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야촌(1) 2013. 12. 15. 00:32

<승정원일기>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1604년 720일 예조에서 회계(回啓)하기를 () 장수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제사지내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에는 이미 치제(致祭)토록 하였으니 무열사(武烈祠)에도 치제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맞을 것입니다.

 

제물(祭物)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정하게 갖추어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만 제관(祭官)은 한성에서 차출하여 보내야 합니까?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하게 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제관은 한성에서 내려 보내야....관원을 보내어 특별히 치제하는 뜻에 맞을 것이다.”하였다.

1634219일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평양의 무열사(武烈祠)는 바로 임진년에 동정(東征)한 명() 장수 5명을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정묘 년 변란에 사당은 아무 탈이 없었으나 다섯 장수의 화상(畫像) 중에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화상만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이여백(李汝栢)의 화상은 허리 윗부분만 남아 있고 그 밖의 세 장수의 화상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조만간에 조사가 나올 것이고 지금도 명() 장수들이 왕래하는 자가 많은데 그들이 보고 매몰스럽게 여길 듯싶습니다. 해 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치하게 하소서.”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상서(尙書) 석성(石星)은 본 화상 그대로 두고 이여백의 화상은 다시 그리든지 아니면 수보(修補)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세 장수는 어쩔 수 없이 위판(位版)을 설치해야 하니 관작과 성명은 임진년에 접반관(接伴官)이었던 현재의 노재신(老宰臣)과 본지방의 노인들에게 물어서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따랐다.

1709911일 숙종이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8개조의 금법(禁法)8(八條)의 교()는 진실로 우리 동방에 큰 공이 있다. 평양(平壤) 서문(西門) 안에 있는 사당에 일찍이 근시(近侍)를 보내 치제(致祭) 했거니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번에 또한 승지를 보내 치제해야 한다.

 

무열사(武烈祠) 또한 평양에 있는데, 곧 선조 조(宣祖朝)에 명()의 여러 장() 석성(石星이여송(李如松이여백(李如栢/이여송의 동생장세작(張世爵양원(楊元)을 위해 창건한 사당이다.

 

아직까지 치제한 일이 없어 진실로 전례(典禮)를 행하지 않는 흠전(欠典)이 되니, 또한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하고 아울러 신칙하여 수호(守護)하게 해야 한다.”하였다. 1713912일 숙종이 명하기를 평양 무열사(武烈祠)의 춘제(春祭)는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의하여 대보단에 제사를 지낸 후에 춘제(春祭)를 거행하도록 하다.”하였으니예관(禮官)의 말을 따른 것이다.

      

1753721일 영조가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의 휘일(諱日)이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명의 태조·신종·의종인 3(三皇)의 휘일에 망배하는 일이 이미 끝나니 주실(周室)이 쇠미함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인 비풍(匪風왕실(王室)이 능이(陵夷)되어 소국(小國)이 곤폐 서러운 것을 비유하여 지은 시인 하천(下泉)이 마음에 한층 더하다.

 

더구나 오늘이 어느 날인가? 청구(靑丘)의 오늘은 우리 황제가 내려 준 것이니더욱이 슬픈 느낌이 절실하다.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제향 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무열사(武烈祠)에 특별히 치제(致祭)하여 내가 황은(皇恩)을 느끼는 뜻을 나타내라.”하고 이어서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써서 내리게 하였다.

 

1772116일 영조가 홍문관(弘文館) 관원(官員)인 유신(儒臣)을 불러 풍천장(風泉章)을 외게 하고친히 제문(祭文)을 지은 다음 대사마(大司馬)에게 명하여 내 일에 선무사(宣武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그리고 입직한 유신에게 명하여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치제하게 하였다.

      

17891211일 정조가 하교하기를 오늘 선무사(宣武祠)에 치제(致祭)할 때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사당과 선무사·무열사(武烈祠)에 치제토록 하라. 이 날은 바로 이 제독의 생년(生年생월(生月)이다.

 

이 제독을 같이 배향(配享)한 것으로 알고 제문(祭文)을 직접 지었는데 다시 문서를 상고하니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상서(尙書) 형개(邢玠) 두 신위(神位)뿐이었다. 무열사의 석성(石星) 상서(尙書) 이하 함께 배향된 여러 신위들에게도 치제하되 제문은 역시 직접 짓겠으니 도백(道伯)을 헌관(獻官)으로 삼도록 하라.”하였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이 날 이 제사를 지내는 의도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자손이 술잔을 올리고 뜰에는 악기를 진열하여 높이고 보답하는 의절(儀節)을 한껏 다하고 아울러 우러나오는 충심을 담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직접 참가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 한 번 제사를 지내면서 겉보기에만 화려하게 꾸미고 그치겠는가. 말세에 존주(尊周)라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읽을 데가 없지만저 명()의 옛 도읍인 신경(神京)을 바라보면 그 훌륭한 분들에 대한 생각을 더더욱 금할 수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실정(實政)으로는 그의 후손들을 돌보아주어 한편으로는 명()을 존중하는 생각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60주년 되는 날을 기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 제독의 손자인 행 부호군 이원(李源)을 발탁하여 병사(兵使)에 제수하라. 옛 사람은 오히려 벽 틈의 거미인 지주(蜘蛛)도 사랑하였으니 지주(蜘蛛)의 주() 자가 주()와 음이 서로 같으므로 그렇게 사랑한 것이었다.

 

더구나 제독의 선계(先系)는 본래 우리나라 출신인데 공의 손자가 근본을 돌이켜 우리나라에 왔으니 이것부터가 벌써 기이한 일이다. 연전에 북경의 저자에서 보책(譜冊)을 사다가 그의 집에 주는 한편신주(神主)를 만들어 모셔놓게 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

 

장세작(張世爵)의 후손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명국 출신인데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영구히 사과(司果)에 임명한 고사(故事)가 있는데, 하물며 이 집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는 이 집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벼슬이 없을 경우에는 당상 이하는 품계에 따라 가설(加設)한 중추부의 관직인 추함(樞啣)을 주고당하관 이하 백도(白徒)에 이르기 까지는 사과(司果) 벼슬을 주도록 하라.

 

이것은 의리가 북받쳐 규정을 창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열조(列祖)의 훌륭하신 뜻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한 가지 일이다.”하였다. 1791319일 이 때 석한영(石漢英석한준(石漢俊) 형제가 있어 스스로 명국 상서 석성(石星)의 후손이라 하니 정조가 불러서 그 족계(族系)를 물었다.

 

석한영 등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석성의 아우 석규(石奎)4세손인 현손(玄孫)인데, 갑신년인 1644(인조 22)년에 석규의 아들 석계조(石繼祖)가 승려 휘정(徽貞)과 함께 세종 조에 여진족을 막기 위해 개척하여 설치하였다가 단종 조, 세조 조에 폐()한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4(四郡)인 폐사군(廢四郡)의 만포(滿浦) 땅에서 안협현(安峽縣)으로 와서 자취를 숨기고 살아 자손들이 거기에 살게 되었습니다.”하고는 이어 조주석씨기실(潮州石氏紀實)이란 책을 올렸는데 이는 안협 사람 이세영(李世瑛)이 지은 것이라 하였다.

정조가 전교하기를 우리나라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곧 신종 만력제가 다시 살려낸 재조지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상서 석공 같은 분이 있어 힘써 동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계책을 도왔고 그 뒤에 이여송(李如松)인 이제독(李提督) 형제와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 두 원수의 큰 승리와 형개(邢玠)인 형 군문(邢 軍門) · 양호(楊鎬)인 양 경리(楊 經理)의 왜군을 소탕한 일들은 모두 석 상서가 이모저모로 주선해 준 덕분이었다.

 

그 당시 조정의 의견이 많이 갈라지자 상서는 의분에 겨워 맹세하기를 만약 일을 이루지 못하면 죽고야 말겠다.’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남아있는 전기에 실려 있는데 그 간곡한 정성은 먼 후세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게 한다.

 

석성(石星)은 끝내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죽고 처자는 변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 석성(石星)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갚지 못하였다. 그 죽음은 곧 우리나라 때문 이었으니, 우리나라에서 크게 보답하는 것이 어찌 위에서 말한 여러 명장보다 조금이라도 뒤질 수 있겠는가.

 

이 제독의 후손도 우리나라에 넘어와 살고 있는데 연전에 특별히 의리를 높이는 예를 강구하여 사당을 짓고 신위를 만들어 희생을 잡아 제사지내게 하였다. 상서의 경우는 그 종손이 역시 승려 휘정과 바다를 건너와 동쪽 고을에 자취를 감춘 자가 있었다.

 

지난 번 교외에 나갔을 때 비로소 상서의 아우인 석규의 손자에 현손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망배하는 반열에 참여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 대보단의 재사(齋舍)에서 불러 만나보고 우리나라로 온 사적을 가져다 보니, 충분히 믿을 만한 증거가 된다.

 

이날 이 책을 보았으니 특이함을 표창하는 일을 어찌 차마 이날을 넘겨서 하겠는가. 그러나 상서의 직계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사당과 신위를 별도로 만드는 것을 이 제독 집의 전례처럼 하자고 갑자기 논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일찍이 들으니 무열사(武烈祠)에 봉안된 여러 초상 가운데 상서의 초상만은 본디 얼굴 모습이 또렷하여 살아있는 것 같다 하였다. 안협에 들어가 살고 있는 석한영·석한준 등에게 병조로 하여금 역마를 주어서 오늘 바로 평양에 있는 무열사에 보내 한 번 알현하도록 하라. 만약 소본(小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집을 사서 봉안해 두고 때때로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할 것이며, 만약 없다면 지자(支子)가 따로 사당을 세우는 의리를 모방해 적용한다 해도 불가하지는 않을 듯하다.

 

주자(朱子)의 말에도 종손이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경우 남아있는 방계 자손이 그쪽을 바라보면서 제사지낸다는 것이 있고 가례(家禮)신주를 반열에 따라 부묘(祔廟)한다.’는 것이나 통전(通典)묘를 향해서 제단을 만든다.’고 한 것이 다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다.

 

더구나 영명하여 사라지지 않은 석 상서의 혼령이 있다면 어찌 나라가 망해 버린 명국 땅에서 제사를 흠향하고 싶겠는가. 인정(人情)이 가는 곳에는 예법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석한영(石漢英)이 상서를 제사지내는 것이 예법에도 결코 어긋나지 않을 줄로 안다. 이런 내용을 한영 등이 알도록 하라.”하고 이어 한영 등을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권무군관(勸武軍官)에 붙여 요식(料食)을 받게 할 것을 명하였다.

      

179286일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장계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가방(家邦)을 재조(再造)하게 된 것은 명국의 은혜가 아님이 없으며 또한 우리나라를 구원한 여러 장수들이 의()를 지니고 무공(武功)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구원한 공로로는 평양(平壤)에서의 승리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니 우리 선조 대왕께서 특별히 화공(畵工)을 보내 석 상서(石 尙書)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총병(摠兵)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의 상()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대개 석공은 우리나라를 응원해야 한다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고 제독과 세 총병은 평양을 수복할 때 가장 뛰어난 공로를 세웠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후 평양에 사당을 세웠으니 바로 지금의 무열사(武烈祠)가 그 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처음에 맨 먼저 석 상서와 이 총병 두 분의 진상(眞像)을 배알하였는데 엄연한 기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하였어며 그 나머지 세 분의 상은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신주(神主)로 대신하였으니 강개(慷慨)하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사당은 병란이 막 끝난 뒤 처음 세운 것이어서 제도가 좁고 누추하며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아 몇 개의 기둥만 서 있어 집이 적막하고 황량합니다. 일찍이 수직소(守直所)가 없었고 단지 몇 명의 재임(齋任)만 있어 한 달에 두 번씩 분향(焚香)만 할 뿐입니다.

 

신이 개탄하여 경영하는 이에게 물어보고 유생과 무사를 초선(抄選)하여 새로 동서 두 양재(兩齋)를 지어 나누어 살면서 윤번으로 직수하게 하고 공부하는 장소를 삼았습니다. 밖의 터를 넓히고 대문을 세워 체모를 높이고 보기에 좋게 하였으니 숭보(崇報)하는 도리에 만에 하나나마 보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가 당시의 사적을 상고해 보니 거행하지 않은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평양지(平壤誌)의 성을 회복한 시말에 이르기를 계사년 16일에 제독 이여송이 세 협장(協將) 양원·이여백·장세작을 거느리고 군사 427백여 명을 이끌고 성의 북쪽으로 진격하여 진을 치니 왜장(倭將)이 홍의(紅衣)를 입은 천병(天兵)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양원의 절강(浙江) 군사는 사납고 용감하여 대적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8일 새벽에 제독이 징을 한 번 울리자 3(三軍)이 일제히 진격하여 1()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고 1군은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하고 1군은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장창(長鎗대검(大劒)을 사용해 칼끝을 나란히 하여 내려뜨리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같고 화살과 탄환이 비 오듯 하여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후퇴하는 자 한 명을 베어 진전(陣前)에 돌려보이니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갔고 제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낙상지가 겨드랑이에 대포(大砲)를 끼고서 크게 외치며 연달아 쏘니 연기가 하늘까지 뻗쳤다. 또 손으로 죽은 시체를 움켜잡아서 성 위로 동댕이치자 적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명국 군사가 성으로 날아 올라왔다고 하면서 물러가 내성(內城)을 지켰다.

낙상지가 성문을 깨뜨리고 승승장구하며 적을 섬멸하니 적들이 움츠러들어 도망해 토굴(土窟)로 들어가 구멍을 많이 뚫고 바라보는 것이 벌집과 같았다. 그 구멍으로 어지럽게 총탄을 쏘아대어 명국 군사가 많이 죽자 제독이 군사를 거두어 영()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짐승도 궁하면 덤벼드는 법이니 우선은 살 길을 터주는 것만 못하다하였다.

 

3경에 적이 대동문을 통해 도망하여 하룻밤 사이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길에서 많이 거꾸러져 죽었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첩보를 주달하기를 죽은 왜병이 2만여 명이며, 포로가 되었던 조선사람 12백 명이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을 회복한 공적은 비록 제독과 여러분이 협력하여 군사의 위엄을 드날린 데에 힘입은 것이지만 몸을 날려 성을 함락해 소굴을 소탕한 것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낙 참장의 공로를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번쩍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를 끼고 시체를 던진 것을 보면 크고 용맹스러운 담력(膽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꺼 구로 돌릴 만하였으니 비록 옛 날의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평양 사람들이 어제의 일처럼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그 공로를 갚고자 한다면 실로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야 합당하겠지만 당시에 배향(配享)인 철향(腏享)하지 못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독과 총 병은 모두 대수(大帥)였고 낙상지(駱尙志)는 그 휘하의 편장(偏將)이었기 때문에 화상을 그리는 가운데 들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제사지내는 열에서 누락된 것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일찍이 선배들의 말을 듣건대 낙 참장은 용맹스러움이 3군 가운데 으뜸이어서 낙천근(駱千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 왜적을 토벌하는 싸움에서 매양 적을 꺾고 성을 함락한 공로가 많은 찬획사(贊畵使) 이시발(李時發)이 그와 함께 주선하고 행군하면서 그 장한 용기에 감복하여 의기(義氣)가 서로 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낙상지(駱尙志)가 명국 책 수천 권을 실어다가 주어 이씨(李氏) 집안이 마침내 장서가 많다고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낙상지(駱尙志)는 조최(趙衰)가 예악(禮樂)에 대해 잘 알고 시서(詩書)에도 능숙하니 필시 군대를 통솔하는 법을 잘 알 것이라 하자 문공이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은 극곡(郤縠)이 시서(詩書)에 대해 잘 알고 촉()의 장수 관우(關羽)인 관공(關公)이 춘추(春秋)를 즐겨 읽은 것에 거의 가까워 세상에 드문 기남자(奇男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물로 이런 공적이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어찌 드러내고 보답하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평양에 이미 세운 사우(祠宇)에서 일체로 향사하는 것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바야흐로 사우를 증수(增修)하는 날을 당했으니 따라서 배식(配食)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옳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장계를 예관(禮官)에게 물으시어 특별히 명국의 참장 낙상지를 무열사에 제향(躋享)하도록 명하신다면 비단 우리나라사람이 정성을 다해 공로를 갚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성조(聖朝)에서 명국을 존숭하는 뜻에도 빛이 날 것입니다.”하니 정조가 회유(回諭)하기를 무열사의 중수(重修)를 조령(朝令)을 기다리지 않고 경이 녹봉을 내놓고 재물을 모아 북쪽 터를 넓히고 대문과 양무(兩廡)를 세웠으며 또 유생과 무사를 뽑아 안접하게 했다니 경의 마음에 감동하고 경의 일이 가상하다.

 

역사를 준공하는 날에 마땅히 향축(香祝)을 보내 상서(尙書) 이하에게 치제(致祭)할 것이니 경은 그 때에 임해 향축을 장계로 청하라. , 낙 참장이 우리나라에 위대한 공로가 있는데도 아직껏 일체로 향사하는 것에서 빠졌으니 실로 흠전(欠典)이다.

 

한 달 전에 신종 만력제의 기신(忌辰)을 인해 생각이 나서 한두 가지 표창하고 숭보(崇報)한 일이 있었는데 미처 참장의 일은 기억하지 못해 그 날의 전교에 함께 언급하지 못하였다. 경이 이처럼 진술하니 더욱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다. 예를 관장하는 신하에게 물어도 어찌 다른 견해가 있겠는가. 특별히 장계의 요청을 윤허하니경은 길일(吉日)을 가려 위판(位版)을 만들어서 신령을 편히 모시도록 하라.”하였다.

      

1792819일 명국의 부총병(副摠兵) 등자용(鄧子龍)을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정조가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명국의 부총병 등자용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의 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명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명국 부총병 등자용 공을 진 도독(陳 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의 낙상지(駱尙志) 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과 강진 땅 탄보 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자용(鄧子龍) 총병은 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은 남해의 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하였다.

 

918일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무열사(武烈祠)를 보수하는 일과 낙상지(駱尙志) 참장(參將)의 위판(位版)을 만드는 일로 치계(馳啓)하면서 제사를 올릴 때 해 조()로 하여금 향축(香祝)을 내려보내 주게 할 것을 청하니회유(回諭)하기를 제문(祭文)은 이미 지어서 내려 보냈다.

 

헌관(獻官)은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의 손자인 행 부호군(副護軍) 이원(李源)으로 삼았는데, 향축을 받들고 대동강(大同江) 가에 이르거든 경이 활집과 전동을 갖추고 기고(旗鼓)를 인솔하여 위의를 갖추어 맞이하고 인도하여 무열사에 이르러 의식대로 예를 거행하라.

 

예를 행할 때는 군악(軍樂)을 사용하고 복색은 헌관 이하의 참반(參班)과 감사·수령은 모두 선무사(宣武祠)와 제독 사당(提督祠堂)에서의 의식에 따라 갑주(甲胄)를 착용할 것이며, 대축(大祝)은 도내의 수령 중에서 옥당(玉堂)을 거친 적이 있는 사람으로 뽑고여러 집사(執事)들도 당상관(堂上官)으로서 경력이 있는 무변 수령(武弁守令)으로 정하도록 하라.

예를 마친 다음날 헌관으로 상시(上試)를 삼고 감사로 부시(副試)를 삼아서 제향에 참배했던 무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인하여 류((()의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게 하되 류의 34(三中 四分) 이상과 기의 3(三中)과 철의 130보 이상은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류의 변3(邊三中)과 기의 2(二中)과 철의 120보는 모두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며 그 나머지 입격한 사람들은 본도에서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라.

 

제도가 다시 새로워져 일의 체모가 그 전과 다르니 경은 숙묘조(肅廟朝) 때 성명(成命)한 영유(永柔)3충사(三忠祠)의 의식에 따라 한 책의 절목(節目)을 작성한 다음 무열(武列)에 있는 자로 그 일을 전담하게 하라. 거기에 쓰이는 물자는 특례로 유의하여 무위(武衛)를 분발시키는 실제 효과가 있게 하라.”하였다.

      

1011일 평안도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무열사(武烈祠) 재임유생을 무반으로 대신하자면 난처한 점이 있다고 치계한 데 대해 회유하기를 경이 이와 같이 아뢰니 경장(更張)의 뜻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고 하겠다.

 

그 도는 원래 무()를 숭상하는 지방이다. 근래 문만 숭상하는 폐단이 심해 간교한 구멍이 날로 뚫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만 가지고 대간 시종을 넘보기도 하고 유자라는 것만으로 향임(鄕任)을 차지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반을 천시하고 무예 닦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활을 잡던 자가 붓대를 잡고 무예를 익히던 자가 읍양(揖讓)하는 바람에 관서 일대가 앞으로는 무예를 모르는 지방으로 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관심을 갖고 힘을 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곳 풍속을 일변시켜 다시 옛 날대로 되게 하려면 비록 십분 강마(講磨)를 하고 백방으로 권장한다고 하더라도 무인을 천대하는 폐단을 통렬하게 개혁하지 않고서는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경을 비롯해서 이하 모두가 그러한 사실을 뻔히 보면서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도신(道臣)이 그러한데 수령들이야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만일 무사들이 조두(俎豆) 일에는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그렇게 염려한다면 그 것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가령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문관이고 자제가 향임(鄕任)을 맡고 있는 경우이거나 또는 무반으로서 이름난 명족(名族)의 경우는 그들을 특별히 권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사 일을 주관하게 하고 겸하여 사우(祠宇)까지 수호하게 할 것이다.

 

일단 그 일을 맡았던 사람이나 그 원에 소속된 사람에 대해서 향중에서 특별 대우를 하고 한성 관아에서도 특별 수용을 하면 어찌 아무리 작은 것일망정 보탬이 없겠는가. 제사 때 입는 옷에 있어서도 소매가 큰 봉액(縫掖)을 입자고 한 경의 요청은 너무나 현실과 맞지 않는다. 갑옷과 투구 차림의 무사가 술잔을 올리고 뜰에서는 호드기와 나팔을 불면 그 것이 바로 신을 이르게 하는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또 독축(讀祝) 문제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식년(式年) 정도 되면 4(四書무경7(武經七書)·3(三鑑)·3(三典)만 읽는 정도가 아니다. 거기에다 만일 정성을 다해 기예가 뛰어난 자들을 별도로 뽑아 쓴다면 그들 모두가 다 문무겸전의 사람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무관 참봉을 두는 일, 동서재 재생들을 무관 반열로 하는 일 그리고 기타 별도로 권장할 수 있는 방안들을 다시 강구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도내 유사(儒士)로서 돈을 내어 경비를 보탠 자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한 말은 경으로서 그러한 망발이 어디 있는가. 일이란 할 만하면 하는 것이고 해서 안 될 일이면 않는 것이다.

 

가령 그들의 노고에 대해 보답을 하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어떻게 감히 재물을 출연했다는 등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는 글에다 번거롭게 진술하는 것인가. 국가의 체통으로 보아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경에게는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는 법을 적용하겠다. 그들이 이미 재물을 내놓았으면 반드시 본원에 정성을 바치게 해야 할 것이니 그중에서 그 지체가 원임(院任)이나 원생(院生)으로 합당한 자가 있으면 모두 권무군관으로 이속시킨 다음 장문하도록 하라.”하였다.

 

180132일 순조가 하교하기를 금년은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께서 붕어(崩御)하신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다. 이 제독(提督)의 사우(祠宇)인 선무사(宣武祠)에 장신(將臣)을 보내어 유제(侑祭)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독의 봉사손(奉祀孫) 이효승(李孝承)에게 부총관(副摠管)을 제수하고 충무공(忠武公)의 봉사손도 또한 녹용(錄用)하도록 하라.”하고 평양인 기성(箕城)의 무열사(武烈祠)의 석 상서(石尙書) 등 여러 사람들을 제사하는 곳에 일체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183226일 순조가 하교하기를 ()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거의 멸망(滅亡)하게 된 조선국을 구원(救援)하여 도와 준 은혜(恩惠)인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생각하니 하늘과 같이 높고 땅같이 두터운데 보답할 길이 없으니 주실(周室)이 쇠미함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인 비풍(匪風왕실(王室)이 능이(陵夷)되어 소국(小國)이 곤폐 서러운 것을 비유하여 지은 시인 하천(下泉)의 감회를 어디에 의뢰하겠는가?

 

선무사(宣武祠)와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평양의 무열사(武烈祠)에도 일체로 치제하되 헌관(獻官)은 도백(道伯)으로 하도록 하라. 조선국의 국난에 목숨을 바쳐 공훈을 세운 여러 신하들의 충성과 노고에 대해서는 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달천(撻川)의 전쟁터에는 예조 당상의 말로 인하여 이미 치제할 것을 명하였지만 그 중에 더욱 우뚝하게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또한 마음속으로 느낀 거조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충렬공 고경명(高敬命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순절(殉節)한 곳에는 함께 국난에 목숨을 바친 장사들과 더불어 단()을 설치해 치제(致祭)하도록 하되 제관은 본도(本道)의 수령 가운데에서 직질이 높은 자를 가려서 차출하도록 하라.

 

충렬공의 집과 문열 공의 집에는 지금 녹사(菉仕)하는 사람이 없으니 봉사손(奉祀孫)을 해 조()에서 이름을 물어 수용하도록 하라.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문충공 류성용(柳成龍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의 가묘(家廟)에는 승지를 보내 사유(賜侑)하게 하되 사판(祠版)이 시골에 있는 자는 도내의 수령으로서 일찍이 승지를 겪은 사람을 가려 제관에 차출하도록 하라.

 

! 전후 8년 동안의 난리에 충절(忠節)을 다해 몸을 바친 사람의 그 수효를 어찌 한정 하겠는가 마는 예()란 번잡하게 되면 도리어 잗달게 되는 것이니 지금에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자를 들어서 행하였는데 옛 일을 추억하는 감회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 실은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

 

어찌 누구는 치제하고 누구는 치제하지 않았다 하여 간격이 있겠는가? 해 방()에서는 자세히 알라.”하였다.

183782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은 곧 선조조(宣祖朝)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옛 갑년(甲年)인데 천장(天將)이 왜구(倭寇)의 침략을 신속하게 토벌한 공적(功績)100(百代)를 가도 잊을 수가 없다.

 

선무사(宣武祠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순사(殉死)한 조선국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거행하기는 진실로 어렵겠지만 이때에 남원(南原)의 일은 더욱 절실하게 비통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남원의 명 장수 유정(劉綎)이 건립한 관우의 사당인 탄보묘(誕報廟)와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남원 부사 임현(任鉉), 조방장 김경로(金敬老),별장 신호(申浩), 판관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방어사 오응정(吳應鼎)을 배향하는 충렬사(忠烈祠)에 도내(道內)에서 품질(品秩)이 높은 수령(守令)을 보내어 일체로 치제(致祭)하게 하라.”하였다.

      

1853421일 철종이 평안도의 무열사 참봉(武烈祠 參奉) 2()를 명()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인 이 제독(提督)의 후예(後裔)와 도내(道內)의 진무사(振武士)로 하여금 충용(充用)하고, 과한(瓜限) 전에는 일체 천전(遷轉)시키지 말도록 명하였다.

 

188431일 고조 광무제가 전교하기를 선무사(宣武祠), 충렬사(忠烈祠),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3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현절사(顯節祠)에 순조(純祖) 갑신년인 1824년의 전례대로 치제(致祭)하고, 무열사(武烈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의주(義州)에 있는 여러 의사(義士)들의 제단과 천장인(泉漳人)의 제단에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는 동시에 본도에서 차관(差官)을 정하여 보내서 함께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충정공(忠正公) 윤집(尹集),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등 세 집안의 자손들에 대하여 해당 조()에서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로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되 명 장수 이여송인 이 제독(提督)의 봉사손(奉祀孫)은 수령(守令)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먼저 검의(檢擬)하라.”하였다.

      

18911224일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순조(純祖) 임진년인 1832년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선무사(宣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평양 무열사(平壤 武烈祠)에 제사를 지냈고,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절개를 지켜 숨진 곳에 제단을 만들고 그들과 같이 희생된 장사(將士)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으며, 두 충렬공(忠烈公)과 문열공(文烈公)의 집안의 봉사손(奉祀孫)을 수용(收用)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文忠公) 류성용(柳成龍),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은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내렸으며, () 순변사(巡邊使) 신입(申砬), 고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圽), 고 목사(牧使) 이종장(李宗張)은 전쟁 터인 충주(忠州) 달천(㺚川)에 같이 희생된 장사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고, 고 종사관(從事官) 박지(朴篪윤섬(尹暹이경유(李慶流)는 절개를 지켜 숨진 곳인 상주(尙州) 증연(甑淵)에 모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내렸습니다.

 

오래도록 잊지 않는 뜻과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훌륭한 덕에 대해 참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데 내 년은 바로 옛 날의 그 해입니다.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이어받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은덕을 갚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모두 순조 조(純祖朝)에 시행한 전례대로 내 년 봄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18921026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정무사(靖武祠)에 종향(從享)할 길일을 1211일로 추택(推擇)하였습니다. 향사(享祀)의 시일(時日)은 매 년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있는 정무사의 향사일(享祀日)에 함께 설행하소서.

 

축문(祝文)은 예문관(藝文館)에게 찬출(撰出)하게 하고 제물(祭物)과 제의(祭儀)의 절차(節次)는 모두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의 규례대로 거행하고,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는 이조(吏曹)에서 차정(差定)하게 하고 제물과 제기의 조성 및 상탁(床卓)의 포진(鋪陳) 등의 일은 호조(戶曹)와 유사(侑司)에서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함께 제사지낼 만한 사람 9()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인 뒤에 계하(啓下)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가 윤허하였다.

 

[출처]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작성자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