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야촌(1) 2014. 1. 7. 00:34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점필재 김선생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문인 김탁영(濯纓 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그 글을 사초에 올렸다. 연산군 무오년(1498)에 이르러 흉간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로 사림(士林)에 재앙을 꾸미었다.

 

처음에 시작은 자광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자신이 지은 시의 현판을 게시하였는데 필제가 함양군수에 있을 때, 철거하여 불태워 버리면서 말하기를 「자광은 어떤 자인데 감히 현판을 걸었는가」하였다. 자광이 유감을 품었다.

 

극돈이 입조해서 성준(成俊)과 같이 서로 모함하는 버릇이 있어 탁영(金馹孫)이 헌납으로 있을 때에 상소로 논핵(論劾)을 당하였다. 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성묘의 국상 때 서울에 향(香)을 올리지 않았고 기생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고 탁영이 또 바로 사서에 적었다.

 

성조실록을 수찬할 때, 극돈이 당상관이 되었는데, 사초에 자기의 악행이 매우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개정해 줄 것을 사사로이 청했으나 따르지 않자 유감을 품었는데, 광묘조(세조,世祖)의 일을 적은 데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보고 욕심을 봉하고 그 사초를 근거로 아뢰어 화란의 불씨로 삼고자 하였다.

 

하루는 다른 사람을 다 물리치고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기를, 「일손이 선왕을 비방하였으니, 신자로서 이런 일을 보고서 위에 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사초를 봉해 아뢰어 위의 처분을 들으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하니, 세겸이 깜짝 놀라며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극돈이 자광에게 의논하니, 자광이 팔을 걷어붙이며, 「이것이 어찌 주저[遲疑]할 일인가.」 하고, 곧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필재문인 이목(李穆)에 과거의 상소를 논하며 필상이 죄가 있다하였다. 한치형(韓致亨)에게 가서는 세조에게 은혜 받은 것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먼저 말하여 그 마음을 움직인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내어 수근이 승지가 될적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아뢴 것이다.

 

연산이 포악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고의로 문사(文士)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명예만을 노리고 군상을 업신여겨 나로 하여금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그 무리이다.」 해서 항상 우울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한번 본때를 보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찰나에 자광의 아뢰는 바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장대(奬待)를 특별히 후히 하고, 명하여 남빈청(南賓廳)에서 죄수를 국문하게 했다.

 

그리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으로 하여금 출납을 맡게 하니, 딴 사람은 참견하지 못하였다. 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임(自任)하고 자원(子猿) 이 교지를 전할 적에 「오늘날은 바로 조정을 개배(改排)하는 때이니,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치가 있어야 하며,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아니 된다.」하였다.

 

매양 자원(子猿)이 교지를 전할 적에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 공근한 태도를 극진히 보이고, 마치 신사(申謝)하는 것 같이 하였다. 자광은 오히려 옥을 다스리는 일이 점점 해이하여 낮과 밤으로 단련(鍛鍊)할 바를 꾀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권 책자를 내놓고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한 다음, 이어서 아뢰기를, 「종직이 우리 세조를 저훼(詆毁)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不道)한 죄는 마땅히 대역(大逆)으로 논해야겠으며, 그가 지은 글도 세상에 유전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다 소각해버리소서.」하니, 왕이 좇았다.

 

자광이 왕의 노한 기회를 타서 많은 선비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획을 하여, 필상(弼商) 등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악은 무릇 신하된 자로서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니, 그 당여(黨與)를 끝까지 구문(究問)하여 깨끗이 제거한 후에야만 조정이 청명해지겠다.

 

그렇지 않으면 여당(餘黨)이 다시 일어나 미구에 환란이 닥쳐올 것이다.」하니, 아무 말이 없었는데, 사신(思愼)이 손을 저으며 중지 시키기를, 「무령(武靈)이 어찌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는가? 홀로 당고(黨錮)의 사실을 듣지 않았는가? 금망(禁網)이 날로 엄준해서 선비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되자, 한(漢)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되었다.

 

청론(淸論)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되는 것이니, 청론이 없어짐은 국가의 복이 아니다. 무령이 어찌 말을 잘못하는가? 당초 우리들이 아뢴 것은 사사(史事)를 위해서였는데, 지금 그 지엽(枝葉)이 뻗어나가 사사에 관계되지 않은 자의 수금(囚禁)이 날로 많아지니, 이는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은가?」 하니, 자광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죄를 정하는 날, 사신의 의논이 홀로 같지 않으니, 자광이 안색을 변하며 힐난하다가 각각 그 뜻을 따라 두 가지로 아뢰었는데, 왕이 자광 등의 의논을 따랐다.

 

7월 17일 전지(傳旨)하기를,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世祖朝)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종경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을 경도하였다.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 명을 마치게 하였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 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자광은 따라 기뻐하며 올가미를 씌웠다.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나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셈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하였다.

 

이미 의논한 형명을 아뢰고 종묘에 고한 글을 요약해서 말하며 어찌 사사로운 마음에 간신들이 은밀히 반란을 도모하려고 예날 일을 구실삼아 모두에게 글로 알리기를 흉악한 무리들이 붕당을 만들어 성덕(聖德)을 흉보고 비방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함이 부도(不道)하며 죄가 크게 악이 지극하므로 요약하여 사직에 고하기를 「속이는 글로 이루어졌으며 거짓말로써 성덕(聖德)을 비훼(非毀)하였습니다. 죄가 있어 부도(不道)하니 마땅히 사형에 처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7월27일 사령(赦令)을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신무(神武)의 자질로 국가가 위의(危疑)하고 뭇 간신이 도사린 즈음을 당하여, 침착한 기지와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시키시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되어,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우뚝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다.

 

그 조종(祖宗)에게 빛을 더한 간대(艱大)한 업적과 자손에게 끼친 연익(燕翼)의 모훈(謨訓)을, 자자손손 이어 받아 오늘에까지 이르러 아름다웠었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음으로 당류(黨類)를 결탁하여 흉악한 꾀를 행하려고 한지가 날이 오래되었노라.

 

그래서 그는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나타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간악(姦惡)한 붕당을 지어 동성 상제(同聲相濟)하여 그 글을 칭찬하되, 충분(忠憤)이 경동한 바라 하여 사초에 써서 불후(不朽)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종직과 더불어 과(科)가 같으므로 아울러 능지처사(凌遲處死)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일손이 이목· 허반· 강겸 등과 더불어 없었던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대서 서로 고하고 말하여 사(史)에 까지 썼으므로, 이목·허반도 아울러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내쳐 종으로 삼았노라.

 

그리고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무풍정(茂豊正) 총(摠) 등은 죄가 난언(亂言)에 범했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難言)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리 밖으로 내쳐 선생은 경원으로 유배되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모두 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였으며, 혹은 국정(國政)을 기의(譏議)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희재는 곤장 1백 대를, 이주는 곤장 백대를 때려 극변(極邊)으로 부처(付處)하고 이종준· 최보· 이원(李黿)·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흔 등은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 사람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로한(庭爐干)의 역(役)에 배정하였고, 수사관(修史官) 등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시켰다.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되었으므로 삼가 사유를 들어 종묘사직에 고하였노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적고 일에 어두운 사람으로 이 간당(奸黨)을 베어 없앴으니, 공구한 생각이 깊은 반면에 기쁘고 경사스러운 마음도 또한 간절하다.

 

그러므로 7월 27일 새벽을 기하여 강도·절도와 강상(綱常)에 관계된 범인을 제외하고는 이미 판결이 되었든 판결이 안되었든 모두 사면하노니, 감히 유지(宥旨)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인신(人臣)이란 난리를 만들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부도(不道)의 죄가 이미 굴복하였으니, 뇌우(雷雨)가 작해(作解)하듯이 마땅히 유신(惟新)의 은혜에 젖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이 뜻을 납득할 줄 안다.」하였다.

 

좌의정 한치형 등이 나아가 글로 보탰다. 요약하여 말하면 「어찌 반역의 무리들이 감히 방자하게 반역하려고 거짓으로 부탁하며 요망한 마음과 반역의 마음을 팔아 문사(文史)를 퍼트리니 스스로 가속하여 죄가 더없이 크며. 크고 작은 공분(共憤)들은 신민(臣民) 모두의 원수임으로 천지간에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어찌, 하늘이 베고 용서 받을 수 있는가. 번개와 천둥이 치고 끝내 벼락이 내리니 음흉함과 간특함에 사라졌다는 말들이 돌았다.」 이날 대낮이 캄캄하여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큰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리니, 성중 백성들이 놀라 넘어지고 떨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자광은 의기가 만족하여 양양하게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중외에 행해져서 조정이 독사(毒蛇)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슬리는 자가 없었다. 유림(儒林)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하고 있으므로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몇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탁영(金馹孫)이 그 문(文)에 찬(贊) 붙이기를

“이로서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자광을 설명하는 한구절에서 말하기를 조룡은 진시황인데. 진시황을 세조에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韓) 왕은 초(楚)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김종서(金宗瑞)를 베인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참고사항]

유자광(柳子光) : 1439년(세종 21)~ 1512년(중종 7), 조선 전기의 대신. 서얼 출신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종 때에는 ‘남이의 옥’을, 연산군 때에는 무오사화를 주도하며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이극돈(李克墩) : 1435년(세종 17) ~ 1503년(연산군 9), 조선 전기의 문신. 좌리공신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

     에 봉해졌다. 성절사,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성준(成俊) : 1436년(세종 18)~1504(연산군 10), 조선시대(朝鮮時代) 10대 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文臣).

     본관은 창녕. 자는 시좌(時佐). 7대 세조(世祖)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사간ㆍ참간ㆍ판서(判書)를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음.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되어

    유배(流配)되었다가 처형(刑)됨. 시호(諡號)는 명숙(明肅)이다. 

傳旨(전지) : 임금의 뜻을 담아 관청(官廳)이나 관리(官吏)에게 전(傳)함

한치형(韓致亨) : 1434년(세종 16)~1502년(연산군 8),조선 전기의 문신. 형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 좌의

    정을 지냈다. 좌의정이 되어 무오사화에 김일손 등을 처형하게 하고, 영의정에 오른 후 연산군의 폭정을 충간하

    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갑자사화에 추죄되어 부관참시 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공분(共憤) : 다수의 권위에 위에 의지하여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문제의 해결을 촉구할 구할 때 거론되었다

忠憤(충분) : 충의(忠義)로 인(因)해 생기는 분(憤)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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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史禍首末(사화수말)

 

佔畢齋金先生。嘗作弔義帝文。門人金濯纓馹孫。爲史官。書其文於史草。至燕山戊午。凶奸柳子光。李克墩等。因此搆禍於士林。先是。子光遊咸陽郡。作詩揭板。畢齋之守咸陽也。撤而焚之曰。何物子光。乃敢懸板。子光銜之。克墩立朝。與成俊有傾軋之習。濯纓之爲獻納也。上疏劾之。克墩以全羅監司。當成廟之喪。不進香京師。載妓而行。濯纓又直書于史。及修成廟實錄。時克墩爲堂上。見史草書己惡甚悉。私請改而不從。甚銜之。及見書光廟朝事。載弔義帝文。欲封其史草以啓。藉以爲禍胎。一日。屛人語摠裁官魚世謙曰。馹孫誣毀先王。臣子見如此事。不聞於上可乎。吾意謂封其史草以啓。則吾屬無患矣。世謙愕然不答。乃謀于子光。子光攘臂曰。此豈遲疑之事乎。卽往見盧思愼,尹弼商,畢齋門人李穆。嘗上疏論弼商之罪。 韓致亨。先敍受恩世祖。不可忘之意動其心。然後乃言其事。俱詣差備門。呼都承旨愼守勤。守勤之爲承旨也。臺諫侍從。以爲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 耳語良久。乃啓之。燕山猜暴。不喜學文。故尤惡文士曰。要名凌上。使我不得自由者皆此輩也。常鬱鬱不樂。欲一施快。而未得其釁。聞子光等所啓。大喜。以爲忠於國家。奬待特厚。命於南賓廳設鞠。令內豎金子猿掌出納。餘不得與聞。子光以獄事自任。於座中大言曰。今日是朝廷改排之時。須有如此大處置。不宜尋常以治之也。每於子猿傳敎時。必進前。曲爲恭謹之態。若將申謝之爲者。子光猶慮治獄漸弛。日夜謀所以鍛鍊。一日。自袖中出一卷書。摘其中弔義帝文與述酒詩。遍示諸推官曰。此皆指世廟而作。自爲註釋。逐句解之。令王易知。仍啓曰。宗直詆毀我世祖。宜論以大逆。其所爲文。不宜流傳。幷皆燒毀。王從之。子光欲乘王怒。爲一網打盡之計。目弼商等曰。此人之惡。凡爲臣子。不共戴天之讎。當究問其黨與。一切鋤去。然後方得淸明。不爾則餘黨復起。禍亂之作不久矣。思愼搖首止之曰。武靈何至爲此言也。獨不聞黨錮之事乎。禁網日峻。士流無所容迹。而漢隨以亡。淸論之亡。非國家之福。武靈何言之謬耶。當初吾輩所啓。爲史事耳。今枝葉蔓引。不干於史事者。囚繫日衆。無乃非吾輩本意乎。子光不悅。及定罪之日。思愼議獨不同。子光作色詰之。各以其意而啓之。王從子光等議。七月十七日傳旨。金宗直草茅賤士。世祖朝登第。成宗擢置經筵。久在侍從。寵恩傾朝。及其病退。猶使所在官。特賜米穀。以終其年。今其弟子金馹孫所修史草內。以不道之言。誣錄先王朝事。又載其師弔義帝文曰云云。從子光句釋 念我世廟大王。當國家危疑之際。奸臣謀亂。禍機垂發。誅除逆徒。宗社危而復安。子孫相繼。以至于今。功業巍巍。德冠百王。不意宗直與其門徒。譏議聖德。至使馹孫。誣書於史。此豈一朝一夕之故。陰蓄不臣之心。而歷事三朝。予今思之。不覺慘懼。其議刑名以啓。告宗廟文略曰。豈意奸臣潛懷不軌。假托古事。播諸文字。群凶黨附。誣詆聖德。亂逆不道。罪大惡極。告社稷文略曰。搆爲誣辭。非毀聖德。罪在不道。宜伏大辟。七月二十七日頒赦敎曰。恭惟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姿。當國家危疑。群奸盤據之際。沈幾睿斷。戡定禍亂。天命人心。自有攸屬。聖德神功。卓冠百王。增光祖宗艱大之業。貽厥子孫燕翼之謨。繼繼承承。式至今休。不意奸臣金宗直。包藏禍心。陰結黨類。欲售凶謀。爲日久矣。假托項籍弑義帝之事。形諸文字。詆毀先王。滔天之惡。罪在不赦。論以大逆。剖棺斬屍。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裕。朋奸黨惡。同聲相濟。稱美其文。以爲忠憤所激。書諸史草。欲垂不朽。其罪與宗直同科。幷令凌遲處斬。馹孫又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傳相告語。筆之於史。李穆,許磐。幷皆處斬。姜謙決杖一百。籍沒家產。極邊爲奴。表沿沫,洪瀚,鄭汝昌,茂豐副正摠等。罪犯亂言。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知亂言而不告。幷決杖一百。流三千里。先生配慶源 李宗準,崔溥,李黿,李胄,金宏弼,朴漢柱,任煕載,康伯珍,李繼孟,姜渾。俱以宗直門徒。結爲朋黨。互相稱譽。謗訕時事。煕載。決杖一百。李胄。決杖一百。極邊付處。李宗準,崔溥,李黿,金宏弼,朴漢柱,康伯珍,李繼孟,姜渾等。幷決杖八十。遠方付處。而流人等。幷定烽燧庭爐干之役。修史官等。見馹孫等史草。而不卽啓。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洪貴達,趙益貞,許琛,安琛等左遷。隨其罪之輕重。俱已處決。謹將事由。告于宗廟社稷。顧余寡昧。翦除姦黨。戰懼之念旣深。而喜幸之心益015_432b切。肆於今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強竊盜及關係綱常外。已決正未決正。咸宥除之。敢以宥旨前事相告語者。以其罪罪之。於戲。人臣無將。旣伏不道之罪。雷雨作解。宜霈維新之恩。故玆敎示。想宜知悉。左議政韓致亨等進賀箋。略曰。豈意逆儔敢肆反側。假託妖妄。用售不軌之心。傳播文史。自速莫大之罪。大小共憤。臣民咸讎。覆載難容。豈天誅之可逭。雷霆旣震。致陰慝之旋消云。是日晝晦。雨下如注。大風從東南起。拔木飛瓦。城中人庶。莫不顚仆股慄。子光意滿氣得。揚揚而歸家。自是威行中外。朝廷視如毒蛇。莫敢忤其意。儒林氣喪。重足累息。學舍蕭然。數月之間。無有讀誦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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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요약조선 성종 때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글.

[창작연대] 1457(세조 3)

[저작] 김종직(金宗直)

[형태] 제사 문

 

 

점필재 김종직 조의제문(佔畢齋金宗直弔義帝文)

 

정축년(1457,세조 3)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成), 지금의 경상북도 밀양에서 경산을 거쳐 답계역(䠌溪驛),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서 잤다. 그때 꿈에 한 신령이 일곱 가지 무늬가 들어간 예복[七章服]을 입은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 회왕(懷王) 손심(孫心) 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에게 살해되어 침강에 빠뜨려졌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깨어나서 놀라며 중얼거렸다. “회왕은 중국 남쪽에 있는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이니, 거리는 만리 넘게 떨어져 있고, 시간의 선후도 천년이 넘는다. 그런데도 꿈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강에 빠트렸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하였다.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 惟天賦物則以予人兮

그 누가 사대와 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 匪華豐而夷嗇兮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 曷古有而今亡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 故吾夷人又後千祀兮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 恭吊楚之懷王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 昔祖龍之弄牙角兮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 四海之波殷爲衁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 雖鱣鮪鰍鯢曷自保兮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 思網漏以營營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 時六國之遺祚兮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 沈淪播越僅媲夫編氓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 梁也南國之將種兮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 踵魚狐而起事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 求得王而從民望兮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 存熊繹於不祀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 握乾符而面陽兮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 天下固無尊於芊氏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 遣長者以入關兮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 亦有足覩其仁義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 胡不收以膏齊斧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 嗚呼勢有大不然者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 吾於王而益懼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 爲醢醋於反噬兮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 果天運之蹠盭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 郴之山磝以觸天兮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 景晻曖而向晏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 郴之水流以日夜兮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 波淫泆而不返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 天長地久恨其曷旣兮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 魂至今猶飄蕩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 余之心貫于金石兮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 王忽臨乎夢想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 循紫陽之老筆兮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 思螴蜳以欽欽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 擧雲罍以酹地兮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 冀英靈之來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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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점필재 김종직 조의제문(佔畢齋金宗直弔義帝文)

 

丁丑十月日。余自密城道京山。宿踏溪驛。夢有神人。被七章之服。頎然而來。自言楚懷王心。爲西楚霸王項籍所弑。沈之郴江。因忽不見。余覺之愕然曰。懷王。南楚之人也。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去。不啻萬有餘里。世之先後。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玆何祥也。且考之史。無投江之語。豈羽使人密擊。而投其尸于水歟。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曰。

惟天賦物則以予人兮。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匪華豐而夷嗇兮。曷古有而今亡。故吾夷人又後千祀兮。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鰌鯢曷自保兮。思網漏而營營。時六國之遺祚兮。沈淪播越僅嫓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求得王以從民望兮。存態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天下固無尊於芊氏。遣長者而入關兮。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擅夷冠軍兮。胡不收以膏諸斧。嗚呼勢有大不然者。吾於王而益懼。爲醢腊於反噬兮。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景晻曖而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波淫溢而不返。天長地久恨其曷旣兮。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王忽臨于夢想。循紫陽之老筆兮。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冀英靈之來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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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贊其文曰。以寓忠憤。

 

子光逐句釋之曰。祖龍。秦始皇也。以比於世廟。其曰。求得王以從民望者。王。楚懷王孫心也。初項梁欲誅秦。求孫心以爲義帝。宗直以義帝比魯山。以羊狠狼貪指世祖。以擅夷冠軍。指誅金宗瑞。其曰。胡不收云云。指魯山胡不收世祖也。其曰。爲醢腊云云。謂魯山不收世廟。友爲醢腊也。其曰。循紫陽云云。宗直以朱子自處。作賦以擬綱目之筆云。

 

藍溪先生文集卷之二/표연말(表沿沫)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