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야촌(1) 2010. 9. 16. 00:25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2호 | 20090920 입력]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

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

① 쿠데타의 업보


조선 중기의 역관 조신(曺伸)이 쓴 『소문쇄록(소聞<7463>錄)』에는 세조와 한명회·신숙주가 함께한 술자리 이야기가 나온다.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으면서 자신의 팔도 잡으라고 말했는데 신숙주가 힘껏 잡는 바람에 세조는 “아프다. 아프다(疼疼)”라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를 본 세자의 낯빛이 변하자 세조는 세자의 이름(晃:황)을 부르며 “나는 괜찮지만 너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밤이 늦어 귀가한 한명회는 청지기를 신숙주의 집으로 보내면서 “범옹(泛翁:신숙주)이 평일에 많이 취했어도 술이 조금 깨면 반드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책을 본 후 다시 취침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즉시 잠을 자라고 전하게 시켰다. 청지기가 보니 과연 신숙주는 책을 보고 있기에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사육신의 사당인 의절사 숙종 7년(1681)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으며, 정조 6년(1782)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사육신은 정조 때 국가 제사 대상인 배식단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공식 적으로 복권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소문쇄록은 “임금이 술이 깨자 내시를 보내 신숙주의 집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잠을 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술이 취했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의심해 내시를 보낸 것이다. 이 일화는 세조 정권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쿠데타로 즉위한 세조는 권력을 공신 집단과 나눌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자 세조는 공신 집단과 더욱 강하게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세조는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면서 공신들을 법 위에 있는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왕조 국가의 기본질서인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이로써 무너졌다. 세조는 사망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했다.

 

백옹(白<9852>)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을 실세 공신들이 장악하게 한 것이니 왕권이 둘로 나뉜 셈이었다.


세조 후반으로 갈수록 공신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 이었다”면서 분경까지 허용했다. 분경은 인사청탁인데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라고 호도하며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은 이렇게 국가의 기본적인 공적 체제마저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한명회가 세웠다는 한강가의 압구정.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은 현실의 권력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내내 시비에

    휘말렸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년(숙종 2)~1759년(영조 35)」의 압구정도(狎鷗亭圖) ㅣ 간송미술관

    소장

 

재위 14년 7월 19일. 세조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 등 공신들을 불렀다.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변 직후 책봉한 정난(靖難)공신,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직후 책봉한 좌익(佐翼)공신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병석의 세조가 “내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모든 공신이 “전하께서는 곧 병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습니다”라고 반대했다. 국왕이 전위하고자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관례지만 반대의 또 다른 요인은 세자와 권력 분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었다.

세조와 공신들이 함께 다스리는 집단 지도체제를 세조 사후에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했다. 공신들은 세자 즉위 후 자신들의 권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왕권 강화 지시로 해석한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신들이 전위에 반대하자 세조는 대신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리청정과는 달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행랑)에서 고령군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제한적 대리청정이었다.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형성된 구공신(舊功臣:정난·좌익공신)의 대표이고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新功臣:적개공신)의 대표였다.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이 구공신의 핵심이고, 이준·남이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세자는 부왕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예종의 「지장(誌狀)」에는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이 나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왕의 병을 낫게 하려면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령(大赦令)이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다음 날 대사령을 내려 7월 20일 이전의 죄는 대역(大逆)·모반(謀叛), 조부모·부모 살해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했다.

 

그러나 세조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세조는 8월 1일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에게 수릉(壽陵)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무덤이 수릉인데 『세조실록』은 이때 “세조가 눈물을 뿌렸고, 이 사실을 들은 여러 재추(宰樞:재상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권력무상의 회한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생의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대사령을 내린 지 한 달여 만인 8월 27일 다시 대사령을 내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자는 납부하지 못한 세금을 탕감하거나 깎아주고 내전(內殿)에 불상을 모셔놓고 기도도 올렸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여서 9월 들자 병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충(蝗蟲)이 추수를 앞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까지 나타났다. 드디어 세자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조가 만든 업보(業報)를 푸는 것이었다.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문제였다.

16년 전인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고, 13년 전인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는 성삼문·유응부 등의 가족들을 나누어 가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의 여종이 되고 성 노리개가 된 이들의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대사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그해 9월 3일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인지·정창손·신숙주·한명회·홍윤성·김질 등의 공신들은 계유정변 관련자 친족들의 방면(放免)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 관련자 친족들에 대해서는 “병자년(丙子年:세조 2년)의 난신(亂臣)의 일은 세월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급히 논(論)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세자는 “만약 난신에 연좌된 자를 모두 방면한다고 하면 어찌 세월의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육신 사건 관련자의 친족들도 모두 방면하자는 뜻이었다. 세자는 “공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에게 나누어준 자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세조실록』 14년 9월 3일)”라고 덧붙였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는 괜찮지만 공신들의 재산으로 전락한 사육신의 친족들을 석방하려고 하면 공신들이 싫어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사위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시켰던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세자는 계유정변과 사육신 사건 피해자의 친족 일부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좌익 3등 공신 좌의정 박원형(朴元亨)은 동부승지 한계순에게 계유정변 때 사형당한 양옥(梁玉)의 누이 의비(義非) 대신 다른 여종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세자는 “일이 이미 의논하여 정해졌는데 되돌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했다.

 

9월 7일 세조는 다시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전처럼 공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조는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데 너희들이 내 뜻을 어기려고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꾸짖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세조는 이날 면복(冕服)을 직접 세자에게 내려주며 “오늘 당장 수강궁(壽康宮:창경궁)에서 즉위하라”고 명했다. 세조 14년(1468) 9월 7일 세자가 수강궁에서 즉위하니 피로 점철되었던 세조 시대가 가고 예종 시대가 막이 열렸다.

 

다음 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 세자의 후궁이었던 한백륜(韓伯倫)의 딸 소훈(昭訓) 한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명했으니 그가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예종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으나 세종과는 전혀 다른 정국이었다.

 

태종은 숱한 비난을 들어가며 대부분의 공신을 대거 제거해 깨끗한 조정을 물려준 반면 세조는 거대한 공신 집단이란 짐을 고스란히 예종에게 넘겨주었다. 이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예종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