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63

조선시대 주요 참고자료

1)第1次 王子의 亂 1398년(太祖 7) 王位繼承權을 둘러싸고 일어난 王子 사이의 싸움. 芳遠의 亂, 鄭道傳의 亂, 戊寅靖社라고도 한다. 李成桂의 朝鮮 開國에 功이 컸고 그가 太祖가 된 뒤에도 信任이 두터웠던 創業功臣 鄭道傳 一派와, 그들에게 못지않은 공을 세운 太祖의 제5王子 芳遠 一派 사이의 權力다툼에서 일어났다. 太祖에게는 8王子가 있었는데, 6王子는 前妃 韓氏 所生이고, 2王子는 繼妃 康氏 所生이었다. 太祖 卽位 後 世子 冊封 問題가 일어나자, 太祖는 繼妃 康氏의 뜻에 따라 太祖의 제8王子인 芳碩을 世子로 삼았는데, 이 같은 措處를 鄭道傳 ·南誾 ·沈孝生 等이 支持하였다. 이렇게 되자 芳遠은 크게 憤慨하였다. 첫째는 前妣 韓氏의 所生이 世子 冊封에서 無視당하였다는 점도 있었으나, 創業功臣으로서의..

朝鮮王朝 年代記

■ 朝鮮王朝 年代記 太祖 李成桂 [1335~1408] 朝鮮의 第1代 王(在位 1392∼1398). 本貫 全州. 字 仲潔(중결). 號 松軒. 姓 李. 諱 成桂. 諡號 至仁啓運聖文(지인계운성문) 神武大王. 咸鏡道 永興 出生. 卽位 後 諱를 旦(단), 字를 君晉으로 고쳤다. 妃는 韓敬敏의 딸 神懿王后, 繼妃는 康允成의 딸 神德王后. 1356년(恭愍王 5) 아버지와 함께 高麗에 來附한 뒤 이듬해 柳仁雨가 雙城摠管府(咸南 永興)를 攻擊할 때 이에 內應하여 功을 세웠고, 後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叛亂을 일으킨 禿魯江萬戶(독로강만호) 朴儀를 討伐하였으며, 같은 해 紅巾賊의 侵入으로 開京이 陷落되자, 다음해 私兵 2,000명을 거느리고 首都 奪還戰에 參加하여 제1着..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들

■ 명성황후 살해 관련자들 ▲명성황후시해전날인 10월7일촬영한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순보사(비밀아지트) 앞에서 촬영한 사진! 일본인 들의 옷이 증명해주고 있다. 한성순보사의 책임자는 바로아다치겐조임! 이들 살인범들은 신문사11명, 순사 8명, 통역관 6명, 상업 5명, 농업 5명, 외교관 3명 겐요사[우익단체] 3명, 교원2명, 무직 2명, 의사 1명, 저술업 1명, 승려 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나이를 보면 50대 2명, 40대 9명, 30대 20명, 20대 16명, 10대 1명입니다. 출신지역은 구마모토 21명, 나가사키 4명, 가고시마 4명, 후쿠오카 4명, 도쿄 2명, 가니기와2명 와카타2명, 시가시마 2명, 지바구치1명, 나가자키1명, 이와테 1명입니다. 아래의 살인자들은 확실히 그 죄악이 나..

의친왕(義親王) - 이강(李堈),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5일) 의친왕은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독립 운동가로 본관은 전주, 이름은 강(堈),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광무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 칭호를 받고 1906년에야 겨우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6년과 1911년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1892년 1월 28일,.,.,../ 의화군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金思濬)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

합천의 역대 수령 명단 - 조선조

■ 합천의 유례 경남 합천은 원래 신라(新羅)의 대량주(大良州)로서 경덕왕(景德王)때 강양군(江陽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高麗)때는 현종(顯宗)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서 즉위(卽位)하고 또 효숙왕후(孝肅王后)의 본향(本鄕)이라는 이유로 해서 지협주사(知陜州事)가 파견되는 지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서는 태종(太宗)때 합천군(陜川郡)으로 개칭하고 진주진관(晋州鎭管)에 소속되었다. 이후 1629년(仁祖 7) 역옥죄인(逆獄罪人)의 태생지(胎生地)라는 이유 때문에 현(縣)으로 강등 되었다가 1644년(仁祖 22) 다시 군(郡)으로 환칭()還稱된 바 있다. 대량(大良), 강양(江陽), 합천(陜州)은 모두 합천의 고명(古名)이며, 이외 고명으로는 대야(大耶)가 있다. 합천읍지(陜川邑誌..

조선사 진기록(朝鮮史珍記錄)

■ 조선사 진기록(朝鮮史珍記錄) ●조선시대 가장 ‘간이 컸던’ 관리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태화(鄭太和-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로 인조 때 영의정에 오른 후 37번이나 사 직상소를 올린 전무 후무한 기록이다. ●가장 오래 재임한 임금은 ? 조선 21대 영조대왕으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를 왕위를 지켰다.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왕은? 문과, 무과, 사마시, 잡과를 포함할 경우 숙종때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 문과시험은? ◇1891년(고종 28) 신묘 증광문과로 무려 78명을 뽑았다. ◇1771년(영조 47) 신묘식년문과 74명 ◇1880년(고종 17) 경진 증광문과 72명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임금은? 조선의 제12대 인종으로 9..

공민왕과 이제현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것을 정하다.

고려사절요 제26권>공민왕 1(恭愍王一) 정유 6년(1357), 원 지정 17년 ● 봄 정월에 왕이 기철(奇轍)등의 의복과 채백(綵帛)을 양부(兩府)에 하사하였는데, 시중 이제현은 공이 없다 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왕이 보우(普愚)를 내전에 맞이하여 황금 50냥과 금선(金線) 한 필을 하사하였다. ● 왕(王)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진전에 배알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의 동(動) 과 정(靜)을 점쳤다. 왕이 옥을 더듬어 정(靜) 자(字)를 얻었는데, 다시 이제현에게 명하여 점치게 하였더니, 곧 동(動) 자를 얻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경이 정결히 재계하여 길한 점을 얻어, 참으로 나의 마음에 부응하였도다." 하였 다. ● 명을 내려 중외(中外)의 학교를..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주다

■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 주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7호 | 20090329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② 정여립 사건 최고 지도자의 콤플렉스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한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콤플렉스에 허우적대다 실패한 정치가로 끝나기 마련이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사림의 지지를 받았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밖으로 표출되면서 무수한 비극이 발생했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 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 무신년(1728, 영조 4)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이인좌(李麟佐 : 1695~1728)의 난은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所論)과 남인(南人)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李麟佐의亂)이라고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배경] 경종(景宗)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肅宗)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蓬命)에게 연잉군(延艀君 : 뒤의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老論) 측은 경종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