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의친왕(義親王) - 이강(李堈),

야촌(1) 2011. 7. 26. 18:40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5일)

 

의친왕은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독립 운동가로 본관은 전주, 이름은 강(堈),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광무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 칭호를 받고 1906년에야 겨우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6년과 1911년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1892년 1월 28일,.,.,../ 의화군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金思濬)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의 게이오 대학교를 거쳐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와 델라웨어 주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부랑자 행세를 하여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항일 독립 투사들과 끊임없이 접촉, 묵묵히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어 곤욕을 치렀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광복 후에도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5년 8월 15일, 서울 성북구의 별저 성락원(城樂苑)에서 타계하였다.

 

의친왕 이강

 

↑사진설명 : 김비의 80세 생일날 모인 의친왕의 후손들.

 

상해로 탈출하다 만주서 붙잡혀...

 

광복후에도 시련 이어져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병탐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 세울 궁리를 했다.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보고 당의 외교부장인 성 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 중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왕의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다. 그 두 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는 대동단 사건이다. 

 

삼일운동이 이러났던 1919년 11월 10일 아침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경찰간부인 지바가 조선 귀족 감시를 맡고 있는 사복 경팔관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제3부 경위반주임이 닥아 와 귓속말로 정보를 전했다. 어제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밤 10시쯤 전하가 살고 있는 저택의 후문 경계를 맡고 있는 시시라는 형사가 키가 큰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중 하나가 전하만 같아 미행을 했는데 이문안명월관 지점께서 놓쳤다는 것이었다.

 

지바는 그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전하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러 든 것이다. 경위하나를 보내어 왕족 감시 담당관인 이왕직의 구로사끼 사무관에게 전하가 집에 계시는지 여부를 확인 시켰다.

 

구로시와는 직접 찾아가 비전하를 뵙고 물었더니 아무 일없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고 행여나 하여 내시를 시켜 결재서류를 들려 보냈더니 결재를 다음으로 미루셨다는 것이었다. 이에 결재를 미룬 것이 전하가 직접 나타나 한말인가 가운데 전한 말인가를 확인했더니 후자라는 것이었다.곧 전하를 직접 본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전하가 상해에 탈출하여 독립 세력에게 업힐 것이라는 정보가 있던 때였는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직접 뵙고 오도록 사무관을 시켰다.비 전하를 맞나 전하를 꼭 뵙게 해달라고 조르자 실토를 했다.「실은 어제밤 전하는 집을 나가셨다」고 .중대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즉시 경무국장으로 하여금 조선 전국은 물론 일본 만주 시베리아 상해에까지 수색 수배령을 내리게 했다.

 

이 탈출 당시상황을 회고하는 의친왕 김(김수덕)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의친왕은 사동궁에 살았는데 사무관이 와 묻길레 낮12시 까지 낮잠 자고 계시다고 사무관을 속이므로 써 탈출을 공모했다고 했다.

 

이 와중에 명월관 지점 주인 황 원균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 기생들로부터 이강전하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집히는 것이 있어 찾아왔다면서 어제 밤 전하는 명월관 까지 왔다가 인력거를 타고 어데 론지 갔다는 것이었다. 

 

그 인력거 인부를 찾아 취조하니 골평동 빈집 앞에서 내려 들였다는 것이었다. 그 빈집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도중 만주 안동 지금 단동에서 경찰정보가 날라 들었다. 전하를 역에서 발견 모 숙소에 연금중이라는 것이었다. 연금까지의 탈출 전말은 이렇다.

 

일본 경찰의 수사로는 전하께서 전혀 탈출 의사가 없는 납치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전하가 돈에 궁한것을 안 전라남도의 한 부호가 남도에 있는 전하의 어장 어업권을 담보로 3만원을 빌려 드리겠다고 대리인이라는 이민하가 접근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전하는 그 돈을 받으러 김삼복이라는 종 하나만을 데리고 명월관을 거쳐 약속장소인 공평동 빈집으로 간 것이다.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민하는 가방을 열어 백원 뭉치를 보여드린 다음 지금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셔야한다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돈뭉치는 백원짜리 한 장만을 위에 얹은 신문오린 쪽지로 판명됐다는 것이다. 

 

그 순간 빈 집에 숨어있던 5∼6명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포위 상해 행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통치비화」중 당시 고위 수사 책임자들의 비화에서 추린 것이다.

 

실은 어장 담보를 구실로 접근 상해 탈출을 모의하여 실천을 약속하는 날에 공평동 빈집에서 만나 5∼6명의 단원에게 경호되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수색역에서 만주행 기차를 탄 것이다. 바로 이민하가 전하를 상해에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행동대인 대동단의 우두머리 전협이다.

 

사실대로 전하가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전하를 감금 법정에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지 않아도 31운동으로 민심이 사나워져 있는 당시 정국을 악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거기에다 중국에 왕족을 받든 망명정부가 계획되어 진행되고, 음을 국민이 알면 민심이 그리로 쏠릴 것이 자명한 일이기에 탈출이 아니라 납치 쪽으로 몰아 갔었 수 밖에 없었음직하다.

 

망국의 백성들은 그 왕조에 대한 동정과 향수가 남다르게 마련이다.「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만월표 고무신」이며 이강 전하께서 손수 틀어 육자배기를 들으신 축음기」 하는 식으로 광고문구에 전하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백성 심정속의 위상을 미루어 잡아볼 수가 있다. 그런 전하를 법정에 세워 재판한다는 정치적 무모를 저지를 만큼 일본제국주의자는 무지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강전하를 여염의 살던 집에 두어두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일이라 삼엄한 경게하에 연금시킬 궁리를 했다. 바로 총독관저구내에 있는 녹천정이라는 작은 집이 있었다. 이또가 술잔치를 즐겨 벌렸던 집으로 당시는 비어있었다. 

 

여기에 연금시켰다가 일본으로 이주시킬 작정으로 모든 공작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하가 끝내 거절하여 일본행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이 의친왕의 탈출 미수가 김비의 가슴에 박힌 첫째 못이요 붙들려온 의친왕은 일본에의 증오심으로 성격이 광폭해졌으며 그 광폭을 정숙과 인내로 잠재워 내린 김비의 시중은 왕실의 부덕으로 구전돼 내리고 있다한다.

 

이강전하의 생모인 장귀인은 이은 전하의 생모인 엄귀인 만큼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하진 못했다. 두 분 다 귀인 시절에 고종의 사랑을 받고 민비의 가공할 질투를 받았는데 엄귀인은 그런 기미만 보이면 야음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여염에 숨어있기를 10여년 하여 결국 을미사변으로 사랑을 쟁취하고 만다.

 

이에 비해 장귀인은 낳은 아들과 더부러 궁밖에 쫓겨나 살다가 가진 혹독한 린치 끝에 죽음을 당한다. 이강은 고아 신세가 되어 민비의 박해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 성장했으며 성장해서는 엄 귀인과 그녀의 소생인 이복 아우 인 이은에 치어 유학이라는 미명으로 본이나 미국에 가 고독한 젊음을 보내야만 했다.

 

미국에 유학했던 1903년 3월1일자 「뉴욕 헤럴드」지는 의친왕이 놀라운 성명을 했다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되어 그의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 한다」고-

 

.이 신문 기사는 당시 의화군 곧 의친왕이 다니고 있던 대학의 여자학부의 활달한 학생 앤지 글라함 양과의 연문 때문에 왕권 계승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추칙하고 있으나 이미 그때에는 엄비 소생의 영친왕 이은에게 후사 없는 순종의 계승권이 건너뛰게 돼있었다.

 

고종을 닮아 무척 성격이 유약했던 그는 이와 같은 고된 환경에 단련되어 성숙하질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 끝에 주색에 깊이 빠져 방탕무뢰하다는 말도 무척 들었다. 그의 큰 아들인 이건은 이렇게 아버지를 회고한다.

 

「아버지는 생활이 문란하기는 했지만 암우한 천성은 아니었다. 일족 중에 머리는 명석한 편이었다. 만약 장 귀인에게 엄 귀인(엄비)만 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생 자신을 둔 주변의 불공평에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 적에는 으레가 한탄하고 슬퍼하였다. 아버지는 이처럼 비극의 사람이었다.」

 

광복 후에도 의친왕의 비극은 멎질 않았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왕실 재산 국유화와 왕족을 천대하는 바람에 정부를 원망하며 등지고 살아야했고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가 돌봐주는 이 없어 먹는 끼니보다 굶는 끼니가 많아 결국 그때 얻은 영양실조로 돌아기시게 된 것이 김 비의 가슴에 박힌 둘째 못이 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