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남한산성 삼전도로 가는길

야촌(1) 2014. 11. 24. 19:22

인조의 45일간의 버티기는 결국 허망하게 끝났다.

군사력이 뒷밪침 되지 않은 허울좋은 주전론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고, 인조는 항복하러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완전히 굴복시켜 뒷배를 찌르지 않도록 하겠다는 청나라의 의도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혀야 했다.

우선 인조와 소현세자는 항복의 의미로 청군의 남색 군복을 입고 내려가야 했고, 산성의 정문인 지화문이 아닌 우익문을 통해서 내려와야만 했다.

 

행궁의 서인관료들은 한결같이 항복은 안된다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입으로만 전쟁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꽉막힌 사대부들을 청나라는 비웃었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포함하여 50만이 넘는 인질이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위 사진의 길은 행궁을 나와 숭렬전으로 가는 산길이다. 400년전 인조도 이길을 통해 청군에게 항복하러 갔을 것이다.

 

 

숭렬전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온조왕사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곳이었다. 이는 이곳 남한산성지가 옛 온조 백제의 도읍지라 여겨졌기 때문으로 병자

호란 당시 성에서 죽은 이서장군까지 모시게 되었고 나중에 정조임금이 숭렬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숭렬전 문에서부터 앞에 있는 건물이 이서장군을 모신 사당이고 뒤의 정전이 온조왕 사당이다.

 

사당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담장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언덕위에서나마 이렇게  건물의 구조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 언덕을 조금만 더 올라가면 국청사 터가 나오고 서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이 보인다.

 

우익문을 나와 거여동쪽으로 산길을 내려간다. 문을 나서자마자 시작되는 가파

계단길이 이곳 등산로가 쉽지 않은 곳임을 보여준다.

 

돌계단을 따라 조금만 내려왔는데도 이렇게 바로 아래에 있을 정도의 급경사이다. 

이렇게 길이 험하기에 이곳은 우마가 다닐 수 없고 청나라의 기병대도 이곳으로 접근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거여, 마천을 지나 청의 본진인 삼전도로 가는 최단거리기에 사신들이 이 길을 통해 국서를

교환했었다.

 

산길을 내려오는 길목길목에는 위 사진에서처럼 돌계단도 잘 되어 있고 방책이

되어 있어 걸을만은 했다. 옛날 인조가 이곳을 내려올 때는 한겨울이라 눈이 가

득 쌓여 있었고 변변한 제설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말을 탈 수도 없고 결국 엉금

엉금 기다시피해야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미끄러져 몇번 나뒹굴기까지 했다

하니 눈속을 헤치며 내려오던 인조의 머릿속엔 무슨생각이 흘렀을까...

 

산길을 다 내려오면 바로 마천동 뒷길이고 여기서부터는 평지다. 지금은 다소 어수선한 판잣집이

늘어서있는 이곳에서부터 인조는 청군이 끌고 온 말을 타고 삼전도에 항복하러 달려갔다.

 

산성로는 송파구에서 조성한 어울길인데 요즘 서울에는 이런 길들이 많이있다. 

이 길의 출발은 올림픽공원의 몽천토성에서부터인데 몽천토성을 한바퀴 돌고 산성에 올라가 산

둘레를 한바퀴 다 돌면 9시간이란다...

 

아마 이 코스는 황영조나 이봉주정도 되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마천역에서부터 시작한

산성 오름길도 만만치 않지만 산성 둘레길도 족히 5~6시간은 걸려서 1일코스로는 무리일 듯 싶다.

 

아무튼 삼전도까지 왔다. 삼전도는 지금의 잠실로 바로 석촌호수옆이다. 

산성등산로 입구인 마천역에서부터도 거리가 제법 되고, 도로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지하철로 따로 방문했다.

 

잠실 롯데호텔에서 석촌호수로 길만 건너면 바로 보이는데 매직아일랜드나

아래에 있는 석촌호수 둘레길만 걸어다니지 이곳 삼전도비까지 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태종 홍타이지 황제를 찬양하는 비석답게 그 규모가 제법 된다.

 

삼전도에 있어서 삼전도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황제를 상징하는 용머리장식 아래 한자와 만주어로 새겨져 있다.

 

그나마 위의 큰 글자는 좀 읽을만 하지만 그 아래 실제 비문은 마모가 심해서인지 글자가 잘 안보였다.

삼전도비는 조선후기 내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억압, 병자호란의 치욕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청일전쟁이후 조선에서 청군이 물러가자마자 한강에 비문이 던져지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시대에 이 비문을 다시 꺼내어 삼전도에 세웠는데 이는 우리 역사에서의 긍정적인 부분은 축소 왜곡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확대 강조하던 식민사관의 논리에 의해 일본총독부가 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해방 후 다시 땅속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이후 홍수로 이 비문이 다시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최종적으로 안장되었다고 한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오준이 썼는데 이걸로 인해 이후 서인들에게 두고두고 공격당하게 된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삼배 구고례까지 한 마당에 비문을 지어 올리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힘은 조선에 없었다. 그렇다고 인조가 비문을 직접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경석이 결국 총대를 맸던 것이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서도 다시 청나라 뒤통수치려고 하다 들켜서 다시 호란이 일어날 뻔했는데 이경석이 다 뒤집어쓰고 백마산성에 유폐되면서 전쟁을 면하게 된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었고 인조도 그 공을 인정해 궤장까지 하사했었는데 비문을 지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후 수백년을 공격당하게 된다. 그 일선에 있던 사람이 바로 송시열...

 

원래의 비석밪침으로 제작된 거북상이었는데 크기가 작다고 청나라 사신이 트집잡아 어쩔수 없이

폐기된다.

 

결국 청나라의 간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제작한 거북상이다.

 

크기는 위의 오리지날보다 좀 더 크지만-그렇다 그렇게 많이 큰 것도 아니다.- 좀 더 성의 없어보이고

거북의 머리도 사납다. 억지로 만든 티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니...

 

마지막으로 현절사다. 인조가 항복할 때 청나라는 항복에 반대했던 대신들을 인조가 직접 포박해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입으로는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청군과 직접 싸울 용기는 전혀

없고, 죽을 마음도 없는 대신들을 대신해서-이런 인간들이 정치를 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 윤집, 오달재가 총대를 맸다. 홍익한은 그 이후 청군이 회군하면서 따로 잡혀갔는데 이렇게 희생

  양을 보내면서도 이들의 관직이 낮아 청이 의심할 것이라며 또 이빨질을 해댔다. 그러면 자기들

  이 가던지 말이야...

 

심양에 희생양으로 끌려간 3학사야 그렇다 치고 이빨로만 전쟁했던 김상헌과 정온은 이렇게 충신으로 떠받들여지면서 정작 조정의 안위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던 이경석, 최명길은 이후 조선말까지-어쩌면 지금도...?- 매국노라 욕을 먹어야 했다.

 

그놈의 명분이 무었인지... 교조적으로 변질되어버린 성리학에 취한 조선은 이후 세종조때의 영광을 다시는 누리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 멸망의 출발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라기보다는 병자호란때부터라고 보면 된다. 사실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하는 나라가 광해군때에 어떻게 어떻게 회복해보려 하던 것을 인조가 아무 대안없는 배금정책을 펴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치르며 확인사살해버렸다.

 

미국이 서서히 무너져가며 중국이 떠오르는 요즈음... 명/청 교체기의 조선과 오버랩하는 사람이 많다. 아름답게 재단장된 남한산성을 거닐며 과거를 통해 현재의 빛을 얻는 지혜를 구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3학사는 결국 심양에서 처형되었고 이후 이곳 현절사가 세워지면서 세사람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척화신이었던 김상헌, 정온까지 추가되어 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