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공민왕릉(恭愍王陵)

■고려 제31대 공민왕 1330년(충숙왕 17)∼1374년(공민왕 23). 고려 제31대왕. 재위 1351∼1374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전(顓),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

퇴계의 물러나는 정치, 율곡의 나아가는 정치 …

퇴계의 물러나는 정치, 율곡의 나아가는 정치 … 오늘 필요한 정치는 [중앙일보] 2011. 04. 02 00 : 25 ↑퇴계 이황(왼쪽)과 율곡 이이(오른쪽). 현실 정치를 가능한 떠나려 했던 퇴계와 타계할 때까지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율곡은 여러 모로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왕조 600년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두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정치는 별개의 분야가 아니었다. 사대부 혹은 선비라 불리는 성리학자(주자학자)가 곧 정치의 주역이었다. 정치가로서 퇴계와 율곡 중 누가 더 뛰어날까. 신간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는 그런 궁금증에 도전한다. 두 성현 앞에 감히 불경(不..

백담사(百潭寺)

■ 백담사(百潭寺)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690 TEL : 033-462-6969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

호패(號牌)

■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호패) 조선시대에 고위 관리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 싸지 16세 이상 모든 남자는 국가가 발행한 신분 증명서인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나무. 상아. 쇠뿔 등으로 만든 호패의 표면에는 이름, 출생년도, 제작년도와 발행기관 등이 새겨져 있다. 신분과 직책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록 내용이 달랐다. 남자가 호패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곧 호적에 올라 병역과 조세의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신분이 알려지면 세금이나 징집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사용을 기피 하였다. 정부에서는 백성들이 호패를 차도록 권장하기 위해 호패를 위조하면 극형, 호패를 찾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도록 하는 등의 처벌 법규를 만들어 시행 하였다. 또 호패가 없는 자에게는 아예 민원을 청구하거..

조선사 진기록(朝鮮史珍記錄)

■ 조선사 진기록(朝鮮史珍記錄) ●조선시대 가장 ‘간이 컸던’ 관리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태화(鄭太和-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로 인조 때 영의정에 오른 후 37번이나 사 직상소를 올린 전무 후무한 기록이다. ●가장 오래 재임한 임금은 ? 조선 21대 영조대왕으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를 왕위를 지켰다.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왕은? 문과, 무과, 사마시, 잡과를 포함할 경우 숙종때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 문과시험은? ◇1891년(고종 28) 신묘 증광문과로 무려 78명을 뽑았다. ◇1771년(영조 47) 신묘식년문과 74명 ◇1880년(고종 17) 경진 증광문과 72명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임금은? 조선의 제12대 인종으로 9..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대구광역시 만촌동 영남 제일 관문 앞에 있는 조선시대의 영영축성비(대구광역시 기념물 제4호)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 2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부터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이 819첩, 성 높이는 서남이 18척, 남북이 17척, 뒤 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 때 비로소 돌로 쌓..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 대구부 수성비(大邱府修城碑) [지정종목] 시도형문화재 [지정번호] 대구유형문화재 제5호 [지정번호] 1979년 1월 25일 [소재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 83-5 [시대] 조선 [종류 및 분류] 석비 [크기] 높이 191Cm, 폭 73Cm, 두께 45Cm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1979년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은 청색 화강암으로 높이 191㎝, 폭 73㎝, 두께 45㎝이다. 비석덮개는 황백색 화강암인데 팔작지붕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비석 받침은 황백색 화강암으로 직사각형이다. 이 비는 1869년(고종 6) 8월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세호(金世鎬)가 영남 감영의 성을 수축한 뒤 수성(修城)의 사적(事蹟)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수성..

우리나라 역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사람

우리나라 역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총 11명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해군의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육군의 충무공은 이수일 장군입니다. 이수일 장군이 이순신 장군만큼 알려지지 않은 점은 후손들의 못난 탓입니다. 아울러 역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01,박병묵[朴炳默] 나주박씨의 시조(羅州朴氏 始祖)로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이다. 고려(高麗)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나 그의 선조(先祖)에 대(對) 하여는 알 수가 없다. 박병묵( 朴炳默)은 나주(羅州)에 오래 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삼았다. 02,최필달[崔必達]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시조(始祖)로 시호(諡號)는충무(忠武)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무덤의 시원

■ 무덤의 시원 장례의 무덤 시원을 알려주는 자료가 맹자의 "등문공" 상편에 나온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장례가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들판에 시체를 버렸다. 어느날 우연히 길을 가다 온갖 짐승과 벌레들이 시체를 파먹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이 자신의 부모인 것을 알고는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하여 다시 부모의 시체를 땅에 두터이 묻어 다시는 거런일이 없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동양의 장례와 제례는 아득히 먼 조상들로 부터 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후 무덤의 보존 이상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풍습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묘의 진정한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

선덕여왕의 "선덕(善德)"은 왕휘(王諱)인가 시호( 諡號)인가?

선덕여왕의 ‘善德’은 왕휘(王諱)인가 시호(諡號)인가?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있는 선덕여왕의 영정이다. 1990년대 경북대 교수였던 유황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조선일보 DB) 사전을 찾아보면 선덕여왕은 이름(諱)을 덕만(德曼), 시호를 선덕(善德)이라고 했다, 라고 되어있다. ‘선덕’은 과연 시호인가?. 일본학자 말송보화(末松保和)에 의하면 '선덕'은 시호가 아니라 생전의 왕명(王名)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시호(諡號)는 지증왕때 부터 추증(追贈)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는 지증왕 다음의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을 모두 시호라고 기술했다.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 시호를 진흥(眞興)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흥(眞興)은 시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