 백제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비류(沸流)· 온조(溫祚)의 어머니.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온조왕을 시조로 한 것과 비류왕을 시조로 한 것 등이 있는데, 그는 비류왕을 시조로 전하는 건국설화에만 등장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녀는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로서 처음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 한동안 졸본에서 과부로 살다가, 부여에서 이곳으로 도망해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과 재혼하였고, 고구려의 창업을 위하여 많은 내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예씨(禮氏)의 소생 유류(儒留, 일명 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