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총 11명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해군의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육군의 충무공은 이수일 장군입니다.
이수일 장군이 이순신 장군만큼 알려지지 않은 점은 후손들의 못난 탓입니다.
아울러 역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01,박병묵[朴炳默]
나주박씨의 시조(羅州朴氏 始祖)로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이다.
고려(高麗)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나 그의 선조(先祖)에 대(對) 하여는 알 수가 없다. 박병묵( 朴炳默)은
나주(羅州)에 오래 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삼았다.
02,최필달[崔必達]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시조(始祖)로 시호(諡號)는충무(忠武)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으
로 918년(태조 1)에 삼중대광 삼한벽상 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贊化功臣)에 훈봉되었다. 벼슬은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03.조영무[趙英茂, ?~1414년]
본관은 한양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의 문신이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
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에 봉해졌다. 병권을 장악해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태종
의 극진한 총애를 받기도 했다.
벼슬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을 거쳐,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04,남 이[南怡, 1441년~1468년]
본관은 의령(宜寧)으로.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태종의 외손자(外孫子)로서 어머니가 태종의 네째 딸 정선(貞善) 공주이다. 1457년(세조 3) 17세의 나이로 무
과(武科)에 장원급제하였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에는 경기도 포천, 영평
일대의 도적떼를 토벌 하였다.
또한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평정하였고 그 공로로 적개공
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야인을
토벌하고, 강순· 어유소 등과 함께 이만주(李滿住)를 처치하였다. 무관으로서의 여러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
게 되었고, 이등군공(軍功)을 받아 공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에는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05,이 준[李浚, 1441(세종 23)~1479(성종 1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玖)이다.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1463년(세조 9) 구성군으로 봉해졌다. 1466년 무과(武科)에 장원 급
제하고, 이듬해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되어 이를 평
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특별 서용되어 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었고, 1469년(예종 1)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470년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영해(寧
海)로 귀양 갔다가 10년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1687년(숙종 13)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 때문이라는 김수항(金壽恒)의 주장
으로 복귀되 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06,이순신[李舜臣, 1545년~1598년]
덕수이씨-임진왜란 때 3도수군통제사로 한산대첩 등 백전백승한 전 세계 해전사상 전무 후 무한 승전기록 세움
거북선을 발명.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음.
07,김시민[金時敏, 1554년~1592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김씨(구)로,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
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진주목사, 경상우병사 역임.
임진왜란때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 군사로 왜군 2만명 사살. 상락부원군으로 추봉. 영의정에 추증되
었다.
08,이수일[李守一, 1554년~1632년]
성은 경주이씨로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忠武), 조부는 이자침(李自琛), 아버지는 종사
랑 이난(李鸞),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따님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잿말에서 태어났다.
배위는 공정대왕(제2대 정종)의 5대손인 도정 이귀년(李貴年)의 따님 전주이씨, 아들은 훈련대장으로 유명한 우
의정 이완(李浣)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였으며,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여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종2품)에 올랐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성주목사·북도병마절도사·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왜적 및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
굴을 소탕하였으며,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하여 길마
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른 공으로 진무공신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6년(1628) 형조판서가 되었
으며,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09,정충신[鄭忠信, 1576년(선조 9)∼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지(地)의 9대손으로 금
천군(錦川君) 윤(綸)의 아들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 이었고, 부(府)
에 예속된 지인(知印:通引)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청하여 왜군
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그에게 사서(史書)를 가르
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
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
해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하여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죽은 뒤에 왕이 내
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襚衣)로 하게 하였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
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하였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0,구인후[具引垕, 1578년~1658년]
능성구씨(綾城具氏)로,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할아버지는 좌찬성 사맹(思孟)이고, 아버지는 대사성 성(宬)이다. 인조의 외종형(外從兄)이
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고원군수·갑산부사·선전관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정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김유(金
瑬) 등의 반정모의에 참여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
란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후금의 군사와 싸웠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으며, 그 공으로 어영대장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사건을 적발하여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형조판서·공조판서·훈련대장·판의금부사를 두루 역임하고, 1653년 우의정이 되었다.
1654년 사은사로 청에 갔다온 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상소하다 죄를 입은 김홍욱(金弘郁)
을 옹호하다가 삭직되었다. 곧 복관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1,김응하[金應河, 1580년~1619년]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의(景義). 1604년(선조 37) 무과에 합격했으나 말직을 전전했다. 병조판서 박승종(朴承
宗)의 주선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주변의 시기로 파직당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박승종이 전라
도관찰사로 부임할때, 다시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1610년 선전관에 임명된 뒤 경원판관·도총부경력·삼수군수·북우후(北虞候) 등을 지냈다. 1618년 명이 후금
(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따라
좌영장으로 출정했다.
이해 3월에 부차령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조선의 원군도 후금 군대에 항복했을 때, 3,000의 군사로 후금군을
맞아싸우다 전사했다. 1620년 명신종(神宗)으로부터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
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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