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조식(曹植)-조조의 아들/문제(文帝) - 조비의 동생

■조식(曹植, 192~232 - 중국 삼국시대의 위(魏)나라 시인. ↑진사왕 조식(陳思王曹植) ↑진사왕 조식(陳思王曹植)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형 문제(文帝)가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하니,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이라,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으로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고]”라 읊어, 형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자기를 콩에, 형을 콩대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이 시가 바로 이름난 《칠보지시(七步之詩)》이다. 그런데 조비가 동생 조식..

조비(曹丕).

■조비(曹丕, 187~226) - 조조의 장자 자(字)는 자환(子桓), 시호(諡號)는 문제(文帝)로 중국 삼국시대위(魏) 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씨(劉氏)씨가 낳은 조앙(曹昻)과 조삭(曹鑠)이 모두 일찍 죽고, 그의 어머니인 변씨(卞氏)가 황후(皇后)가 되어 조조의 적장자(嫡長子)가 되었다. 조조는 원소에 대항한 관도전투(官渡戰鬪: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화북(華北)의 2대 세력이던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의 일대결전)에서 승리한 뒤 위공이 되었고, 216년에는 위왕으로 봉해져 사실상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조조는 220년 뤄양[洛陽]에서 사망했고, 조비가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의 헌제(獻帝)에게서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중국 한(漢: B..

조조(曹操).

■ 조조(曹操 : 155~220) ↑조조(曹操)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조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에 해당하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된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탁(董卓)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도군의 맹주 원소(袁紹, ?~202)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손권(孫權)·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하였고..

반고(班固)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

■반고(班固, 32년~92년)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반표(班彪) ▲반고(班固) 아버지 "반표(班彪)"가 시작하여 아들 "반고(班固)"가 집필하고 여동생 "반소(班昭)"의 마무리로 한(漢)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가 탄생하였다. ▲반소(班昭) 반소(班昭, 45년 ~ 116년)는 중국 후한의 시인으로, 자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다. 생애 반표(班彪)의 딸이자 반고(班固)와 반초(班超)의 여동생으로, 14세에 조세숙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조대가(曹大家)로 불리었다. 남편이 죽은 후 궁정에 초청되어 왕족들을 가르쳤다. 반고가 죽자 유지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였다. 《전한서》 편찬에서 가장 복잡했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반소가 완성한 것이..

반초(班超) _ 후한(後漢)의 장군.

■ 반초(班超) ↑반초(班超)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支配權)을 재확립했다. 역사학자 반고(班固:32~92)의 동생으로 일찍이 학문의 길을 포기(暴棄)하고 군무(軍務)에 뜻을 세웠다. 73년 중국의 북쪽 국경지역을 침략하던 흉노족을 평정하기 위해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여 흉노족 내부에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신속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나, 3년 후 소환되어 그의 노력들은 좌절(挫折)되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고 곧 타림 분지 전체(지금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를 장악(掌握)했다. 91년 서역도호(都護)가 되었고 파미르 고원을 가로질러 카스피아 해 연안(沿岸)까지 정복(征服)했다. 그의 지배지역(支配地域)과 로마 제국 사이에는 파르티아(지금의 이란)만이 가로놓여..

장건(張騫). 소무(蘇武). 이릉(李陵)

■ 장건(張騫,? ~ BC114)- 한무제(漢武帝)때의 신하. 처음으로 서역을 개척함. 목숨 내걸고 13년간 서역 탐방으로 동서양의 물꼬를 튼 한나라의 외교관이다. ▲장건(張騫) 한무제(漢武帝)는 흉노(匈奴)에 대한 효과적(效果的)인 공격을 위해 서역(西域)의 월지와 제휴할 목적으로 장건(張騫)을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遣)하였다. 장건은 중도에 흉노에 붙잡혀 억류(抑留)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대완국(大宛國), 대월지(大月氏), 대하국(大夏國)등의 서역제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장건(張騫)의 서역파견은 2차에 걸쳐 실시되는데, 그의 장기간에 걸친 탐사(探査)의 결과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중국과 서역 간에는 인적, 물적인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비단길로 불리는 아..

공손홍(公孫弘) - 한무제(漢武帝) 때의 宰相.

■공손홍(公孫弘) ▲원고생(轅固生) ▲공손홍(公孫弘) 유교(儒敎)를 중국의 공식적인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데, 이바지한 학자로. 곡학아세(曲學阿世 :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 애씀)의 양면성을 보인 인물. 제(齊)나라 사람이다. BC 124년 그는 학자인 동중서(董仲舒)와 함께 최초의 태학(太學)을 세웠다. 이곳은 미래의 관리들을 양성하고 심사하는 유가 학교로 후대에 실시된 과거제도의 선구가 되었다 군주는 도량(度量)을 넓게 하려 힘쓰고 신하는 검소(儉素)함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평소의 지론(持論).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하되 결론(決論)은 황제(黃帝)가 내리도록 하고 타인(他人)과의 론쟁(論爭)은 피(避)했다.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을 듯한 안건(案件)은 다른 사람과 아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이순신 장군을 전사시키다. ↑시마저요시히로(島津義弘) 화상 대대로 사쓰마 국(일본어>薩摩国(さつまのくに) 사쓰마노쿠니)의 슈고 다이묘(일본어>大名) 가문 출신이며, 사쓰마 번[일본어>일본어>薩摩藩, 사쓰마 한)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일본어>島津忠恒 / 島津家久 (しまづただつね / しまづいえひさ), 1576년(선조 9) 11월 27일 ~ 1638년(인조 16) 4월 7일]의 아버지이다. 전라북도 남원성에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陶工) 80명을 강제로 납치해 끌고 갔다 [생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壬辰倭亂>1592년(임진년, 선조 25)] 당시 1천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

조선에 온 중국 첩보원 사세용(史世用)

■ 역사스페셜 조선에 온 중국 첩보원 사세용(史世用) [방송] 2012. 7. 12.(목) 22:00~22:50 (KBS 1TV) [진행] 한상권 아나운서 [글,구성] 정종숙, 유재은 작가 [연출] 고정훈 PD -------------------------------------------------------------------------------------------------------------------------------------- 420년 전, 명일(明日)간에 추진된 한반도 최초의 분단 밀약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분할통치안’을 저지하며, 조선의 운명을 바꾼 중국 첩보원 ‘사세용(史世用)’ 그는 임진왜란 당시 한중일을 넘나들며, 정보전을 이끌었던 첩보원으로, 일본의 기밀정보를 제공..

조자룡(趙子龍)

■조자룡(趙子龍) 조자룡(168 ~ 229)은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眞定縣 : 지금의 허베이성 정딩현(正定縣)] 출신이기 때문에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이라고도 부른다. 신장이 8척이나 되었으며, 자태나 안색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 이어 조운전이 나오는데 그는 말석의 장수가 결코 아니다. 조자룡은 창을 쓰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가 그를 가리켜 “자룡은 담덩어리”라고 했을 정도로 매우 용감했다. 때는 적벽대전이 있기 전 조조가 강남을 공격하여 유비가 쫓길 때의 일이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니 중과부적이라 유비군은 신야를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