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야촌(1) 2010. 9. 16. 01:53

■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37호 | 20091024 입력]

 

헌정 질서를 부인하는 세력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경종을 부인했다.

 

노론에 경종은 자신들이 죽인 모친 장희빈과 한 몸이었다.

화해의 정치 대신 증오의 정치, 한때 국모였던 여인을 죽인 과거사가 현실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불행한 상황이었다.

 

 

↑연행도 중 조양문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 조양문을 향하고 있다. 이이명은 사신으로 가면서 6만

    을 가져가 청나라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②허수아비 임급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반쯤 전인 재위 46년(1720) 4월 24일. 『숙종실록』은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성상의 환후는 복부의 팽창이 더욱 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경화나 간암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날 숙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한탄한다. 그토록 숱한 사람을 죽였던 제왕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웠던 것이다.

 

숙종이 회생할 가망이 없어지자 노론 영수 이이명(李<9824>命)의 관심사는 이미 숙종을 떠나 있었다.

이이명은 “소신(小臣)이 진달한 바는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調) 방도뿐만 아니라, 반드시 국세(國勢)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保安)하는 것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비단 일시적인 병의 치료 방도(不但一時調病之道)’보다 중요한 ‘국세를 지탱하고 만백성을 보안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이명은 또 “정신이 조금 나으실 때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헤아리신 것이 있으시면 하교하소서”라고 덧붙였다.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의 사관(史官)은 “동궁(東宮)의 대리청정에 억조창생이 희망을 걸어 백성과 나라가 보전되어 근심이 없었다”고 전제하면서 “이이명이 급급하게 이런 말로 위태롭게 동요시킨 것은 독대를 한 후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관은 “은연중에 말명(末命:유언)이 어떠한가 여부로 요행을 바랐다”면서 ‘불단(不但)이란 두 글자를 세밀히 따져보면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비난했다.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라는 유언을 바랐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승길이 어른거리는 숙종은 세자 교체에 관한 유언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세자 교체에 실패한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데 당력을 걸었다. 비록 즉위했지만 경종의 왕권은 미약했다. 경종 즉위년(1720) 7월 21일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어머니가 아들로써 귀하게 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라면서 경종의 모친 장씨의 명호(名號)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창집 글씨 영의정 김창집은 청나라 사신에게 경종의 동생 연잉군의 신상 자료를 건넸다가 숱한 비난을 받았다.

 

장희빈의 신원을 주장한 이 상소에 노론은 발칵 뒤집혔다. 사헌부 집의 조성복(趙聖復)은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이처럼 속이는 말을 제멋대로 입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엄하게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중우는 혹독한 국문을 받고 귀양 가다가 평구역(平丘驛)에 이르러 물고(物故:죄지은 사람이 죽음)되었다. 기세를 잡은 노론은 역공에 나섰다. 같은 해 9월 성균관 장의(掌議:학생회장) 윤지술(尹志<6CAD>)은 숙종이 신사년(1701)에 장희빈을 죽인 것과 관련, ‘그 처변(處變)이 도에 합당한 것’이자 ‘정도(正道)를 호위한 것’이라며 이를 숙종의 지문(誌文)에 넣어 영원히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상소)의 비답에 성의(聖意)를 보이신 것이 해와 달같이 밝으니 전하께서 감히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경종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것이 ‘해와 달같이 밝은’ 선왕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태학생 윤지술을 처벌할 수 없었다.

윤지술의 유배를 명하자 성균관의 노론계 학생들이 권당(捲堂 : 동맹휴학)했으며, 노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까지 “사기(士氣)를 꺾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생모를 신원하자는 주장은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고, 생모를 죽인 것이 선왕의 업적이라는 주장은 ‘선비의 사기’로 추앙받는 상황이었다. 경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모든 권력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자신들이 죽인 여인의 아들이 임금으로 있는 것 자체가 불안했던 것이다.

 

이런 불안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 경종 즉위년 9월 포도대장 이홍술(李弘述)이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장살(杖殺 : 곤장을 때려 죽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사신(史臣)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현은 추수(推數 : 운명학)에 능해 김창집이 처음에는 친하게 지냈으므로 음사(陰事)를 말해주었으나 돌아서서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 이홍술을 사주해 박살(撲殺:때려 죽임)함으로써 멸구(滅口:입을 막음)했다. 계획적으로 속이고 감추려는 정상에 사람들이 다 의혹을 품었다.”(『경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훗날 이 사건의 재조사를 통해 김창집의‘음사(陰事)’는 경종을 모해하려는 역모로 결론지어졌다.

경종을 압박하는 사건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청의 사신이 숙종의 치제(致祭)를 위해 왔는데 “세자(世子:경종)와 그 아우 등을 만나보겠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이 국왕의 동생을 만나겠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소론으로 갓 우의정이 된 조태구(趙泰<8008>)는 사신의 국왕 동생 면담은 사리에 어긋나는 실례(失禮)이므로 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큰 논란이 되는 와중에 영의정 김창집은 연잉군의 신상에 관한 자료를 사신에게 주었고 사신은 이를 문서로 만들었다.


“조선국 세자(경종)는 금년에 33세인데 자녀가 없고, 동생이 있는데 금년 27세로서 군수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모친은 최씨이고 현재 자녀가 없다.”(『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김창집이 조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 사신에게 왕제(王弟)의 신상을 적어 준 것은 큰 물의를 낳았다. 『숙종실록』 사신(史臣)은 김창집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저들이 비록 입으로는 황지(皇旨:황제의 지시)라고 일컬었으나 칙서(勅書)에는 이런 말이 없었으니, 우리가 만약 황지에 없는 말은 사신(使臣)이 물을 바가 아니라고 사리에 의거해 엄하게 거절했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치에 굽혀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김창집은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말만 따라 임금에게 품지(稟旨)도 하지 않고 독단으로 써 주었다.

 

김창집은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가에 욕을 끼치고 저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청나라 사신들은 왜 관례를 깨고 연잉군을 보겠다고 나섰을까.

 

『숙종실록』의 사신(史臣)은 “혹자는 ‘이이명이 사신으로 갈 때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가서 저 나라에 뇌물을 주었다’고 말한다”고 그 배경을 시사했다. 이이명이 청나라에 가서 막대한 뇌물을 써서 청나라가 연잉군을 지지하는 것처럼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사신(史臣)은 “이는 비록 의심하고 저해(沮害)하는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무렵 호차(胡差:청나라 사신)가 거짓으로 황지(皇旨)를 빙자해 전례가 없던 일을 발설했으니, 인심의 놀람과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경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라며 이이명에게 원인 유발의 책임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종에 대한 노론의 압박이 계속되자 경종 즉위년 12월 11일 충청도의 유학 이몽인(李夢寅) 등이 상소문을 들고 상경해 대궐문에 엎드렸다. 병조의 당상과 낭청이 꾸짖으며 입궐을 막자 이몽인 등은 도끼와 상소문을 들고 궐문으로 난입했다.

 

병조에서는 군졸을 시켜 소함(疏函) : 상소문을 넣은 상자)을 깨뜨리고 소본을 찢어버린 뒤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몽인 등 세 사람을 옥에 가두었는데, 『경종실록』은 “김창집이 먼저 계책을 쓴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몽인 등의 상소는 장희빈을 죽인 것이 숙종의 큰 업적이라고 주장한 윤지술에 대해 인륜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하고, 청나라 사신에게 연잉군의 신상을 써준 김창집의 행위도 크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의통략』은 이몽인이 “독대(獨對)한 대신이 6만 냥을 훔쳐갔다”고 비난했다고 전하는데 이이명이 이 6만 냥으로 청나라 사신을 매수했다는 비난이었다. 노론이 경종을 내쫓고 연잉군을 세우려 한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은 소두(疏頭 : 상소문 우두머리) 이몽인과 소하(疏下) 심득우(沈得佑)·조형(趙瀅) 등에게 곤장을 친 후 변방으로 충군(充軍)하거나 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경종은 모든 일에 노론의 뜻을 따랐지만, 노론은 경종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았다.

 

노론은 경종을 끌어내는 것만이 자당의 이익을 영구히 보존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할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71BD>)의 상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