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

야촌(1) 2012. 7. 14. 03:49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이순신 장군을 전사시키다.

 

↑시마저요시히로(島津義弘) 화상

 

대대로 사쓰마 국(일본어>薩摩国(さつまのくに) 사쓰마노쿠니)의 슈고 다이묘(일본어>大名) 가문 출신이며, 사쓰마 번[일본어>일본어>薩摩藩, 사쓰마 한)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일본어>島津忠恒 / 島津家久 (しまづただつね / しまづいえひさ), 1576년(선조 9) 11월 27일 ~ 1638년(인조 16) 4월 7일]의 아버지이다.

 

전라북도 남원성에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陶工) 80명을 강제로 납치해 끌고 갔다


[생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壬辰倭亂>1592년(임진년, 선조 25)] 당시 1천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元均)의 조선(朝鮮)함대를 격파하였다.

 

1535년(중종 30) ~ 1619년(광해군 11)는 센고쿠시대(일본어>戦国時代)에서 에도시대(일본어>江戸時代)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일본어>大名)이다.

 

이듬해 (1598년) 사천(泗川) 선진리성(泗川船津里倭城)에서 7천명의 병사로 약4만명 이상의 조· 명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사천전투(泗川戰鬪)

 

같은 해 12월 순천왜성(順天倭城)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출하기 위해서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조·명 연합 함대와의 야간 해전에서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퇴로 확보라는 목적 달성에는 성공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일어난 유명한 전투이다.]가 발발하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작 1천 5백명의 병력만 이끌고 오자 명색이 다이묘인데, 데리고 온 병력이 1만 명도 안 된다며 마구 꾸짖고 미워했다.

 

그래도 전투 의지가 있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기습작전을 건의하였으나 병력이 1천 5백명밖에 안되는 주제에 말이 많다는 답변을 들으며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무시를 당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연달아 배신하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군은 이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해 철수하였으나 참전했던 1,500명의 병사 중 300여명만이 살아남는 피해를 입었으며, 전진철수 중에도 계속 동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명 중 80여명만 살아남아 사쓰마로 도주했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화해를 도모하지만 도쿠가와 측에서 화해를 거부하자 군비를 증강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규슈(九州)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주축으로 한 토벌군을 사쓰마(薩摩国)로 보내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장기전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1602년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에 양도하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 받을 수 있었다.

1619년 음력 7월 21일 요시히로는 오스미(大隅国) 가지키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85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시마즈 요시히로을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Shimazu Yoshihiro을 발음을 대입해서 한문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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