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중국 5대성씨의 연원

작성일 : 2014. 12. 03 가. 중국 5대 성씨의 연원 [1] 이씨의 연원 ○영성이씨(嬴姓李氏) 1.堯임금 때의 大理, 혈연시조 皐陶→嬴姓의 시조 伯益→득성시조 李利貞→정사 최초의 이씨 李耳→지금의 하남성 주구시 鹿邑縣에서 기원함, 隴西李氏, 趙郡李氏 등 ○희성이씨(姬姓李氏) 1.商나라 때 희성의 후예인 巴人이란 사람의 巴子國→板楯蠻→武陵蠻→江夏蠻과 五水蠻→巴人 李氏의 大 成國(成漢) 2.특징: 역대 이씨들 중에는 왕조의 建國者가 많은 것이 특징적임, 12개 왕조 59명의 제왕을 배출함 [2] 왕씨의 연원 ○희성왕씨(姬姓王氏) 1.주나라 文王의 열다섯 번째 아들 畢公高의 후예→京兆, 河間 일대에 많이 거주하였음 2.주나라 平王의 손자 赤의 후예→山西王氏 3.주나라 靈王의 태자 晉의 후예→태원왕씨,..

남한산성 삼전도로 가는길

인조의 45일간의 버티기는 결국 허망하게 끝났다. 군사력이 뒷밪침 되지 않은 허울좋은 주전론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고, 인조는 항복하러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완전히 굴복시켜 뒷배를 찌르지 않도록 하겠다는 청나라의 의도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혀야 했다. 우선 인조와 소현세자는 항복의 의미로 청군의 남색 군복을 입고 내려가야 했고, 산성의 정문인 지화문이 아닌 우익문을 통해서 내려와야만 했다. 행궁의 서인관료들은 한결같이 항복은 안된다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입으로만 전쟁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꽉막힌 사대부들을 청나라는 비웃었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포함하여 50만이 넘는 인질이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위 사진의 길은 행궁을 나와 숭렬전..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 발발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 함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 · 25전쟁을 영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왔으며, 요즘 우리나라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추세에 있다. 한국인들끼리 싸운 내전이면서 동시에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과 여러 유엔 회원국이 싸운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국제적인 호칭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각각 자기들 방식대로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1945년 8월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연합국 도움으로 이룬 해방이었기에 그들 결정에 의한 분단을 받아들일 ..

상속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

상속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 상속은 그 대상에 따라 가계를 계승하는 것과 망자의 재산을 상속하는 두 종류가 있다. 가계계승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초기부터 적장자단독승계법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법제와는 달리 제 자녀윤회봉사 등의 관습이 존재하였으며, ‘주자가례’에 따른 적장자단독봉사는 조선후기에 사회에 확산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호주상속·승계로 이어졌으며, 2005년 민법개정으로 2008년에 폐지되었고, 그 결과 가계계승은 법적제도로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재산상속은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제 자녀균분상속이 관습이었다. 이는 조선후기 제사승계의 중시와 향촌사회에서 가문이 중요해짐에 따라 제사를 주재하는 장자우대상속으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강화되어 195..

병학지남(兵學指南)

병학지남(兵學指南) 간행과 그 내용 1592년 일본침략군이 처음에 진격하여 왔을 때 조선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은 그 원인이 봉건지배 계급의 해이성에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군대 편제의 불비와 그 무기의 졸렬에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592년 이후 조총 기타 무기제조와 아울러 군대편제 및 기예단련에 많은 주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은 군대강화에 관심을 가져 당시 조선에 내원한 명(明)장 이여송(李如松) 휘하에 있던 낙상지(駱尙志)의 권고를 받고 금군 70여 명을 선발하여 명군에게 보내어 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선의 왕 선조(宣祖)는 명장 이여송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자기군대가 왜적에게 위력을 발휘한 것은 척계광(戚繼光)의 저서『기효신서(紀効新書)..

운림리, 용평리 유례

운림리, 용평리 유례(오늘날 함양군 함양읍 소재) 1.운림리의 유래 옛날에 함양군의 부내면 또는 원수면의 마을로 1980년 대까지만 해도 상동이라고 부르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때라 중동과 상동을 합해 상리라 하였으며 1957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상동이라 했다가 1988년 다시 운림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함양읍성의 관아가 관변마을에 있었는데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고 난뒤 문필봉 아래 지금의 운림리로 옮겼다. 마을의 형성은 그 때부터라고 짐작된다. 동헌과 객사 학사루가 있었는데 객사는 근년에 철거하고 학사루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운림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다. 읍성지는 고려 말에 이곳으로 옮겼는데 둘레가 2,200미터로 토성을 쌓았다. 동문을 제운루(齊雲樓) 남문을 망악루(望岳..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백성이었다.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백성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나흘만인 선조25년(1592년) 4월17일.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패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도성(都城) 한양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선조 일행은 4월30일 새벽 서울을 떠나 5월1일 저녁 개성에 도착했다. 선조의 최종 목적지는 요동(遼東), 즉 만주였다. 조선을 버리고 요동에서 살겠다는 것인데, 이를 요동내부 책(遼東內附策)이라고 한다.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의 제후 대접을 받으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때 류성룡(柳成龍)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동토(東土: 조선)에서 한 발짝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게 됩니다"《선조수정실록..

오산(蜈山) 마을 설화

■오산(蜈山) 마을 설화 행정소재지명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 오산(蜈山)마을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경주이씨(慶州李氏) 청호공 이희(李暿)의 손자요. 제학공(提學公) 문환(文換)의 6형제 중 차자(次子)인 현감(縣監) 이흔(李昕)이 성균관대사성에 있다가 1500년경에 도갑사 부근으로 낙향(落鄕)하여 은거(隱居)하다가 현재의 오산마을인 죽림동(竹林洞)에 터를 잡고 죽림당(竹林堂)의 서당(書堂)을 세워 문하생(文下生)을 양성(養成)하였으며 죽림당을 죽림정(竹林亭)으로 개명(改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마을은 성묘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에 지네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지네 오(蜈)자를 써서 오산(蜈山)이라 하였고, 오산마을 골짜기의 후미진 곳이 무릎을 꾸부리는 안쪽 같다하여 오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