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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야촌(1) 2010. 9. 16. 01:45

[이덕일 ㅣ제136호 | 20091018 입력]

 

■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

①숙종-이이명 독대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이명(李頤命)이 집필한 소재집(疎齋集).

 

숙종 43년(1717) 7월 19일. 전염병이 크게 번져 조정은 중신(重臣)을 보내 전염병 귀신에게 여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7월 초 9일에는 폭우가 내려 물가의 가옥이 태반 무너져 내리는 수해가 발생했다.

이날 숙종은 안질 때문에 문서를 읽기가 어렵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는 장님이 되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좌의정 이이명이 ‘발음이 분명한 사람에게 문서를 읽게 하자’고 제안하면서, “왕세자를 곁에 두고 참견하게 함으로써 정무(政務)를 분명히 익히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권고했다.

노론 영수 이이명이 세자의 정사 참여를 제안한 것은 의외였다. 노론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 이윤(경종)을 자신들이 지지하는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훗날의 영조)으로 교체하려고 한다는 건 다 알려진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즉각 “당나라 태종도 말년에 병이 위중하자 변통시킨 일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이이명은 “먼 곳의 고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국조(國朝: 조선)에서도 세종대왕이 미령(未寧)하실 때 문종대왕께서 별전에 출어하셔서 대신들과 국정을 결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세자의 국정 참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추후 대신들과 다시 의논해 결정하기로 하고 오전 회의를 끝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경에 숙종은 다시 희정당(熙政黨)으로 나가서 좌의정 이이명의 입시를 명했다.

승정원의 승지 남도규와 실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 권적 등이 관례에 따라 함께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내시가 좌의정 혼자만 입시하라는 분부라는 숙종의 말을 전했다. 이이명과 독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승지·사관은 물론 이이명도 당황했다. 승지와 사관의 배석 없이 독대했다가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승지 남도규를 돌아보며“일이 상규(常規: 관례)와 다르니 승지와 사관은 입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함께 들어가자고 청했다. 하지만 승지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에 있는 장희빈의 대빈묘. 노론은 장희빈이 사사 당시 세자(경종)의 하초를 잡아당

    겨 불구로 만들었다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트릴 정도로 장희빈을 저주했다.  ⓒ나홀로테마여행.

 

이이명만 불렀는데 왕명이 없는데 들어갔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관 권적은 “죄벌을 받더라도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며 이이명의 뒤를 따랐다.

승지 남도규는 몇 걸음 따라가다가 권적을 돌아보며 “대신(大臣) 혼자 입시하라고 명하셨는데, 우리들이 먼저 품부(稟復=윗사람의 뜻을 물음)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사체(事體=일의 체통)에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주저했다.

 
사관 권적이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남도규가 다시 잡으면서 “승전색(承傳色: 명을 전하는 내시)에게 청하여 품지(稟旨)를 거친 후에 들어가자”고 말렸다.
 
그 사이 독대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려 한다는 승전색의 전갈에 숙종은 답을 하지 않았다. 숙종은 독대가 끝난 후에야 승지와 사관의 입시를 허용했다. 독대 직후 숙종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야당인 소론은 발칵 뒤집혔다.

이 날짜 '숙종실록'사관은 “이때 이이명은 이미 물러나와 자기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임금과 나누었던 말은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숙종 43년 정유년의 ‘정유독대(丁酉獨對)’다. .

'당의통략'에서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은 것처럼 소론에서는 세자의 실수를 기다려 연잉군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로 여겼다. 사헌부 장령 조명겸(趙鳴謙)이 “대신의 독대는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이이명의 견책을 주장한 것처럼 ‘독대 비판론’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관을 들고 상경해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 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 28일) 소론은 숙종과 이이명이 세자 교체와 연잉군 추대를 밀약했다고 의심했다.

 

윤지완의 상소에 분노한 숙종은 “임금에게 고하는 말도 함부로 하였고, 좌의정에 대해서는 바로 ‘사신(私臣)’이란 한마디로 단정해 망측한 누명의 구렁으로 몰아넣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소론의 이런 반발은 세자를 교체하려는 숙종과 노론의 밀약이 실행되는 데 큰 장애가 된 것이 사실이다.

장희빈이 세자를 낳았던 1688년(숙종 14)만 해도 숙종은 장희빈과 세자를 반대하는 서인(노론의 전신) 정권을 갈아치우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줄 정도로 갓 낳은 왕자를 총애했다. 그러나 재위 20년(1694) 4월 정권을 다시 서인에게 주는 갑술환국을 단행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민씨가 다시 복위한 데다 그해 9월 숙빈 최씨가 연잉군을 낳으면서 세자에 대한 총애는 급격하게 식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죽이거나 쫓아내는 숙종의 성격으로 볼 때 세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세자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작은 꼬투리도 잡히지 않는 것뿐이었다.
'경종대왕 행장(行狀)'은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의 와병 때 세자의 행위를 적고 있다.

 

민씨가 오라비 민진후(閔鎭厚)에게 영결하는 말을 하자 민진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는데, 세자는 슬픈 용태를 드러내지 않다가 문 밖에 나와서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었다는 것이다. 그해 8월 인현왕후가 승하해 시신을 발인했을 때는 교외에서 궁중에 이르도록 통곡을 그치지 않아 도로의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해 10월 숙종은 희빈 장씨를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이는데 모친이 죽던 날의 세자의 정경에 대해 '당의통략'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세자의 나이 13살인데 글을 올려 “신(臣: 세자)의 어머니가 그릇된 일을 하는데 신이 알지 못할 리 없으니 함께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면서 궁문 밖에 거적을 깔고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나의 어머니를 살려 주기를 원하오”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좌상 이세백(李世白: 노론 영수)은 옷을 털어 피했으나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소론 영수)은 “신이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숙종이 마침내 희빈에게 죽음을 내리고 다시 장희재와 업동 및 여러 장씨들을 국문하여 모두 베어 죽이니 이것은 다 이세백이 찬성한 것이었다.('당의통략')

장희빈 사사에 가담한 노론에서 세자 대리청정을 먼저 주청하고 나온 의도는 명백했다.

'당의통략'은 “세자가 어머니의 변고를 당한 뒤부터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노론에서는 세자의 자질을 낮춰보고 대리청정을 시키면 숙종의 분노를 살 만한 큰 실수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실력을 감춘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경종대왕 행장'은 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여러 업무를 재결(裁決)하는 것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해서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 스스로 대리청정이 부왕과 노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든 자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리청정하던) 첫봄에 팔도에 유시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넉넉히 진대(賑貸)하도록 했으며, 유포(流逋: 유랑)하는 자에게는 자산(資産)을 주어 향토(鄕土: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역질(疫疾)을 앓는 자에게는 양식과 약품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고, 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곧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도록 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의방(醫方)을 알아서 사람을 병에서 구해 주었거나 사재를 들여 길에서 굶어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 준 사람이 있으면 위에 계문하여 시상하도록 허락하였다.”('경종대왕 행장')

노론의 희망과 달리 세자는 우매하지 않았다.

'행장'은 “신료를 예(禮)로써 대우하였고, 종친은 은혜로써 대접하였으며, 대신이 죽으면 반드시 위차(位次)를 마련하여 곡(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의통략'에서도 “노론 또한 그의 잘못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쫓아낼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숙종이 재위 46년(1720) 만에 세상을 떠나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드디어 즉위하게 되었다. 이렇게 경종 시대가 열렸으나 노론은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왕조 국가에서 특정 당파가 헌법 질서에 의해 즉위한 임금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택군(擇君)하려는 불행한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