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야촌(1) 2010. 9. 16. 00:17

■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1호 | 20090913 입력]

 

정치가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권력 강화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조선은 국왕의 권력이 강하면 사대부의 세력이 억제되면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으나 숙종은 그렇지 못했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지만권력을 백성들과 나눌 줄 몰랐던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숙빈 최씨의 사당「육상궁」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데, 숙빈 최씨는 왕비 민씨와 결탁해 희빈 장씨를 압박

    했다. 훗날 그의 아들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한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

⑨후계 경쟁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들이 남인들에 대한 정치보복에 몰두하는 동안 조선은 다시 대기근에 접어들고 있었다. 숙종 20년 9월 28일 비변사에서 “올해는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의 손상이 특히 심한데, 연변(沿邊)은 가뭄이 들기도 하고 벌레가 생기기도 하여 피해가 한 가지만이 아니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듬해부터 3년간 흉년이 거듭되는 상란(喪亂)의 전주곡이었다.

『숙종실록』 21년 4월 1일조는 “이해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거듭 내려 양맥(兩麥: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도 놓쳐 드디어 큰 흉년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가뭄으로 파종을 못하게 되자 숙종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숙종 21년 4월 21일 첫 기우제를 지낸 후 25일, 30일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자 5월에는 무려 7차례나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0일 남교(南郊)의 기우제 때 숙종은 제문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임금 자신을 책망하고 죄가 있다는 뜻을 상세하게 기술하도록 시켰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사후 보복이 특기인 숙종의 잘못을 신하가 적시할 수는 없었다.

 

 

↑소론 영수 윤지완 간찰과 이이명 초상.

 

윤지완은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의 독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간찰은 자신이 병들었음과 조카들이 죽었음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이명은 노론 영수로서 숙종과 세자 문제를 논의한 ‘정유독대’를 했으나 소론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경종 때 사형으로 생을 마친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기근으로 어린아이들을 버리는 백성들이 속출하자 숙종 21년 12월에는 유기아(遺棄兒) 수양법(修養法)까지 만들었다.

유기아를 거둔 사람에게 양식을 지급하거나 자녀나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다.

 

숙종은 재위 21년 10월 7일 “밥을 대하면 목이 메인다”면서 자신의 잘못을 직언하라고 구언(求言)했고, 부호군 조형기(趙亨期)가 응지(應旨) 상소해 왕실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숫자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공물 1관(款)을 또 감삭(減削)하는 것은 결코 불가하다”면서 거부했다. 사관은 조형기가 한 여러 건의 중 “마침내 시행한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때도 진휼소를 설치해 기민(饑民)들을 먹이고, 신역(身役)을 감해주는 등 외형적으로는 기근 극복에 나섰지만 백성들은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처럼 국가총력체제는 아니라고 느꼈다.


흉년 3년째인 숙종 23년(1697) 4월 숙종은 비망기에서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다. 관창(官倉)의 곡식도 다 떨어지고 개인의 비축도 거덜났으니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이 솔선수범할 생각은 없었다. 감선(減膳: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나 철악(撤樂:음악을 철폐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구황방 흉년에 먹을 수 있는 대체 식품들과 요리법을 기록한 책이다. 

    소나무와 느릅나무 껍질을 죽으로 쑤어 먹는 방법이 한글로도 쓰여 있는 것이 이채롭다.

 

“오명준(吳命峻)이 팔도에 구언(求言)하는 하유를 내리게 청했으나 상은 불허했고, 또 2품 이상과 삼사 관원을 불러 재이(災異) 극복책을 묻기를 청했으나 이것도 불허했다.(『숙종실록』 23년 9월 28일 )”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勸分)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숙종 23년(1697) 4월 광주(廣州)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淸)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숙종 23년(1697)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 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숙종 24년(1698)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西路: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숙종 27년(1701) 전국적인 재해가 또 발생한 가운데 병세가 위중해진 인현왕후 민씨는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희빈 장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민씨의 죽음은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남인 행부사직 이봉징(李鳳徵)은 장희빈은 한때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고 상소했다.

 

다른 후궁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봉징을 전라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시켰다. 남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왕비 민씨의 죽음은 오히려 장씨를 사지로 몰았다. 왕비의 죽음을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몰았던 것이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9월 25일에는 ‘비망기’를 내려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자살)을 명했다.

숙종은 ‘비망기’에서 “옛날 한(漢) 무제(武帝)가 구익(鉤<5F0B>) 부인을 죽인 것은 결단이었다”면서 장씨를 죽이는 것이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제의 후궁 구익 부인은 소제(昭帝)의 생모인데, 『사기(史記)』 ‘외척세가(外戚世家)’는 무제가 “임금이 어린데 모친이 장성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숙종은 재위 16년(1690) 10월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문(敎命文)’에서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라고 반포했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李濡)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庭請: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이이명)과 ‘정유독대(丁酉獨對)’를 실시했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뒷자리는 자신이 제거하려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차지했다. 잇따른 배신과 살육으로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숙종 혼자만의 왕권강화였다.


<다음 주 부터는 ‘독살설의 임금들-예종’ 편을 시작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