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고려 상락군 김방경장군 묘

↑오른쪽 묘비는 1602년 김방경의 외손인 이시발이 비문을 쓴것이며, 뒷쪽에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시조 김효로 (金孝盧)의 묘이다 묘는 1300년 9월(고려 충렬왕 26)에 조성된 후 약 100년동안 실전되어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입향조 김효로(金孝盧)의 묘를 썼으며, 서기 1594년봄 김효로의 묘 앞에 증손인 근시재 김해(1593년 사망)의 묘를 조성하던 중 『고려충렬공 김방경지묘』라는 지석(誌石)이 출토되어 안동김씨 문중에 이 사실을 알렸고 김해의 묘는 다른곳에 썼다고 한다. 이 묘는 국내에 몇 안되는 고려 중기 묘소이다. 오른쪽 묘비는 1602년 김방경의 외손이 되는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비문을 쓴 것이다. 현재도 광산김씨에서는 입향조 김효로(金孝盧)에 제를 지낼때는 김방경(金方慶)..

兵曹參議 徐文尙 墓表 陰記

先考贈領議政行兵曹參議府君墓表陰記 公諱文尙。字國益。姓徐氏。達城人。我徐自麗朝襲顯宦。爲世家。有諱彌性。始入本朝。魁司馬。官牧使贈達川府院君。子諱居廣。縣監。其季居正。卽四佳文忠公。縣監生諱彭召。掌令贈吏曹參判。子諱固。禮曹參議贈吏曹判書。子諱嶰。有學行蚤歿。贈領議政。寔公高祖。曾祖諱渻。判中樞贈領議政謚忠肅公。宣祖,仁祖兩朝名臣。祖諱景霌。達城尉。考諱貞履。南原府使贈左贊成。妣贈貞敬夫人慶州李氏。判書贈領議政忠翼公諱時發之女。公生於崇禎三年庚午六月十八日戊戌。戊子。成進士。己亥。丁貞敬夫人憂。癸卯。拜內侍敎官。甲辰。遭外艱。丙午。制除。拜洗馬。轉副率。戊申。賜柑泮試居第一。賜第直赴。前後三魁泮試。人以爲難。計仕。陞六品。冬。付別試。參丙科。己酉。始拜衛率。以公內舅李公慶徽長政曹也。尋拜兵曹佐郞。因事罷。明年。因大臣言始敍。屢擬臺司。除命久靳。辛亥。復拜兵曹。遷文學。壬子。改正言。自..

남원부사 서정리 선생 묘표 음기/묘갈명/행장

祖考贈左贊成行南原府使府君墓表陰記 - 孫子 宗泰 撰 府君姓徐。諱貞履。字勉中。系出達城。徐自麗而顯。爲世家。高祖諱固。參議贈吏判。曾祖諱嶰。贈領議政。祖諱渻。判中樞贈領議政謚忠肅。考諱景霌。達城尉。妣貞愼翁主。卽宣祖大王第一女。府君其冢子也。生萬曆己亥八月十八日。癸亥夏。拜宗廟署奉事。不仕。甲子。中司馬。丙寅。復授前職。丁卯。移廣興倉。遷平市直長。戊辰。陞豐儲倉主簿。歷掌隷院司評,工曹佐郞。己巳。拜永春縣監。階大夫。考滿。以治最。留一年。丙子。以翊衛司司禦。扈隨南漢。丁丑。守靑陽。居五年。陞義城縣令。旋又陞淸風郡守。蓋仁廟在潛邸。府君受眷知甚深。二遷皆特命。爲其便養也。癸未。丁外憂。制畢。拜刑曹正郞。遷司僕寺僉正。出爲忠原縣監。忠俗悍。多土豪。府君剸治之不少饒。居三年。竟以評罷。己丑。自軍器寺僉正。拜富平府使。癸巳。遭內艱服闋。復由軍器。拜南原府使。明年。解歸。丁酉。拜工曹正郞。戊..

만퇴헌(晩退軒) 신응구(申應榘)선생 묘지명

■ 만퇴헌 신선생 묘지명(晩退軒申先生墓誌銘) 만퇴헌(晩退軒) 신선생(申先生)의 휘는 응구(應榘), 자는 자방(子方)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고조는 문경공(文景公) 휘 용개(用漑)이고, 증조는 판결사 휘 한(瀚)이며, 조부는 군수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된 휘 여주(汝柱)이다.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휘 벌(橃)이고,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선생은 가정 계축년(1553, 명종8) 11월 21일에 태어났다. 나이 18세에 우계(牛溪)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고, 또 율곡(栗谷) 이 선생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는데, 두 선생이 모두 크게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만력 경진년(1580, 선조13)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섬시 참봉(內贍寺參奉)에 제수되었고, 임오년(1582)에 사마시(..

墓碑銘에 대한 考察

墓碑銘에 대한 考察 1.묘지명(墓誌銘) 지(誌)는 기록한다는 뜻이고 명(銘)은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덕이 있거나 선이 있거나 공렬이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만한 경우에는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물(器物)을 만들고 거기에다 명을 새겨서 영원히 전해지게 하였다. 이를테면 채중랑(蔡中郞)의 문집(文集)에 수록되어 있는 주공숙(朱公叔)의 정명(鼎銘)이 그것이다. 한(漢)나라 두자하(杜子夏)에 이르러 처음으로 글을 새겨 묘소의 곁에다 묻음으로써 드디어 묘지(墓誌)가 있게 되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것을 따랐다. 대개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사람의 세계(世系), 이름과 자, 벼슬, 살았던 마을, 행적과 치적, 살고 간 나이, 죽은 날, 장사한 날과 그의 자손들의 대략을 기술하여 돌..

백제 계백장군 묘(百濟階伯將軍墓)

백제 계백장군 지묘(百濟階伯將軍之墓) ● 계백장군 묘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하였을때, 5천명의 결시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최후를 맞아 묻힌 곳이다.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적국의 노비를 만들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죽여서 비장한 결의를 보인 계백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군사 5만명과 대결하여 4차례에 걸쳐 물리쳤다. 그러나 어린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계백장군의 의로운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은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왔다. 전에는 계백장군 묘라는 것이 밝혀지지는 않고 주민들 사이에서..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

↑1903년 사진 1984년 사진 ■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414년(장수왕 2)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넓이 1.5m, 두께 l.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

옛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다. 이 사진은 1903년에 촬영한 것으로서 조선인이 상투를 털고 망건을 쓰고 팔장을 낀채 눈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비의 크 기를 비교하기 위해 서있다. 만주 지안현(輯安縣)에 거주하는 조선인 묘지기 모습이며, 우리의 역사를 가늠할수 있다(높이 22척. 4면에 1,800여자 의 금석문이 세겨져 있다) ------------------------------------------------------------------------------------------------------------------------------------------- [연합뉴스 2004.08.22 10:08:20] 조선 문화유적 ..

금계필담(錦溪筆談) - KBS 2TV '公主의 남자'

■ 금계필담(錦溪筆談)/ [내용] KBS 2TV '公主의 남자' 기본 스토리(公主的男人 來源)가 수록되어 있는 서유영(徐有英,1801(순조 1-1874(고종 11)의 野談集 墨書 筆寫本 上下卷 2冊 완질본으로 권두에 雲皐 自序, 권말에 庚申(1920년) 十一月 初五日 終筆의 필사기가 있다. [참고] ①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공주의 남자' 부분(公主的男人 來源) 클릭☞ 錦溪筆談중 公主의 男子부분 국한문대역 클릭☞ 錦溪筆談중 公主의 男子부분 완전해석 ② KBS 2TV 公主의 남자' 기본 스토리(公主的男人 來源)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정사에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 만 徐有英(1801-1874)의 에서 '光廟有一公主,弱齡,賢而有德性....'로 시작하여 수 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간의 인연을 기록하고 있는..

장만(張晩) 선생 신도비명 병서 - 장유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신도비명 [병서] (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 輔國崇祿大夫 行 議政府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神道碑銘) [幷序] 금상(今上)께서 천명을 받드신 초기에 조정이 여진(女眞)의 침입을 우려하여 서쪽 변방에 군대를 장기간 주둔시켰는데, 장차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여 보내려 할 때 의논하는 자들 모두가 ‘전 대사마(大司馬) 장공(張公) 이외에는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을 일으켜 세워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았다. 그리고는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친히 교외(郊外)에서 전송하면서 상방(尙方)의 보검(寶劍)을 몸소 내려 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은 평양(平壤)에 사령부를 개설하고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은 영변(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