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5호 | 20091010 입력]
국왕 독살 여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후 체제를 살펴봐야 한다. 거대 정파와 대립하던 국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거대 정파가 권력을 독차지할 경우 독살설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탄생한 공신집단들은 예종이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크게 반발했다. 예종과 공신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예종의 창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계비 안순 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와 합장묘다.
원부인이었던 장순 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생존했다면 예종도 더 오래 왕위에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④ 거대한 음모예종이 분경(奔競> 인사청탁)을 금지시키라고 보낸 사헌부의 서리(書吏)와 조례(<7681>隷)가 정인지의 가동과 몸싸움을 벌인 날짜가 재위 1년(1469) 11월 4일이었다.
다음 날 예종은 “금년 겨울이 아주 추우니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금부와 형조에 전지를 내려 11월 5일 새벽을 기준으로 중대 범죄 이외의 죄수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공신들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임금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개혁 대상으로 몰린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반발할 명분이 없었다. 백성들은 즉위 초부터 시작된 분경 금지, 대납 금지, 공신 특권 제한에 크게 환호하고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예종은 재위 1년 11월을 넘기지 못하고 급서했기 때문이다. 『예종실록』에 그의 병명이 처음 등장하는 날은 예종 1년 11월 18일이다.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문예(文藝)를 시험하되,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책문(策文)하려고 하는데,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종은 자신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틀 전(16일)에는 후원에서 입직한 군사들을 직접 열병했다.
사흘 전(15일)에는 전라·경상·충청도의 관찰사와 절도사 등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근자에 무뢰배들이 휘파람을 불며 산야에 모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부도한 일을 자행한다. 빨리 계책을 내어 체포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자. 네 번째 줄에 “왕이 훙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되
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예종의 급서와 자을산군의 즉위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족질로 정사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말한 다음 날(19일)에는 교태전으로 환어했고, 20일에는 기인(其人)제도에 대해서 한명회·신숙주와 의견을 나누었다. 21일에는 도승지 권감이 속미면(粟未<9EAA>)을 올리자 음식을 내려주었고, 22일에는 간부(奸婦)와 짜고 본 남편을 죽인 정금(鄭金)을 사형시켰다.
24일에는 호조에서 경기도 양주 고을의 미곡(米穀)을 채워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고, 25일 예조에서 누각(漏刻: 물시계)을 제조해 관상감에 내려달라고 청한 것도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예종은 정사를 놓은 적이 없음에도 18일자에는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신숙주·한명회·최항 등의 공신들이 편찬한 『예종실록』의 수수께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6일자에 비로소 “임금이 불예(不豫: 임금의 병환을 뜻하는 말)하니 새벽에 서평군(西平君) 한계희와 좌참찬 임원준 등을 불러 입시하게 했다”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의학에 정통한 문신이었다.
이날에야 예종이 아픈 줄 알았다는 듯이 백관들과 정희 왕후의 족친들이 문안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27일 예종은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가 다른 여진족 마금파로(馬金波老)를 접대할 음식을 적게 준비했다는 이유로 예조 정랑(正郞)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평관(北平館) 동구(洞口)에서 낭장가로를 기다렸다가 체포해 가두되 마금파로에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을 내렸다.
비록 같은 날짜에 “임금이 불예(不豫)하므로 승지 등이 모여서 직숙하겠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는 기사가 있지만 위독한 상태의 사람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 다음 날(28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날의 『예종실록』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일이 착착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임금의 병이 위급하므로, 한계순과 정효상을 내불당에 보내 기도하게 하다.
②승지 및 증경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이 문안하다.
③죄인을 사면하고 여러 도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다.
④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薨)하다.
⑤승정원에서 장례의 모든 일에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물품을 쓰게 하다.
⑥권감이 여러 재상과 의논해 당일에(신왕이)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의논하다.
⑦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거애하다.
⑧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임금(성종)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
(『예종실록』 1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했으므로 조정은 발칵 뒤집혀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정해진 일정표가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당일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다.
⑥번 기사의 세부 사항은 도승지 권감이 “대저 제복(除服)하고 널(柩) 앞에서 즉위하는 것이 전례지만 지금은 이런 전례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라며 사왕(嗣王)이 당일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종은 세종 승하 엿새 후에 즉위했고, 단종은 문종 승하 나흘 후에 즉위했다.
문종과 단종은 세자였음에도 즉위까지 여러 날 걸렸는데 예종에게는 세자가 없었다.
『예종실록』은 예종 사망일 새벽 승정원에 8명의 원상(院相)이 모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숙주·한명회·구치관·최항·홍윤성·조석문·윤자운·김국광’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정전(思政殿)으로 가자 미리 짠 듯 승전(承傳: 왕명을 전함)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예종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원상들과 도승지 권감은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딸 의숙 공주의 남편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태비 정희 왕후 윤씨에게 “주상(主喪: 차기 국왕)을 빨리 정해야 한다”고 아뢰게 했다. 느닷없이 정인지의 아들이 등장해 원상들의 의견을 대비에게 전하고 명을 받는 승지나 환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정희왕후가 원상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고 묻자 원상들은 정희 왕후에게 공을 넘겼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 중 한 명이 후사가 되어야 했다. 네 살의 제안대군이 불가하다면 16세의 월산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희 왕후는 뜻밖에도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거명하면서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당연히 큰 술렁임이 일어야 하는데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속 조치를 논의할 때 신숙주는 대비 정희 왕후에게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사정전에서 보고 들을 사람은 승지나 사관(史官)밖에는 없었으니 이는 기록으로 남으면 안 되는 의논이란 뜻이었다.
이 날짜 『성종실록』은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을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고 전하고 있다. 정희 왕후와 공신세력 사이에 사전 조율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희 왕후와 공신들은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을 세우기로 미리 합의했던 것이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틀 후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 9명의 원상(院相)과 승지 등은 염습을 마친 후 빈청에서 대왕대비에게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 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 국왕의 죽음)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반드시 병환이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라면서 어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시신의 변색은 약물 중독 때 생기는 현상임에도 정희 왕후는 어의 권찬(權<6505>) 등을 옹호하고 나섰다. 원상들의 어의 처벌 주청은 형식에 불과해서 다시는 어의 처벌을 주청하지 않았으나 사헌부에서 계속 어의 권찬 등의 처벌을 요청했다. 정희 왕후는 모든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의원이 뜸질로써 치료하기 위해 ‘두 발을 함께 뜸질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대행왕은 ‘병 나지 않은 발까지 함께 뜸질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권찬(權<6505>: 어의)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사헌부에서 거듭 올린 처벌 요청을 정희 왕후는 묵살했다. 놀라운 것은 불과 두 달 후인 성종 1년(1470) 2월 7일 권찬을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는 점이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 왕후가 원상들과 상의해 정사를 처리하던 섭정 때였다. 권찬의 파격 승진은 예종 급서의 배후를 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조가 만든 공신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던 예종은 이처럼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공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예종 끝. 다음 호부터는 경종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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