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야촌(1) 2011. 3. 20. 19:31

■ 대구부 수성비(大邱府修城碑)

    [지정종목] 시도형문화재

    [지정번호] 대구유형문화재 제5호

    [지정번호] 1979년 1월 25일

    [소재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 83-5

   [시대] 조선

   [종류 및 분류] 석비

   [크기] 높이 191Cm, 폭 73Cm, 두께 45Cm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1979년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은 청색 화강암으로 높이 191㎝, 폭 73㎝, 두께 45㎝이다. 비석덮개는 황백색 화강암인데 팔작지붕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비석 받침은 황백색 화강암으로 직사각형이다.

 

이 비는 1869년(고종 6) 8월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세호(金世鎬)가 영남 감영의 성을 수축한 뒤 수성(修城)의 사적(事蹟)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수성비에는 1870년에 수리한 공사 내용과 공사를 마친 뒤 낙성식을 열어 유공자들을 포상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문의 내용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 최석로(崔錫魯)가 썼다. 대구부성(大邱府城)은 조선 영조 때,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국방상의 이유로 쌓았다. 그 뒤 문루 등이 훼손되어 원래의 성보다 높이를 더 높이고 넓혔으며 동서남북 대문의 문루 등을 고친 내용을 이 비에 기록하였다.

 

원래 이 비석은 대구 남문 밖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옆에 세웠는데 1906년 대구 군수 박중양(朴重陽)이 대구 읍성을 헐면서 옛 달성 군청 부근에 옮겼다가 1932년 대구 향교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후 1980년 영남제일관문(嶺南第一關門)을 중건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 대구읍성 약사(大邱邑城 略史)  

  

[역사]    

◇1590년(선조 23년) 대구읍성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대구도호부사 윤방)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대구읍성은 파괴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경상도 감영을 대구도호부로 이전하였다./경상도관찰사 이시방   

◇1736년(영조 12년) 4월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였다(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임응수)   

◇1737년 6월 완공하였고, 11월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1870년(고종 7년) 대구읍성이 크게 중수되었다(경상도관찰사 김세호)   

◇1906년(광무 10년) 10월 대구읍성이 철거되었다(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    

 

 [구성]   

◇경상감영   

◇둘레 2,700m, 높이 5m(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참조   

◇남장대 : 지금의 중앙파출소 앞.   

 

[성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 현재 남성로 대남한약방 자리이다.

    망우당공원의 영남제일관은 1980년 새로이 세운 것으로, 원형인 대구읍성 영남제일관의 규모, 품격에 못 미친다

   고 한다.   

◇진동문(鎭東門) : 현재 동성로 SC제일은행 대구지점 앞이다.   

◇공북문(拱北門) : 현재 북성로 신아산업사 서쪽이다.   

◇달서문(達西門) : 현재 서성로 옛 조흥은행 앞 네거리이다.   

◇동소문 : 현재 동성로 프라이비트백화점 남쪽이다.

◇서소문 : 현재 서성로 서성로교회 서쪽이다. 서문시장의 옛터가 이곳에 있었다.  

 

↑경상감영 옛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