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63

인조의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

■ 인조의 ‘원종대왕 만들기’ 프로젝트 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6일-27일) 김진수 js@gimpo.com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유일한 왕능. ‘장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김포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다. 그런데 이 장릉은 실제 왕의 능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죽어서 나중에 왕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이를 추존 혹은 추숭(追崇)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을 말한다. 인조의 아버지, 어머니는 본인들이 원종대왕과 인헌 왕후가 된지도 모른 채 왕릉으로 김포 풍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가 자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대왕으로 추..

“정조 독살설 사료 제대로 안 본건 주류 사학자”

이덕일씨, 유봉학 교수 ‘왜곡’ 주장 반박 “심환지에 보낸 어찰, 되레 독살설의 증거”? “사료를 왜곡, 과장해서 해석했다고 하는데, 사료를 제대로 안 본 것은 오히려 주류 사학자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봤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의 저자 이덕일(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씨가 조선 왕 정조의 ‘독살설’을 강하게 옹호하고 나섰다. 이씨는 자신의 독살설에 대한 유봉학 한신대 교수의 공개 비판( 3월4일치 19면)에 대해 ‘비학문적 공세’라고 반박했다. 정조의 비밀편지가 공개된 뒤 불거진 독살설 논란이 본격적인 학계 논쟁으로 이어질지 관심을 끈다? 이씨는 지난 9일 와 만나 “유 교수를 비롯한 친노론 계열 역사학자들이 정조 어찰을 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이를 입증할..

“조정이 어찌 유학자를 죽이는가” (백호 윤휴-2)

[한겨레21] 백호 윤휴②…송시열에 맞서 예송논쟁에 뛰어들고 북벌을 주창한 전사… 호포제로 백성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학자는 왜 사약을 들어야 했나. ● 이덕일 역사평론가 ↑《영릉(寧陵)》조선 제17대왕 효종(孝宗)의 릉 1659년 북벌 군주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만 40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자청해 북벌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효종은 혈기와 지기(志氣)가 손상될 것이 두려워 내전(內殿)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라며 북벌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은 엉뚱하게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

병자호란 다시읽기(4)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경기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조선 인조(仁祖)와 그의 비 인열왕후의 능인 장릉(長陵). 반정이 라는 정변을 통해 즉위한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追崇)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 계운..

병자호란 다시읽기(8)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남한산성의 장경사(長慶寺).1624년 승려 각성(覺性) 등이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성을 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사찰이다. ●주도면밀..

병자호란 다시읽기(5)

(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덕 일당이 계속 달아나 압록강 쪽으로 갈 기미를 보이자 명은 조선을 끌어들이려 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공경의 도주로를 막고, 군량을 마련하여 추격하는 명 수군에게 공급하라는 요구가 날아들었다. 주문욱은 1633년(인조 11년) 1월부터 수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추격했다. 그는 수차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유덕 일당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가도 등지에 있는 다른 명군 부대와의 협력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3)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 병력을 뽑아 조련시키고,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확보하며, 군량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는 자강(自强)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후금에 복수” 군비 강화론 급부상 1627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인조는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내가 좋아서 오랑캐와 화친했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친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춰 설욕하려는 것이니 그..

병자호란 다시읽기(2)

(31) 모문룡의 작폐. 인조반정 성공 이후 조선이 표방했던 대외정책의 성격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그런데 ‘친명’은 분명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사리 실천할 수 없었다.‘배금’을 실천하려 할 경우 필연적으로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조선의 존망까지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괄의 난을 비롯한 내부 변란을 겪었던 와중에 조선은 후금과 군사적 모험을 벌일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조선이 1627년 후금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毛文龍)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과 가도(椵島)의 동강진(東江鎭)은 인조반정 이후부터 병자호란 직후까지 조선, 명, 후금 삼국관계의 ‘키워드´였다. ↑요동지역 명나라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광녕(현재 요녕성 ..

병자호란 다시읽기(1)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

조선시대 경상도 역편제(驛編制)와 지명.

■ 경상도 역편제(驛編制)와 현재 지명 도(道)---찰방(察訪)---소관역수(所管驛數) 1. 여기서 말하는 도(道)는 경상도 전라도 등과 같은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도(道)가 아니고 우마(牛馬)와 사람들이 다니는 길도(道)자, 즉 길을 가리킨다. 2. 오늘날의 역(驛)을 조선시대에는 원(院)이라고 사용했다. 3.경상도(慶尙道)--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21 개소 金泉驛(김천역) : 김천시 남산동 (김천초교~경찰서사이) 踏溪驛(답계역) :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 답계(댁기)마을 安偃驛(안언역) : 성주군 용암면 상언리 안언마을 茂溪驛(무계역) :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무계마을 安林驛(안림역) : 고령군 쌍림면 秋豊驛(추풍역)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관리 (秋風) 扶桑驛(부상역) : 김천시 남면 부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