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조선왕조 계보(1392~1910/518년)

대 왕 즉위년도 재위기간 주요 일지 1 태조 (太祖) 1392 6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 (定宗) 1398 2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3 태종 (太宗) 1400 18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 -여러 가지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 (世宗) 1418 32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둠 5 문종 (文宗) 1450 2 -유교적 이상 정치 -문화를 발달시킴 6 단종 (端宗) 1452 3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 되었다가 죽임 을 당함 7 세조 (世祖) 1..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점필재 김선생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문인 김탁영(濯纓 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그 글을 사초에 올렸다. 연산군 무오년(1498)에 이르러 흉간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로 사림(士林)에 재앙을 꾸미었다. 처음에 시작은 자광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자신이 지은 시의 현판을 게시하였는데 필제가 함양군수에 있을 때, 철거하여 불태워 버리면서 말하기를 「자광은 어떤 자인데 감히 현판을 걸었는가」하였다. 자광이 유감을 품었다. 극돈이 입조해서 성준(成俊)과 같이 서로 모함하는 버릇이 있어 탁영(金馹孫)이 헌납으로 있을 때에 상소로 논핵(論劾)을 당하였다. 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성묘의 국상 때 서울에 향(香)을 올리지 않았고 기생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작성일 : 2014. 01. 01 ▲그림1 아래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명동(鳴洞)은 종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 역할을 한다. ▲그림 3> 성덕대왕신종의 맥놀이 현상 ⓒ한국과학창의재단 / 작가 김화연 1.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현대기술로서도 소리를 재현할 수 없는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난다. 특히 유난히 길고 특별한 소리의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히 천상의 울림이라 할 만 하다. 이 특별한 소리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이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나는 ‘맥놀이 현상’ 때문이다. 맥놀이란? 두 음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진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의 소리(진동)와 반대편에 부딪혀 되돌..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1604년 7월 20일 예조에서 회계(回啓)하기를 “명(明) 장수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제사지내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에는 이미 치제(致祭)토록 하였으니 무열사(武烈祠)에도 치제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맞을 것입니다. 제물(祭物)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정하게 갖추어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만 제관(祭官)은 한성에서 차출하여 보내야 합니까?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하게 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제관은 한성에서 내려 보내야....관원을 보내어 특별히 치제하는 뜻에 맞을 것이다.”하였다. ​ ​1634년 2월 19일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평양의 무열사(武烈祠)는 바로 임진년에 동정(東征)한..

<고려왕조실록>을 조작하여 고려사를 남긴 조선의 기록-高麗(Goli)

을 조작하여 고려사를 남긴 조선의 기록.---高麗(Goli) 고려사의 내용중 고려조에서 내려오던 이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초 1392년, 과거부터 내려오던 고서를 전부 수거(焚書)하기 시작하고 고려왕족을 멸족 시키기 시작한다. 태조, 태종조와 더불어 세종 ~ 단종까지 당시에 남아있던 진실한 고대사와 고려사를 수거하여 없애고 왜곡하는 극치를 이룬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의 왕들은 거의 즉위 초기 열심히 일하다 후반에 놀기 좋아하거나 모자란 사람들로 묘사하여 마치 고려가 위태 위태하게 5세기 동안을 버텨온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고려 원종때 원나라 침입에 항거하여 저항한 삼별초 기록에 진도와 제주도 등의 남해섬 들이 현재의 지리 상황과는 다르게 서술되고 있어 조선에서 개정한 현재의 지명..

丙子南漢日記 - 이휴운(李休運) 著

丙子南漢日記 [丙子十二月] 崇禎九年丙子十二月十一日。重試。 十二日。 曉頭未明。平安監司狀啓入來云。淸川以北。煙塵漲天。義州聲息。絶不相通。賊兵多小。不知其數。自此達夜。備局會議。 ○是日午。以本館褒貶事。諸員會于崔提調家前。始聞西邊可疑之報。而還于寓所。則日已沒矣。 十三日。 朝將往參承文褒貶。而行到闕門外。則褒貶已停。備局之議方午。賊已到安州矣。城中汹汹。出門者相繼。午後狀啓。又入來云。賊已到平壤矣。蓋絶和之後。丁卯之亂。上幸江都。與之結和而還。至是汗使人來云。吾卽皇帝吾卽皇帝位。國號淸。建元崇德。兄弟之國。義當相告。故通之耳。議者以爲善遇。以觀其變。洪翼漢等唱聲曰。彼旣稱帝建元。則稱臣朝貢之䝱。非朝則夕。不如先明大義。斬使絶和之愈也云云。 人知其必被屠戮。朝廷亦於江都。多聚糧糓。以爲奔避之計。而上下慌忙。莫知所措。是日拜判尹金慶徵。爲撿察使。副提學李敏求。爲副。守江都。上問體..

검천전투(儉川川戰鬪) - 병자호란

검천전투(儉川川戰鬪)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때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樂生面)의 「검천(儉川=또는 험천(險川) 이라고도 함」에서 조선군과 청나라 군이 벌인 전투를 말한다. 검천은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를 이루며 탄천으로 합류하는 동막천을 가리킨다. 당시 청나라 태종이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산성 주변을 포위당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의 명을 받고,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과 병사 7,000여명을 대..

이준열사 사인에 대한 신문 기사 자료.

이준열사 사인(李儁烈士死因)에 또 파문(波紋) 동아일보 1956. 07. 09 기사(뉴스) 이준열사 사인(李儁烈士死因)에 또 파문(波紋) 교과서(敎科書)엔 “자연사(自然死)로 명기(明記) 반세기(半世期) 동안의 열사(烈士)는 어디로 민족의 열사로서 근 반세기 동안을 온 겨레의 “존경의적”이 되고 있던 이준(李儁) 열사! 지금으로부터 사십팔년(四十八年) 전인 1907년 7월 14일 “홀렌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민족혼의 이슬”로 진 이(李)열사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한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구구한 설이 떠돌던차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부 역사서적과 학교 교과서에 까지 이(李)열사는 병사하였다는 것을 밝히게 됨으로서 근 오십년(五十年) 동안 전 민족에게 전해지던 사실(史實)이 뒤집어 질듯이 보여지고 있다. ..

목화(木花=면화(綿花)와 베틀

ⓒgreenma. ⓒ대물저격수 ▲ⓒ산야초 ↑베틀의 부분명칭도(한국브리태니커회사) ● 베틀 명주·모시·무명·삼베 등의 피륙을 짜는 틀로서 즉 직기(織機)를 말한다. 모양은 나란히 세운 두 개의 앞기둥에 의지하여 사람이 걸터앉기에 편한 높이로, 가운데에 세 장을 박은 틀을 가로로 끼워서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 끝에 앉아서 일을 하며 앞기둥 상부에는 용두머리가 얹혀서 기둥 자체를 유지시켜 준다. 용두머리 안쪽에는 두 개의 눈썹대가, 그리고 바깥쪽으로는 베틀신대가 반달처럼 걸렸으며, 이들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기구가 설비되었다. 베틀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 명칭이 있다. ① 용두머리:베틀 앞다리 위쪽에 있어, 두 개의 다리를 연결하며 눈썹대를 끼우는 둥근 나무토막. ② 눈썹대:용두머리 앞으로 나란히 내뻗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