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63

박춘(朴春)이 왜군의 포로로 잡혀 적의 장군이 된뒤 본국으로 투항하려하다

■ 임파재인 박춘(朴春)이 왜군의 포로로 잡혀 적의 장군이 된 뒤 본국으로 투항하려하다. [임피재인 박춘피로이위장후후욕투귀본국(臨陂才人朴春被擄而爲將後欲投歸本國)] 글쓴이 : 백사 이항복 임피(臨陂)의 재인(才人) 박세동(朴世同)의 아들 박춘(朴春) 또한 재인이었는데, 그는 임진년의 변란 때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적(賊)에게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공을 쌓아 장수가 되었다. 급기야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적은 박춘을 전봉(前鋒)으로 삼아 군사 천인(千人)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러자 박춘은 전라도(全羅道)로 향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자기 옛 집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리저리 옮겨 싸우면서 곧장 임피(臨陂)의 옛 집을 찾아가 보니, 옛 집은 이미 빈 터가 되어 버렸..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

광교산 전투에 참전한 경주이씨 인물 ◈28世 이호(李浩) - 익재공후 청호공파 남포현감(藍浦縣監)을 역임하고 삼례역(參禮驛). 연서역(延曙驛)의 찰방을 지낸 30世 죽암공(竹菴公) 이송재 (李松齋)의 조부(祖父)이다. 호남 창의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의병으로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 연안이씨) 이 이끄는 왕의 근왕병으로 참전했다.. ◈계대(系代) 21世 청호공 희((暿)→22世 부제학 문환(文換)→23世 상(詳)→24世 동(棟)→25世 효량(効良)→26世 희윤(希 尹)→27世→정(艇)→28世 호(浩)→29世 의규(義奎)→ 30世 죽암공(竹菴公) 송재(松齋 [참고문헌] ◈호남 창의록 -------------------------------------------------------------------..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조의제문(曺繼文〉이 그가 죽은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킨 단초가 되었다. 이 일로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동쪽은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30리, 남쪽은 순천부 경계까지 67리, 곡성현 경계까지 33리, 서쪽은 순창군 경계까지 37리, 옥과현 경계까지 62리, 북쪽은 임실현 경계까지 43리,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70리며 서울까지는 6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중에는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시대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뒤에 당 고종(唐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에 조서하여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그 땅을 합병하였고, 신문왕(神文王) 4년에는 소경(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지금의 이름으로..

조선의 왕별 제위기간

■ 조선국의 왕별 제위기간/1392년-1910년(519년) 대 왕명 제위년도 제위년수 이 름 1대 태조 1392-1398 6년 이성계(李成桂) 2대 정종 1398~1400 2년 이경(李曔) 초명:방과(芳果) 3대 태종 1400-1418 18년 이방원(李芳遠) 4대 세종 1418-1450 32년 이도(李祹) 5대 문종 1450-1452 2년 이향(李(珦) 6대 단종 1452-1455 3년 이홍위(李弘暐). 7대 세조 1455-1468 13년 이유(李(瑈) 8대 예종 1468-1469 1년 이우(李俁). 9대 성종 1469-1494 25년 이혈(李娎) 10대 연산군 1494-1506 12년 이융(李융) 11대 중종 1506-1544 38년 이역(李懌). 12대 인종 1544-1545 1년 이호(李岵) 13대..

조선의 역대왕 재위기간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태조(太祖, 1335~1408) 1392~ 1398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1357~1419) 1398~ 1400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3 태종(太宗, 1369~1422) 1400~ 14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1397~1450) 1418~ 1450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

병자호란 전사자

고종 4년 9월 15일(을축) 원본2718책/탈 초본128책(11/21) 1867년 同治(淸/穆宗) 6 병자년 등에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 보고하라는 계 ■ 병자년 등에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하여 들인다는 홍문관의 계. ○ 홍문관이 아뢰기를, “병자년ㆍ정묘 년에 전사한 사람들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병자록(丙子錄)》 및 《존주휘편(尊周彙編)》의 배신전(陪臣傳) 등 책을 조사하였습니다. 검천(儉川) 싸움에서 공주(公州)의 영장 최진립(崔震立)은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는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홍익(金弘翼)은 직접 수십 명을 찔렀으나..

김종직이 죽은 뒤에 온 무오사화

■ 점필재 김종직이 죽은 뒤에 온 무오사화 성종 20년(1489) 봄 김종직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비록 육조 중에서는 서열이 낮다고 하지만, 세조 공신의 후예나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웠다는 좌리공신(佐理功臣), 왕실의 친인척이 판서 이상 고위직을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에서 쉽게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이때 정국은 가파르게 돌아갔다. 정책의결 및 집행을 담당하는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세력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 중심의 언관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훈구대신과 신진사림의 격돌이었다. 성종도 무척 걱정하였다. "두 호랑이가 싸우는 형국이니 실로 좋지 못하다." 김종직은 노쇠하기도 하였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박감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얼마 후 사임하고 밀양으로 내려갔다...

이경선(李慶善)등에게 표창하게 하다

仁祖 34卷, 15年(1637 丁丑 / 명 숭정(崇禎) 10年) 5月 26日(癸巳) 1번째기사 ■ 비국의 건의로 좌영장 최진립 등에게 표창하게 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세규(鄭世規)가 험천(險川)에서 전투를 치룰 때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을 대동하고 갔는데, 심일민은 힘껏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을 뻔하여 벗어났고, 최진립 이하는 모두 진중에서 죽었습니다. 해조에게 표창하고 증직하게 하고 심일민은 관직을 상으로 주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기호일보(34)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남한산성 주변 여러 곳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대표로 기억되는 사례가 쌍령(雙嶺)리 전투 순국자들의 사당인 정충묘(精忠廟), 남한산성 북문 밖 법화골에는 300명 병사들의 희생 이야기와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전사시킨 유적, 성남에는 충청병사 정세규(鄭世規)가 청군과 전투를 벌여 피가 냇물을 이룬 검천(險川)에 전해 진다. 당시 각지에서 구원병이 출동했으나 작전에 성공하지는 못해 원주영장 권정길(權正吉)이 맨 먼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黔丹)에 들어가 점거했고, 적은 군사로 많은 수의 적을 당해 낼 수 없어 끝내 패해 물러나기는 했으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앉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