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운림리, 용평리 유례

야촌(1) 2014. 11. 2. 22:28

운림리, 용평리 유례(오늘날 함양군 함양읍 소재)

 

1.운림리의 유래

 

옛날에 함양군의 부내면 또는 원수면의 마을로 1980년 대까지만 해도 상동이라고 부르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때라 중동과 상동을 합해 상리라 하였으며 1957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상동이라 했다가 1988년 다시 운림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함양읍성의 관아가 관변마을에 있었는데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고 난뒤 문필봉 아래 지금의 운림리로 옮겼다. 마을의 형성은 그 때부터라고 짐작된다. 동헌과 객사 학사루가 있었는데 객사는 근년에 철거하고 학사루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운림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다.

 

읍성지는 고려 말에 이곳으로 옮겼는데 둘레가 2,200미터로 토성을 쌓았다. 동문을 제운루(齊雲樓) 남문을 망악루(望岳樓) 서문을 청상루(淸商樓)라 하였다. 성벽 나각의 지붕을 풀로 이던 것을 김종직이 기와로 바꿨고 영조때 김광이 석성으로 고쳤다.

 

운림1리 냇가에 혹정자나무가 있고 한들보, 새보가 있어 연을 심어 가꾸던 곳을 연밭머리라 한다. 시비전거리가 있는데 옛날 마을 사람들간에 시비가 있으면 이곳에 모여서 시시비비를 가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전설집 : 우리 고장의 전설 참조).

 

함양제일교 옆에 구장터가 있고 성뒤와 동문거리가 있고 상림 십구인정 옆에 당산이 있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옛 남문이 있던 부근에 학사루가 있는데 원래 함양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학사루는 함양의 상징물이며 신라시대 최치원이 자주 등루하여 시를 읊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꽤 오래된 건물이지만 읍성을 옮길 때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지며 몇 번 불타고 새로 세운 건물로 여겨진다.

 

상림 숲속에는 최고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고 사운정이 있다. 사운정은 고종 때 김득창 박정규 등이 지어 모현정이라 했으나 뒤에 사운정으로 고쳤다. 함양읍성의 남문인 망악루를 이곳으로 옮겨 함화루라 하였으며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있고 함양군에서 삼일운동 당시 이 지방에 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세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2.용평리의 유래

 

용평리는 운림리와 같이 원수면(元水面)의 지역으로 함양읍 소재지의 아래 쪽에 있다고 하여 하동(下洞) 또는 대소리(大召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리라 했다가 1957년에 승격시 다시 하동이라 하엿다가 1988년에 용평리로 동명을 바꾸었다.

 

또 마을을 분구하여 하동1구 하동2구 하동3구로 구분하던 것을 용평리로 되면서 용평1리 용평2리 용평3리 용평4리 용평5리 등 다섯 개의 마을로 분동하엿다. 마을이 조성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으며 운림리보다 역사가 훨씬 짧은 마을이다.

 

운림리는 관청이 많은 반면 용평리는 시장이 있고 상인들이 많아 함양의 경제권이 이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은행도 이 마을에 있고 각종 생산조합도 예식장 음식점 뿐만 아니라 유흥장 오락시설 등도 이 마을에 모여 있다. 

 

따라서 사람도 많이 왕래하며 자동차로 인해 거리가 복잡하고 번화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맨 아래쪽에는 비행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해 있고 그 근처를 아래숲(下林)이라 한다. 

 

그 근거는 옛날 대관림이 십리를 뻗어 있었는데 가운데 도시가 들어서게 되어 위쪽 숲을 상림이라 하고 아래쪽 숲을 하림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림도 집들이 들어서고 나무는 고목나무가 십여 그루만 남아 있다.

 

하림에는 우시장이 있었으나 근래에 두산마을로 옮겨갔다. 함양에서 가장 큰 한들이 있다. 

용평2리 함양교회 뒤쪽에는 옥골목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감옥이 있엇던 곳이라 하여 그 골목을 지금도 옥골목이라고 한다.

 

용평 3리와 4리 쪽에 새장터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운림리 쪽에 시장을 새로 옮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싸전거리는 함양의 3·1독립만세장이기도 하다.

 

1919년 4월 2일 함양 장날을 기하여 김한익 하승현 등이 주동이 되어 3천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김한익 의사는 체포되고 하승현 의사는 일본군 헌병대가 쏜 총탕에 순국했다. 함양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지만 근래에 와서 교산리에 아파트가 많이 생겨 그곳도 무시할 수 없는 마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