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장만(張晩) 선생 신도비명 병서 - 장유

야촌(1) 2011. 9. 29. 14:25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신도비명 [병서]
(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 輔國崇祿大夫 行 議政府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神道碑銘) [幷序]

 

금상(今上)께서 천명을 받드신 초기에 조정이 여진(女眞)의 침입을 우려하여 서쪽 변방에 군대를 장기간 주둔시켰는데, 장차 대장군(大將軍)을 임명하여 보내려 할 때 의논하는 자들 모두가 ‘전 대사마(大司馬) 장공(張公) 이외에는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을 일으켜 세워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았다.

 

그리고는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친히 교외(郊外)에서 전송하면서 상방(尙方)의 보검(寶劍)을 몸소 내려 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은 평양(平壤)에 사령부를 개설하고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은 영변(寧邊)에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공이 비록 주장(主將)이긴 하였지만 총괄적으로 지휘만 하였을 다름이요,

 

각 부대의 실제 병력은 모두 이괄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괄이 공(功)을 으스대며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면서 마침내 다른 뜻을 품고는 조정안의 불평분자들과 암암리에 결탁한 뒤 그들로 하여금 내응(內應)토록 하였다.

 

그러던 중 그 음모를 고발하는 일이 있게 되자 이괄이 드디어 귀성 부사(歸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병력이 1만 2천이요, 항왜(降倭) 및 복심(腹心)으로 구성된 결사대의 숫자만도 수백 천인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한창 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직할 부대의 병력이 3천 명에도 차지 못하였는데, 적(賊)이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평양으로 육박해 오지는 못하고 사잇길을 통해 곧장 경성(京城)으로 짓쳐 들어갔다.

 

이에 공이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병력을 이끌고서 적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한편으론 행군하고 한편으론 병력을 수합(收合)하면서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으로 하여금 선봉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첩자(牒者)를 그 사이에 보내 격문(檄文)을 가지고 가서 적의 무리를 효유(曉諭)하게 하였는데, 적의 무리들이 평소부터 공의 위엄과 신의에 심복해 오던 터라 대오를 빠져 나와 공에게 귀의해 오는 자들이 많았다.

 

관군(官軍)이 적과 조우(遭遇)하였으나 전세(戰勢)가 불리하자 병력을 모아 다시 추격을 하였는데, 이에 승세를 타고 냅다 몰아쳐 들어와 임진(臨津)의 방어선까지 무너뜨렸으므로 상이 공산(公山 공주(公州))으로 피하게끔 되었다. 그러자 적이 경성에 들어와 왕자 제(瑅)를 옹립하여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고는 부서별로 관리들을 배치하기까지 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 관군이 이르자 공이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야음(夜陰)을 틈타 진격하여 안령(鞍嶺)을 점거한 뒤 진(陣)을 치게 하였다. 날이 밝아 오자 적이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해 왔는데, 관군이 역전(力戰)하여 크게 격파하자 적의 군대가 크게 무너지면서 이와 함께 이괄과 명련도 부하의 손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것이 실로 갑자년 2월 모일의 일이었다.
대가(大駕)가 도성으로 돌아올 때 공이 서인(庶人)의 복장 차림으로 길옆에 부복하여 스스로 진달하기를 ‘적을 늦게야 소탕하는 바람에 상께서 몽진(蒙塵)하시도록 만들었다.’고 하면서 무거운 형벌을 받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위로하는 유시를 내린 뒤 원훈(元勳)에 책봉을 하고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碣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의 호를 하사하는 한편 품계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올리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한 다음 원수(元帥)의 명호를 개정하여 팔도 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로 하고 송도 유수(松都留守)를 겸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병을 핑계 대고 풍덕(豐德)의 별장으로 돌아간 다음 상장(上章)하는 기회에 사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여 준절하게 책망을 하자 공이 황공한 심정으로 입조(入朝)하여 병조 판서의 직책을 제수 받고 예전처럼 그대로 체찰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묘년 봄에 노이(奴夷)가 대대적으로 침임 해 왔다. 당초 조정에서 호구(胡寇)가 장차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채 변방의 방비책을 조금 소홀히 하자 공이 늘 잘못된 계책이라고 논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변란이 졸지에 일어나고 만 것이었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서관(西關)에 가서 장수들을 독려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그날 바로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당시 제도(諸道)의 군사가 미처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공이 단지 도감(都監)의 병력 수백 명만을 이끌고 떠났는데 가는 도중에 기보(畿輔)의 군사를 수합해 보았으나 그 숫자가 1천 명에도 차지 못하였다.

 

이때 적이 이미 세 곳의 진(鎭)을 잇따라 함락시킨 뒤 승승장구하며 곧장 위로 짓쳐 들어왔는데, 제성(諸城)은 멀리 바라만 보고서도 저절로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었다. 공이 그 즈음 평산(平山)에 이르러서 사태가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는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한곳에 주둔시킨 뒤 적의 예봉(銳鋒)을 피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조정에서 마침 계책을 써서 오랑캐의 마음을 느긋하게 해 주자 오랑캐가 퇴각하였다. 이에 언관이 적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공을 탄핵하자 상이 이르기를, “장모(張某)에게는 적과 싸울 군사조차 없었으니 그의 죄가 아니다.”고 하였으나, 언관들이 더욱 강력히 쟁집(爭執)하였으므로 상이 어쩔 수 없이 공을 부여현(夫餘縣)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이 전역(戰役)에서 공이 맨손으로 대적(大敵)을 맞아 어떻게 지용(智勇)을 발휘해 볼 수가 없었는데도, 언관들이 오히려 법조문만을 고집하면서 그 뒤에까지 문제를 삼았으므로 논자(論者)들 대부분이 공을 위하여 억울하게 생각하였다.

 

겨울철에 이르러 용서를 받고 돌아왔으며 얼마 뒤에 관작(官爵)이 예전대로 복구되었다. 공은 평소 질병을 많이 앓아 왔다. 게다가 역적 이괄을 토벌할 때에 군사들과 함께 한데에서 거하다 보니 왼쪽 눈까지 실명(失明)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적소(謫所)에서 돌아온 뒤부터는 늘 문을 닫아걸고 일체 일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상은 공이 명장(名將)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고 받을 죄가 아닌데도 유배를 당했다고 하여 더욱 두텁게 대우하면서 다시 공을 쓰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공의 질병은 더욱 심해지기만 하였다. 공이 직접 쓴 기사년 춘첩(春帖)을 보면 ‘내 나이 예순넷, 포의로서의 영광 이미 극에 달했도다.

 

첫 번째 소원은 전원 생활이요, 두 번째 소원은 눈을 감는 것. 이 밖에 더 이상 소원 없나니, 신명이 이 마음 비춰 보리라.[吾年六十四 布衣榮己極 上願退田園次願歸冥漠 此外無所求 神明照心曲]’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 그해 11월 모일에 마침내 반송리(盤松里) 자택에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공이 병석에 눕자 상이 날마다 어의(御醫)를 보내어 의약(醫藥)으로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병문안을 오는 자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그러다가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애도를 하며 철조(輟朝)를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였으며 중사(中使)를 보내 조문하는 한편,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 갑인에 풍덕군(豐德郡) 모촌(某村) 모향(某向)의 묘역에 안장(安葬)한 다음,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공의 휘는 만(晚)이요 자는 호고(好古)이다. 태어날 때 기이한 징조가 많이 나타났다 한다.

 

나이 24세 때 생원과 진사 양시(兩試)에 입격하였고, 2년을 지나 신묘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성균관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선발에 뽑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전생서주부, 형조와 예조의 좌랑, 성균관 전적과 직강, 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한 뒤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외방에 나갔다. 봉산군은 서관(西關)의 번화한 길목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 무렵 중국 군대가 왜적(倭賊)을 정벌하느라 한창 왕래하고 있었는데, 대접하는 것이 조금 소홀하기라도 하면 왕왕 수재(守宰)를 결박하고 욕을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많이들 산골짜기에 숨어 몸을 피하곤 하였다.

 

그런데 공이 부임하고 나서는 방편을 써서 접응하며 활달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였으므로 오는 자들마다 모두 그 성의에 만족하면서 감사하는 뜻을 표하고 떠나갔다. 그리하여 사방의 경내가 안온해지면서 고을을 잘 다스리기로 도내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는데, 이 일이 위에 보고되자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라가는 포상을 받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한 뒤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돌아와서는 도승지, 호조 참판, 사간원 대사간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마침 간인(奸人)이 상소하여 선현(先賢)을 무함하면서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 시사(時事)가 마침내 크게 변하자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이로부터 수년간에 걸쳐 공은 안으로 병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내고 외방에 나가서는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정사에 있어 이미 능한 면모를 보여 주었던 만큼 방백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위엄과 은혜를 병행시켜 일이 제대로 거행되게 하면서 백성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고 일컬어졌다.

 

광해(光海) 초에 공이 북쪽 지방에서 4년여의 세월을 보내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마침 관서(關西)의 곤수(閫帥)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조정에서 선발하는 일을 중하게 여겨 ‘공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을 거듭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었다.

 

이에 이 상공 항복(李相公恒福)이 사람을 시켜 공의 뜻을 탐지해 보게 하였는데, 공이 흔쾌히 여기면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자 마침내 공을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곳에 이르자마자 편리하고 온당한 방향으로 군제(軍制)를 개혁하였으므로 관서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당시 여연(閭延) 등 사군(四郡)이 폐지된 지 1백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오랑캐 부족들이 함부로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공이 조종(祖宗)의 강토를 방치해 둔 채 그냥 놔 둘 수는 없다고 여긴 나머지 사람을 보내 가서 살펴보도록 하면서 하나의 공첩(公牒)을 주고 말하기를, “만약 오랑캐와 조우하게 되거든 이것을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라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과연 오랑캐를 만나 결박당한 채 그들의 소굴로 끌려갔는데, 이때 추장(酋長)에게 그 공첩을 꺼내 보여 주니, 그 추장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관인(官人)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 여연(閭延)은 본래 조선 땅인데 우리들이 와서 살고 있으니 그 잘못은 우리 쪽에 있다.” 하고는 즉시 철수해 돌아갔다.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가 거상(居喪)을 마치고 나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조정에 들어와 호조 참판으로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당시로 말하면 권간(權奸)이 위세를 부리면서 걸핏하면 없는 죄를 꾸며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곤 하던 때였다.

 

그런데 급기야 해주(海州)의 무옥(誣獄)이 일어나면서 목사(牧使) 최기(崔沂)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는데, 친척과 고구(古舊)들이 겁에 질린 나머지 감히 문안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이 그를 길에서 맞은 다음 고달픈 처지를 위로하는 한편 앞으로 대옥(對獄)할 때의 말까지 의논해 정해 두었다.

 

그리하여 결국 공은 이 일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한 채 도성 문밖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1년 남짓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서용(敍用)이 되었고, 뒤이어 직질(職秩)이 올라가면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에 우리 군대가 요동(遼東)에 건너갔다가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패몰(敗沒)당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에 즉시 공을 체찰부사(體察副使)로 삼아 떠나게 하자, 공이 역마(驛馬)를 타고 급히 서쪽 요새지로 달려가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고 변방 백성들을 진정시켜 어루만졌다.

 

이와 함께 창성(昌城)이야말로 적과 맞닥뜨리는 요충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절도(節度) 행영(行營)을 창성으로 옮긴 뒤 군사를 엄히 단속하며 방비를 하였으므로 변방의 분위기가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숭정대부로 품계가 일시에 뛰어오르면서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혼주(昏主)의 난정(亂政) 시대로서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에서 제배(除拜)할 적에도 모두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내렸다 올렸다 하였는데, 공만은 홀로 공도(公道)에 입각하여 인사 행정을 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칭송하였으나 권귀(權貴)들만은 더더욱 해치려 들었다.

 

공 역시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휴가를 청하여 평산(平山)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그 기회에 상서(上書)를 하여 당시의 정사를 극론(極論)하였는데, 광해가 크게 노하자 병이 심해졌다고 핑계를 대고는 통진(通津)의 별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계해년에 금상(今上)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시면서 공을 일으켜 세워 원수(元帥)의 명을 받게 하였다. 공은 천성적으로 시원스럽고 활달하였으며 문무(文武)의 재략(才略)을 겸비하였다. 그리하여 권한을 위임받아 제대로 일을 성사시키곤 하였는데 특히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오래도록 병권(兵權)을 잡고 있는 동안 중외(中外)의 무사들 모두가 공의 휘하(麾下)에 예속되었는데, 공이 그들을 한 결 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하고 또 재질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면서, 단속하고 놓아주며 풀어 주고 긴장시키는 것을 각각 타당하게 베풀고, 일이 잘 추진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경우에는 아랫사람들에게 공을 돌리곤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공이 있는 곳에서 쓰임을 받고 싶어 하였다.

 

공은 또 군사를 다스리면서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없었고 자신의 정성을 미루어 일을 위임함으로써 각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였다. 갑자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적의 첩자(諜子)가 와서 염탐하였는데, 공이 그를 붙잡았으나 죽이지 않고 와내(臥內)로 끌어들인 뒤 옷깃을 열어젖혀 가슴을 드러내 보여 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찌를 수 있겠느냐?”하자, 그 사람이 땅에 엎드려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나를 찌를 수 없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겠는가?”하자, 그 사람이 감격하여 울면서 목숨을 바쳐 보답하고 싶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그 사람에게 맡긴 뒤 돌아가서 적들을 효유하게 하였다.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 두 장수가 약간 틈이 벌어졌었는데, 출동할 때에 이르러 공이 충의(忠義)의 정신에 입각해서 권면을 하자 두 장수가 공의 말에 감격한 나머지 형제가 되기로 약속을 하고 끝내 적을 평정하는 공을 이루었다.
공은 사려가 심원하였고 유추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마치 귀신과 같았다.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갈 때 길에서 우연히 공물을 바치러 들어가는 건이(建夷)를 만나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오랑캐들이야말로 끝내 천하의 근심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뒷날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병력 동원을 요청해 오면 우리들이 장차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을축년 여름에 변방의 신하가 잘못 말을 전하기를 ‘모문룡(毛文龍)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조사(詔使)를 죽인 뒤 병력을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습격해 올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조정이 흉흉해하며 공포에 떨었으나 공만은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공의 말대로 되었다.

 

공은 만년에 이르러 병들어 눕는 몸이 되면서 다시 세상일을 담당할 뜻이 없었으나, 논하는 자들 모두가 ‘가령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는 공이 비록 병들었다고는 하지만 누워서라도 제장(諸將)을 지휘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장성(長城)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서로 슬퍼하였다.


공의 선조는 인동(仁同) 사람이다. 증조 모(某)는 모관(某官)으로 모관을 증직받았고, 조부 모는 모관으로 모관을 증직 받았으며, 부친 인정(麟禎)은 모관으로 모관을 증직받았다. 모친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모두 2번 장가들었다. 전부인은 풍천 임씨(豐川任氏)이고 후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인데 모두 아들을 두지 못했다. 임 부인 소생의 딸 하나가 있는데 참찬 최명길(崔鳴吉)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아들이 다섯 있는데 맨 위가 귀한(歸漢)이고 다음이 사한(師漢), 명한(鳴漢), 성한(成漢), 창한(昌漢)이며, 그 밖에 딸이 셋 있다.

 

공을 장사지낸 뒤에 최 참찬(고인의 사위 崔鳴吉)이 직접 행장을 지어 나에게 명(銘)을 부탁해 왔기에 다음과 같이 지어 주었다.

 

위대하다 옥성부원군 / 偉哉玉城
통달한 재주에 드넓은 기국(器局) / 才達器閎
나라의 초석(礎石) 되었도다. / 國之幹楨

 

문과(文科) 통해 진출하여 / 進以文墨
무도(武道)를 겸비하고 / 兼之韜略
거침없이 여유 있게 처리해 나갔도다. / 恢然疏瀹

 

선조대왕 지우(知遇) 받고 / 宣祖知公
한껏 능력 발휘하며 / 歷試奮庸
서울이고 외방이고 두루두루 활약했지 / 于外于中

 

고을을 다스리면 고을이 평안하고 / 治郡郡平
변경을 제압하면 변경이 조용하고 / 按藩藩淸
곤외(閫外)를 책임지면 곤외가 안정됐네. / 制閫閫寧

 

곡절 많은 시운(時運) 만나 / 遘時之陂
낭패도 당하면서 / 或起或躓
걸출한 그 자질 속에다 감춰 뒀지 / 藏我利器

 

성군(聖君)이 즉위하여 / 聖人有作
집에서 공 일으켜 / 起公家食
대원수로 임명했네. / 爰推暢轂

 

공은 이름만 총사령관 / 公尸其名
도적이 병력 장악하고 / 盜柄其兵
모반의 씨앗 끝내 키워 나갔도다. / 遂長奸萌

 

죄악이 흘러넘쳐 / 滔天之孼
도성으로 창(槍) 돌림에 / 長戟指闕
나라의 운명 거의 위태로웠는데 / 國步幾蹷

 

공이 의분심(義奮心) 떨치고서 / 公奮厥義
장수들 독려하여 / 策厲群帥
근왕병(勤王兵) 일으켰네. / 用敵王愾

 

괴수의 몸 찢겨지고 / 大憝旣矺
역 난이 종식됨에 / 逆難旣熄
왕의 위령(威靈) 다시금 밝아졌도다. / 王靈赫赫

 

공신으로 책훈되고 / 冊公之功
최상의 품계(品階)에 빛나는 봉호(封號) / 錫賚進封
더없이 성대하고 드높았어라 / 旣豐而崇

 

공이 늙어 향리에 돌아가고 싶었으나 / 公老欲歸
임금이 극구 만류를 하여 / 明主留之
병조 판서에 몸담았었지 / 爲戎臣師

 

근대의 역사 상고하건대 / 若稽近代
큰 공 세운 유장으로는 / 儒將功大
권공 율(權公慄)이 손꼽히는데 / 權公稱最

 

왜적의 격퇴와 이괄의 소탕 두고 / 却倭翦适
공훈을 한번 매겨 본다면 / 課其勳伐
누가 첫자리를 차지할까 / 孰當第一

 

아, 공의 소원 보건대 / 繄公有祝
그저 조용히 눈을 감는 것 / 願歸冥漠
통달한 이의 면모라 할 것이로다 / 達者之則

 

임금은 충성 사모하고 / 上思其忠
백성은 공덕 기리나니 / 民誦其功
시작도 좋고 끝도 좋았어라 / 善始令終

 

초상화 내걸리고 / 丹靑之形
사책(史冊)에 이름 전하나니 / 竹帛之名
땅속에 묻혔어도 오히려 빛이 나네. / 均而猶生

 

묘비에 새긴 / 墓之有碑
나의 이 명시 / 作我銘詩
영원히 밝게 드리우리라 / 百代昭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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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 輔國崇祿大夫 行 議政府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神道碑銘 幷序

 

今上受命之初。朝廷以女眞爲憂。宿師西鄙。將置大將軍。議者僉曰。無如故大司馬張公。遂起公爲八道都元帥。將行。 上親送之郊。手尙方寶劍以賜之。公開府平壤。而副帥适。鎭寧邊。公雖爲主將。摠節度而已。諸軍之在行者。皆屬於适。适負功驕恣。遂蓄異志。陰結在朝群不逞爲內應。會有發其事者。适遂與龜城府使韓明璉擧兵反。有衆萬有二千。降倭及腹心敢死士數百千人。時公方寢疾。所部兵不滿三千。而賊憚公不敢逼平壤。從間道直趣京城。公遂力疾引兵追賊。且行且收兵。用鄭忠信,南以興爲先鋒。間遣牃者。持檄文諭賊衆。賊衆素服公威信。多散歸公者。官軍遇賊戰不利。聚兵更追。而賊乘勝疾趨。臨津旣失守。 上幸公山。賊入京城。擁王子瑅僭號。署置官吏。越一日。而官軍至。公令諸將。乘夜進據鞍嶺而軍。黎明。賊悉衆來攻。官軍力戰大破之。賊衆大潰。适,明璉爲其下所斬。實甲子二月某日也。 大駕還都。公以庶人服。伏路左。自陳勦賊晩。致 上蒙塵。請伏重辟。 上慰諭之。冊功爲元勳。 賜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號。進階輔國崇祿大夫。封玉城府院君。尋拜議政府右贊成。改元帥號爲八道都體察使。兼松都留守。引疾歸豐德別墅。因上章乞骸骨。 上下敎切責。公惶恐入朝。拜兵曹判書。體察仍故。丁卯春。奴夷大擧入寇。始 朝廷不虞胡寇且至。稍弛邊守禦備。公常論其非計。及是變猝起。 命公赴西關督師。卽日辭行。時諸道兵未及至。公只將都監兵數百人行。收畿輔兵。未能滿千。賊已連陷三鎭。長驅直上。諸城望風自潰。公比至平山。事已無可爲矣。遂斂兵左次。以避其鋒。會 朝廷用計緩虜。虜退。言官劾公不能却賊。 上曰。張某無兵可戰。非其罪也。言者益力。 上不得已命付處于扶餘縣。是役也。公以徒手當大敵。無所施其智勇。而言官猶執文法議其後。論者多爲公稱枉。至冬赦還。俄復舊爵。公素多疾。討賊适時。暴露行間。左目喪明。自謫所還。常杜門謝事。 上以公名將有大勞。非罪被謫。遇之加厚。意欲復用公。而公疾益甚。手題己巳春帖曰。吾年六十四。布衣榮已極。上願退田園。次願歸冥漠。此外無所求。神明照心曲。以是年十一月某日。卒于盤松里第。疾病。 上日遣御醫。操藥視疾。候問者相屬於道。訃聞。震悼輟朝。爲之御素膳者七日。中使臨弔。禮官致祭。有司備物。用明年二月甲寅。禮葬于豐德郡之某村某向之原。 贈領議政。諡曰忠定。公諱晩。字好古。生而多異徵。年二十四。中生員進士兩試。越二年。擢辛卯文科。初隷成均館。改承文院。遂選爲藝文館檢閱。歷官典牲署主簿刑曹禮曹佐郞,成均館典籍直講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出守鳳山郡。郡當西關孔道。屬 天兵征倭。往來旁午。卽供頓稍闕。往往縛辱守宰。多竄伏山谷以避之。及公至方便接應。沛然有裕。至者無不厭其意。咸稱謝而去。四境晏然。治理爲一道最。事 聞。褒陞通政階。拜承政院同副承旨。明年。特陞嘉善大夫。爲忠淸道觀察使。還拜都承旨戶曹參判,司諫院大司諫。會有奸人投疏誣先賢。以激 上怒。而時事遂大變矣。公辭疾去位。尋爲 奏請副使。赴 京師。自是數年中。在內則參判兵刑二曹。出爲全羅咸鏡二道觀察使。公旣長於政事。其爲方伯也。威惠幷行。事擧而人不擾。故所在稱治。光海初。公處北四閱歲而還。會西閫缺帥。朝議重其選。謂非公不可。顧難以重勞公。李相公恒福。使人覵公意。公忻然無難色。遂拜平安道節度使。至卽以便宜改軍制。西民便之。閭,延四郡廢且百餘年。夷種多冒處其中。公謂 祖宗疆土不可棄而不問。使人往視之。授以一公牒曰。卽遇虜。出此示之。果遇虜縛以歸。乃出牒以示其酋。酋曰。此官人不可殺。閭,延本朝鮮地。我人居之。是曲在我。卽輟去。丁太夫人憂去官。制終。拜慶尙道觀察使。入爲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時權奸用事。動以羅織陷人。及海州誣獄起。牧使崔沂被逮。親舊怵迫莫敢問。公迓諸途次。爲勞苦之。且議定對獄辭。坐此削職黜外。歲餘復敍。尋陞秩拜刑曹判書。己未。我師渡遼。沒於深河。擧國震恐。卽用公爲體察副使。公馳傳赴西塞。收集散卒。鎭拊邊民。謂昌城當賊衝。遂移節度行營于昌。嚴兵爲守備。邊情稍安。超陞崇政大夫。拜兵曹判書。時主昏政亂。兩銓除拜。皆隨賄低昂。獨公能秉公道。輿人翕然誦美。而權貴益惎之。公亦知大亂將作。遂請告往浴平山湯泉。因上書極論時政。光海大怒。公稱病甚。歸臥通津別業。其明年爲癸亥。 今上龍興。而公起拜元帥之命。公天資爽豁。有文武才略。能任權濟事。尤長於御衆。久掌兵柄。中外武士。無不隷公麾下。而公待之一以恩信。又能隨才任使。操舍弛張。各得其宜。事推功善。歸之於下。以故人皆樂爲之用。其爲將。未嘗妄殺一人。推誠委人。使各盡其力能。甲子之變。有賊諜來覘。公獲之不殺。引入臥內。披襟示之曰。爾能刺我乎。其人匍匐請命。公曰。卽不能刺我。能爲我用乎。其人感泣願效死。遂草檄付其人。還諭賊中。南,鄭二將微有隙。及出師。公以忠義勖之。二將感公言。約爲兄弟。卒成平賊之功。公識慮深遠。料事懸斷如神。嘗奉使朝 京。道遇建夷之入貢者。語人曰。此虜終爲天下患。異日 天朝徵兵東國。吾輩行且見之。乙丑夏。邊臣訛言毛文龍將反。殺 詔使擧兵襲我。擧朝洶駴。公獨謂必不然。已而如公言。晩節臥病。無復當世意。而論者皆言卽有緩急。公雖病。猶可臥護。諸將聞公之沒。知與不知。皆相弔曰。長城頹矣。公之先仁同人。曾祖某。某官。贈某官。祖某。某官。贈某官。考麟禎。某官。贈某官。妣白川趙氏。贈貞敬夫人。公凡再娶。前夫人豐川任氏。後夫人全義李氏。皆無子。任夫人有一女。適參贊崔鳴吉。側室子五人。長曰歸漢。次曰師漢,鳴漢,成漢,昌漢。女子三人。公旣葬。崔參贊自爲狀。屬銘於維。其詞曰。

 

偉哉玉城。才達器閎。國之榦楨。進以文墨。兼之韜略。恢然疏瀹。 宣祖知公。歷試奮庸。于外于中。治郡郡平。按藩藩淸。制閫閫寧。遘時之陂。或起或躓。藏我利器。聖人有作。起公家食。爰推暢轂。公尸其名。盜柄其兵。遂長奸萌。滔天之孼。長戟指闕。國步幾蹷。公奮厥義。策厲群帥。用敵王愾。大憝旣矺。逆難旣熄。王靈赫赫。冊公之功。錫賚進封。旣豐而崇。公老欲歸。明主留之。爲戎臣師。若稽近代。儒將功大。權公稱最。却倭翦适。課其勳伐。孰當第一。繄公有祝。願歸冥漠。達者之則。上思其忠。民誦其功。善始令終。丹靑之形。竹帛之名。歿而猶生。墓之有碑。作我銘詩。百代昭垂。<끝>

 

출전 : 계곡집[장유(張維)/著>谿谷先生集卷之十三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