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조선의 고려역사 지우기

■ 조선의 고려역사 지우기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이덕일

이덕일소장,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 이덕일 박사 기사입력: 2015/08/19 [14:3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최근 정치포털 서프라이즈에 '봄호수'란 이름의 누리꾼이 올린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라는 STB방송 동영상을 보니 이병도를 거의 교주로 여기다시피 떠받드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우리 국민들의 수백억 세금으로 운영되는 역사관련 공공기관이 어떻게 철저히 일제식민지 역사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금도 역사테러를 자행하고 있는지 쉽게 잘 설명하고 있었다.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 강연 모습/ⓒ자주시보 2012년 11월 15일 강연에서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주류인 식민사학자들의 주된 역사 테러는 고대사에 집중..

병자호란(丙子胡亂)

■ 병자호란(丙子胡亂) ▲남한산성안내도 ▲남한산성 수어장대 ● 병자호란 일정 ◈전쟁기간 : 1636년 12월-1637년 1월 ◈장 소 :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전쟁이유 : 조선의 척화배금 외교 ◈결 과 : 청나라의 승리, 조선의 삼전도 굴욕 ● 교전국 ▲조선 국기 ▲청나라 국기 ●전쟁지휘관 청나라 조선국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인조대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김자점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임경업 타타라 잉굴다이 신경원 마푸타 홍명구† 사르후다 김준용 양고리 민영† ●병력 수 청나라 조선국 12만 8000명 정확하지않음 ●피해규모 청나라 조선국 정확하지 않음 정확하지않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선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의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

■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 병자 전쟁을 통해 되짚어봐야 할 점으로 전쟁에 대한 대응 방식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바로 주화론과 척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이 문제는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외교 정책의 결정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분명한 패전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우선 국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이라는 경직된 외교 정책을 취해 전쟁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며, 광해군 때와 인조 때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유화 정책을취하였더라도 청이 쳐들어왔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척화론은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로서 문화적 자부심에 기초한 조선의 주체적 대응이었다고 파악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중원의 패자인 청의..

역대 339명의 ‘경주부윤’ 탐관 보다 목민관 귀감 많아

역대 339명의 ‘경주부윤’ 탐관 보다 목민관 귀감 많아 2015년 01월 23일 [코리아뉴스넷] ↑목민관의 귀감으로, 부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세워진 경주부윤 선정비가 황성공원 안에 남아 있다.ⓒ (주)경주신문사 천년동안 경주의 중심부요 관아의 심장부였던 경주동헌(慶州東軒). 경주의 수장이었던 부윤이 머물렀던 경주읍성의 중심부로 부민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었을 그 곳!. 동부동에 무심히 세워져있는 담배인삼공사 경주지점과 경주상공회의소를 바라본다. 이곳에 경주동헌 ‘일승정(一勝亭)’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를 회고해보면 어찌 깊은 시름과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는 소당 조철제 선생의 표현이다. 조선시대 경주의 행정, 조세, 세무 병무, 사법의 권한뿐만 아니라 문예를 진흥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삼한지에서 배우는 7가지 리더십

삼한지(三韓誌)에서 배우는 7가지 리더십 ■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생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막고 그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영광의 보상을 소실시키지 않기 위해 ‘역사’를 쓴다고 말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그 전쟁의 책임이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전할 목적으로 ‘역사’를 썼다. 키케로는 “역사는 생의 스승이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만일 태어나기 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어린이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동물의 생존방식이 아주 먼 옛날부..

남한산성 삼전도로 가는길

인조의 45일간의 버티기는 결국 허망하게 끝났다. 군사력이 뒷밪침 되지 않은 허울좋은 주전론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고, 인조는 항복하러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완전히 굴복시켜 뒷배를 찌르지 않도록 하겠다는 청나라의 의도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혀야 했다. 우선 인조와 소현세자는 항복의 의미로 청군의 남색 군복을 입고 내려가야 했고, 산성의 정문인 지화문이 아닌 우익문을 통해서 내려와야만 했다. 행궁의 서인관료들은 한결같이 항복은 안된다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지만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입으로만 전쟁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꽉막힌 사대부들을 청나라는 비웃었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포함하여 50만이 넘는 인질이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다. 위 사진의 길은 행궁을 나와 숭렬전..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 발발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 함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 · 25전쟁을 영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왔으며, 요즘 우리나라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추세에 있다. 한국인들끼리 싸운 내전이면서 동시에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과 여러 유엔 회원국이 싸운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국제적인 호칭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각각 자기들 방식대로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1945년 8월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연합국 도움으로 이룬 해방이었기에 그들 결정에 의한 분단을 받아들일 ..

상속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

상속제도는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 상속은 그 대상에 따라 가계를 계승하는 것과 망자의 재산을 상속하는 두 종류가 있다. 가계계승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초기부터 적장자단독승계법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법제와는 달리 제 자녀윤회봉사 등의 관습이 존재하였으며, ‘주자가례’에 따른 적장자단독봉사는 조선후기에 사회에 확산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호주상속·승계로 이어졌으며, 2005년 민법개정으로 2008년에 폐지되었고, 그 결과 가계계승은 법적제도로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재산상속은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제 자녀균분상속이 관습이었다. 이는 조선후기 제사승계의 중시와 향촌사회에서 가문이 중요해짐에 따라 제사를 주재하는 장자우대상속으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강화되어 195..

병학지남(兵學指南)

병학지남(兵學指南) 간행과 그 내용 1592년 일본침략군이 처음에 진격하여 왔을 때 조선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은 그 원인이 봉건지배 계급의 해이성에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군대 편제의 불비와 그 무기의 졸렬에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592년 이후 조총 기타 무기제조와 아울러 군대편제 및 기예단련에 많은 주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柳成龍)은 군대강화에 관심을 가져 당시 조선에 내원한 명(明)장 이여송(李如松) 휘하에 있던 낙상지(駱尙志)의 권고를 받고 금군 70여 명을 선발하여 명군에게 보내어 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선의 왕 선조(宣祖)는 명장 이여송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자기군대가 왜적에게 위력을 발휘한 것은 척계광(戚繼光)의 저서『기효신서(紀効新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