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기자(箕子)의 평양과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

야촌(1) 2012. 2. 1. 09:18

■箕子의 平壤과 高句麗의 平壤 

 

기자(箕子)는 락수(濼水)의 동평양지방(東平壤地方=지금의 永平)과 요수(遼水)의 서평양지방(西平壤地方=지금의 廣寧) 사이의 공지(空地)에 처음 거주(居住)하였다. 후(後)에 자손(子孫)들이 次次 강성(强盛)하여져서 강토(疆土)를 날로 개척(開拓)하여 가자 도읍(都邑)을 동평양지방(東平壤地方=지금의 요양(遼陽)으로 옮겼다.

 

그 후(後) 연나라의 장군(將軍) 진개(秦開)와의 싸움에 패(敗)하여 영주(幽州), 계주(薊州), 역주(易州)의 땅 二千里를 잃었으며 그의 41世孫인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망(亡)하였으니 그 역년(歷年)은 929年이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기씨(箕氏)의 뒤를 계승(繼承)하여 군사(軍士)를 강(强)하게 하고 국토(國土)를 넓혀갔는데 손(孫)인 우거(右渠)에 이르러 한(漢)나라와 서로 싸웠으며 漢나라의 동부도위(東部都尉)인 섭하(涉河)를 살해(殺害) 하였기 때문에 漢나라 무제(武帝)는 그의 장군(將軍) 양복(楊僕), 구체(苟彘)의 무리로 하여금 공격(攻擊)하여 오니 우거(右渠)는 힘을 다하여 항거(抗拒) 하였지만 그의 부하(部下)에게 살해(殺害)되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드디어 위씨(衛氏)를 멸망(滅亡)시키고 그 곳에 사군(四郡)을 설치(設置)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에 의(依)하여 이 사군(四郡)은 다시 수복(收復)되었다.

 

사군은 위씨(衛氏)의 옛 국토(國土)를 전부(全部) 차지한 것이 아니고 그 한쪽구석을 차지한 때문에 열수이남(洌水) 이남은 의연(依然)히 자립(自立)하고 있었던 것이다. 5, 6百年을 경과(經過)하여 수문제(隋文帝)는 중국통일(中國統一)의 위세(威勢)를 계속(繼續)하여 떨치고자 여러 차례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우리나라(韓)에 곤난(困難)을 주었다.

 

임유관(臨渝關)의 싸움에서 한(漢)나라 왕(王)인 양량(楊諒)이 거느린 36萬 대병(大兵)이 일패도지(一敗塗地) 당(當)하여 수양제(隋煬帝)가 그의 뒤를 이어 王으로 즉위(卽位)하고 또다시 군사(軍士)를 크게 일으켜서 우문술(宇文述), 내호아(來護兒), 우중문(宇仲文), 유사용(劉士龍)의 무리로 하여금 수육군(水陸軍) 1,133,800人을 거느리게 하니 호칭(呼稱) 200萬이다. [운수병(運輸兵)을 合하면 400萬이 넘는다]

 

병영(兵營)이 연결(連結)되어 있는 길이가 960里에 이르렀으니 동양(東洋)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일찌기 없었던 대동원(大動員)이라 하겠으며 이들은 모두 구도(九道)로 나누어 출발(出發)하여 평양(平壤)에 모두 집결(集結)토록 하였으니 그 기염(氣焰)이 성대(盛大)하고 장(壯)한 것이 저 페르시아왕 [파사왕(波斯王)] 크세르크세리의 대원군(大遠軍)을 능가(凌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살수(薩水)의 싸움에서 고구려(高句麗)의 왕제(王弟) 건무(建武)와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패(敗)하였다. 

이 살수(薩水)의 싸움에서 수(隋)나라 신세웅(辛世雄) 장군(將軍)이하  100萬의 장군(將軍)과 병졸(兵卒)이 죽었으며 우문술(宇文述) 等이 겨우 죽음을 면(免)하고 도망쳐서 살아갔으니 요하(遼河)를 건너 살아 돌아간 자(者)가 불과(不過) 2700名이었다고 하며 수(隋)나라는 이 싸움으로 인(因)하여 망(亡)하고 말았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원래(原來)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수(隋)나라를 4次에 걸친 실패(失敗)의 치욕(恥辱)을 설욕(雪辱)하겠다고 말하면서 위징(魏徵)의 간언(諫言)도 듣지 아니하고 장량(張亮), 이적(李勣), 설인귀(薛仁貴) 등(等)으로 하여금 15萬3千의 병력(兵力)을 이끌고 길을 나누어 출병(出兵)시켰다.

 

이때에 먼저 요수(遼水)의 다리를 끊어버림으로서 「필사(必死)의 전의(戰意)」를 보이게 하고 승리(勝利)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라도 할 듯하였으나 양군(兩軍)이 진(陣)을 치고 진퇴(進退)를 거듭 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성(城)은 오히려 견고(堅固)하여 빼앗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태종(太宗)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가만히 성중(城中)을 살펴보고는 그 당당(堂堂)하던 기세(氣勢)가 꺽기었음은 물론(勿論) 얼굴 색(色)마저 변(變)하여 버렸다. 마침내는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눈이 맞아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이 실명(失明)으로 인(因)하여 태종(太宗)은 군사(軍士)를 회군(回軍)할 때,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전(敗戰)이 있은 지 얼마 아니 되어 당태종(唐太宗)이 죽으니 당(唐)나라 역사(歷史)에서는 이 사실(事實)을 숨기고 다만 태종(太宗)이 질병(疾病)을 앓다가 그 여독(餘毒)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고구려(高句麗) 하나쯤 멸망(滅亡)시키는 일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物件) 하나를  꺼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큰소리치던 당태종(唐太宗)이 어찌 알았으랴!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가 쏜 화살에 그의 눈이 실명(失明)될 줄을!

 

이것은 고려(高麗)의 목은선생(牧隱先生) 이색(李穡)이 지은 시(詩)이다.

천추(千秋)에 대담(大膽)하시다,  양만춘 장군(楊萬春將軍)이시여

화살은 용(虬) 눈썹을 쏘아 그 눈알을 떨어뜨렸구나!

 

이것은 김삼연(金三淵)이 김창업(金昌業)을 연경(燕京)으로 보내면서 전송(轉送)하는 자리에서 지은 시(詩)의 한 구절(句節)이다. 이색(李穡)은 원(元)나라 말기(末期)의 사람이요. 김삼연(金三)은 청(淸)나라 초기(初期)의 인물(人物)인데 모두 태종(太宗)이 실명(失明)한 사실을 실증(實證)하고 있다.

 

■발해(渤海)와 고려(高麗)

 

그 후, 신라(新羅)는 당(唐)나라 병력(兵力)을 끌어들여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켰다. 비록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공적(功績)은 있으나 동족간(同族間)에 창칼을 나눈지라 강역(疆域)은 축소(縮小)되었다.

 

또 나아가 역사(歷史)속에 피비린내를 풍기 듯, 한 누(累)를 끼치게 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은 신라(新羅)에 귀속(歸屬)한 자(者)가 대부분(大部分)이었으며 고지(故地)를 수복(收復)코자 하는 뜻에서 라당간(羅唐間)의 항쟁(抗爭)이 재연(再演)되었다. 이에 당(唐)나라는 이근행(李謹行),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군사(軍事)를 이끌고 다시 싸움을 벌리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대장(大帳) 문훈(文訓)은 역전(逆戰)하여 당선(唐船) 40艘(소)를 대파(大破)하고 계속(繼續)하여 이근행(李謹行)의 병사(兵士) 20萬을 매소성(買肖城=楊州)에서 파멸(破滅)시키고 전마(戰馬) 삼만필(三萬匹)을 로획(鹵獲)하였다.

 

이에 唐나라는 다시 말갈(靺鞨=勿吉의 轉音)과 연합(聯合)하여 병사(兵事)를 재기(再起) 하였으나 대소전쟁(大小戰爭)의 일곱 번 싸움에서 당병(唐兵)은 모조리 패(敗)하였다. 해를 거듭해 가면서 설인귀(薛仁貴)와 22回나 전투(戰鬪)를 가졌으나 기벌포(伎伐浦)에서 가진 대전(大戰)에서 唐兵은 대패(大敗)하였다. 차후로 부터는 당군(唐軍)이 다시 오지 못하였다.

 

고구려(高句麗)의 후예(後裔)는 발해(渤海)를 高句麗를 계승(繼承)해서 일으키니 발해국(渤海國)은 구강(舊疆)을 수복(收復)하여 오경문물(五京文物)을 찬연(燦然)하게 고루 갖추고 하니 당사(唐史)에서도 동방승국(東方勝國)이라 칭(稱)하였다. 

 

고려(高麗) 4代 광종(光宗, 949~975) 임금은 송(宋)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 960~975 在位年間)과인의(隣誼)가 투텁게 결속(結束)되었기 때문에 글안(契丹)의 화(禍)를 불러들이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일찍이 천수(天授=高麗太祖의 年號) 年間(918~933)에 글안(契丹)은 여러 차례 수호(修好)를 청(請)해 왔으나 고려(高麗)는 거절(拒絶)하고 불허(不許)하였다. 공물(貢物)을 가지고온 낙타(駱駝)는 만부교(萬夫橋) 밑에서 기사(棄死)하도록 하고 사신(使臣)으로 온 사자(使者)는 해도(海島)에 유배(流配)까지 보내니 급기야 성종(成宗) 12年(992)에 글안(契丹)은 숙손령(肅遜寧)이 80萬 大軍을 이끌고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해 왔다.

 

이에 고려(高麗)는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명(命)하였는데 서희(徐熙)는 이를 설전(舌戰)으로서 배척(排斥) 퇴각(退却)시켰다. 그 뒤 다시 「강조(康兆)의 변(變)」(1009)을 틈타 글안(契丹)은 다시 10萬의 兵士를 일으켜 침범(侵犯)해오니 이때 국세(國勢)는 위태(危殆)롭기 짝이 없었으며, 온 나라가 크게 용동(搖動)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은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命하고 강민첨(姜民瞻), 양규(楊規),숙손령(蕭遜寧), 등(等)을 부원수(副元帥)로 命하여 격퇴(擊退)하도록 하였다. 글안(契丹)에서는 소배압(蕭排押), 숙손령(蕭遜寧) 等을 도총(都統)으로 삼고 선전(善戰) 용무(勇武)하였는데 때마침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승계(承繼)를 하여 칭제(稱帝)를 하고 신흥(新興)의 성세(盛勢)를 떨치던 때라 그 세(勢)가 흉맹(凶猛)하였다. 

 

그러나 구주(龜州)의 전역(戰役)에서 하과달해리(河果達海里) 장군((將軍) 이하(以下) 10萬의 글안병력(契丹兵力)이 모두 몰살(沒死)하고 도피(逃避)해서 돌아간 者가 겨우 수천(數千)에 불과(不過)하였다.

 

당시(當時) 강소(姜公)의 계책(計策)을 쓰지 않았다면 온 국민(國民)이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입은 사람(胡風俗)이 되었을 것인데~~~하면서 현종(顯宗)은 강감찬(姜邯贊)을 일러 재조지공(再造之功)이 있다고 이름 지어 극찬(極讚)을 표(表)했다.

 

中國의 二十五史인 『金史』에선 말하기를 속말(粟末)⋅흑수(黑水) 等 말갈부족(靺鞨部族)은 고려(高麗)에 모두 신복(臣服)하고 살았으며, 또 고려(高麗)는 갈란전(曷懒甸)에 구성(九城)을 쌓았다. 고 적고 있다.

 

고려(高麗)는 代代에 걸쳐 어려차례 몽(蒙)⋅원(元)의 화(禍)를 입었으나 그래도 요동(遼東)의 一部는 영유(領有)하고 있었는데 이씨조선(李氏朝鮮)에 이르러 강역(疆城)이 두만(豆滿)⋅압록(押綠)에서 멈추고 말아, 한번 축소(縮小)되고 보니 다시 떨치지 못하고서 위축(萎縮)되고 미약(微弱)해진 채로 오늘까지 연면(連綿)하게 수백년(數百年)이 흘렀다.

 

出典 : 感時漫語(省齋 李始榮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