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만퇴헌(晩退軒) 신응구(申應榘)선생 묘지명

야촌(1) 2011. 10. 10. 13:26

■ 만퇴헌 신선생 묘지명(晩退軒申先生墓誌銘)

 

만퇴헌(晩退軒) 신선생(申先生)의 휘는 응구(應榘), 자는 자방(子方)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고조는 문경공(文景公) 휘 용개(用漑)이고, 증조는 판결사 휘 한(瀚)이며, 조부는 군수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된 휘 여주(汝柱)이다.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휘 벌(橃)이고,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선생은 가정 계축년(1553, 명종8) 11월 21일에 태어났다. 나이 18세에 우계(牛溪)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고, 또 율곡(栗谷) 이 선생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는데, 두 선생이 모두 크게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만력 경진년(1580, 선조13)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섬시 참봉(內贍寺參奉)에 제수되었고, 임오년(158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또다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고 갑신년(1584)에 특명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을유년(1585)에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었고, 그해 겨울에 6품으로 발탁되어 장원서(掌苑署)를 거쳐 직산 현감(稷山縣監)에 제수되었다. 무자년(1588)에 임실 현감(任實縣監)에 제수되고 계사년(1593, 선조26)에 함열 현감(咸悅縣監)에 제수되었으며, 정유년(1597)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경자년(1600)에 형조 정랑, 한성부 서윤을 거쳐 가을에 이천 부사(利川府使)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602)에 우계 선생이 뭇 소인들의 무함(誣陷)으로 추죄(追罪)를 당하자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두문불출하였다.

 

광해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여 특명으로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자리를 바꾸어 제수되었다. 상소를 올려 우계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체차되어 삭녕 군수(朔寧郡守)에 제수되었고, 경술년(1610)에 나라의 경사로 백관을 추은(推恩)할 때 선생은 왕자 사부의 옛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별히 승진하였다. 봉사(封事) 10조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다.


신해년(1611)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 임자년(1612)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로 익사 공신(翼社功臣)을 책록하면서 선생을 훈적(勳籍)에 넣어 그 사건의 무게를 더하자는 주장에 따라 마침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陞資)하고 영천군(靈川君)에 봉해졌다. 선생이 이를 수치로 여겨 누차 상소를 올려 훈적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계축년(1613)에 고을 일로
권신(權臣)의 감정을 건드리는 바람에 탄핵을 받아 의금부의 심문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 병진년(1616)에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복직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부친 동지공(同知公)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자 규례에 따라 훈봉(勳封)을 제수받았다. 

그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는데, 선생이 탄식하기를,

“강상(綱常)이 없어졌도다. 지난번에 머뭇거리고 떠나지 못한 것은 단지 노친이 살아 계셨기 때문이었다.”

하고는 즉시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남포(藍浦)의 바닷가로 내려가 우거하였다. 그 후 광해군이 누차 불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인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선생의 잘못된 훈봉(勳封)을 바로잡고 형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은대(銀臺)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좌부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경연 석상에서 학문을 관장하고 훌륭한 정치를 구현하는 도리를 강론하였으며, 체차되어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가을에 외직인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가게 되자 언로(言路)에서 조정에 그대로 머물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계 계해년(1623, 인조1) 12월 22일에 임소에서 별세하니, 향년 71세였다.

 

상이 경연 때마다 공을 크게 등용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듬해 2월 11일에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 신향(申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숙부인(淑夫人)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그 왼편에 부장(祔葬)되었다.


선생의 첫째 부인은 관찰사 김제갑(金悌甲)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은 현령 권대훈(權大勳)의 따님으로 딸 둘을 낳았다. 셋째 부인 오씨(吳氏)는 감역(監役) 희문(希文)의 따님으로 정숙한 행실이 있고 남편을 공경하여 여사(女士)라 칭송되었으며,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 양(湸)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을 지냈다. 장녀는 김취백(金就白)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 딸은 형조 판서 이시발(李時發)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소생으로 아들 미(渼)가 있는데, 무과에 급제하고 첨지(僉知)를 지냈다.


아들 제용감 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주부 필상(必相), 이조 참판 익상(翼相), 참봉 우상(遇相)이며, 딸 다섯을 두었는데, 사위는 군수 김광식(金光烒), 구봉익(具鳳翊), 대사헌 이규령(李奎齡), 좌랑 신종화(申宗華), 목사 권세경(權世經)이다.


둘째 사위 형조 판서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와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이며, 딸은 부사 서정리(徐貞履)에게 시집갔다.

 

막내 사위 호조 판서는 아들 셋에 딸 여섯을 두었다. 아들은 군수 이성령(李星齡), 이두령(李斗齡), 진사 이영령(李永齡)이고, 사위는 심약한(沈若漢), 정랑 김홍진(金弘振), 목사 신여식(申汝栻), 참봉 김하진(金夏振), 진사 정상징(鄭尙徵), 김심(金淰)이다.


증손으로는 영(泳), 숙(潚), 제(濟), 윤(潤)이 있으며, 외손은 더욱 번성하고 현달하여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 선생은 강방정대(剛方正大)한 자질을 타고나 효우충신(孝友忠信)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일찌감치 정학(正學)에 종사하여 명망과 실제가 아주 훌륭하였다. 

 

하지만, 겸양의 태도를 견지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출처(出處)를 어찌 감히 사문(師門)에 비견하겠는가.”하였다. 

 

이어 세도(世道)가 땅에 떨어지고 현로(賢路)가 막히자 반평생을 낮은 관직에 전전하였다. 만년에 밝은 세상을 만나 포부를 펼칠 수 있을 듯하였으나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림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애통해하고 추모하였다.


처음에 장남 제용감 정이 가장(家狀)을 지었는데, 사실을 기록함에 직접 알고서 전한 것이 체계를 잘 갖추었다. 김 문정공 상헌(金文正公尙憲)에게 청하여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내외의 정황에 대해 밝혀서 기록한 것이 분명하였다. 

손자 참판공이 또 유사(遺事)를 기록하였는데, 크고 작은 언행들이 모두 기재되어 있다.

 

반남(潘南) 박공 세채(朴公世采)에게 부탁하여 묘표(墓表)를 지었는데, 선생의 덕망과 학문의 본말이 거의 다 언급되었다. 따라서 후세에 선생의 일생을 논하고 선생의 정신을 찾으려 한다면 아마도 이 네 가지 문헌에서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참판공이 아직도 묘지명이 빠졌다 하여 또 나에게 써 달라고 하니, 후생말학(後生末學)이 어찌 감히 어두운 학식과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외람되이 논찬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세계(世系)와 생몰연도와 관력(官歷)과 자손을 격식에 따라 서술하고, 삼가 평소 선친에게 들은 바를 가지고 명(銘)을 지어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 조정 돌보사 / 天眷聖朝
사문을 내려 주시니 / 畀以斯文


도통이 서로 이어져 / 統緖相承
그 근원이 분명하네 / 有的其源


우계 율곡 나오심은 / 牛栗之作
송나라 정자(程子)와 같고 / 若宋河南


영재들이 쫓아다녀 / 英才影從
울창히 숲을 이루었네 / 蔚然成林


아, 우리 선생께서는 / 於惟先生
그 가운데 뛰어난 분 / 特拔乎萃


관대하고 강인하여 / 惟弘惟毅
세운 바가 실로 우뚝한데 / 所立實偉


지위가 덕에 맞지 않고 / 位不稱德
행실이 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네 / 行未措業


아직도 그 유풍이 남아 있어 / 尙有流風
후세에 드리우니 / 可垂來葉


이 무덤에 명을 지어 / 銘玆幽堂
영원토록 밝히리라 / 用昭無極


소자가 어찌 알겠는가 / 小子何知
선친에게 들었노라 / 庭聞是
 
지문(誌文)은 신미년(1691, 숙종17)에 완성되었는데, 4년이 지난 갑술년(1694)에 참판공이 이조 판서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인 을해년(1695)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에 누차 선생을 추증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의 벼슬이 내렸다. 자손에게 복을 남겨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은(追恩)의 명이 내린 것이다. 삼가 지문 아래에 기록하는 바이다.

 

[주01] 나라의 경사 : 왕비의 책봉을 가리킨다. 《光海君日記 2年 5月 17日

 

[주02] 권신(權臣) : 이이첨(李爾瞻)을 가리킨다. 《淸陰集 卷32 承政院左副承旨申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77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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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晩退軒申先生墓誌銘

 

晩退軒申先生諱應榘。字子方。其先高靈人。其高祖曰文景公諱用漑。曾祖曰判決事諱瀚。祖曰郡守 贈參判諱汝柱。考曰同知中樞諱橃。妣曰貞夫人海平尹氏。先生以 嘉靖癸丑十一月廿一日生。年十八。受學于牛溪先生。又遊栗谷李先生之門。兩先生皆期重之。 萬曆庚辰。以學行薦。除內贍參奉。壬午。中司馬。又除 靖陵參奉。癸未。拜王子師傅。甲申。 特命再授。乙酉。除社稷參奉。其冬。擢陞六品。由掌苑。拜稷山縣監。戊子。監任實縣。癸巳。監咸悅縣。丁酉。丁內艱。庚子。歷刑曹正郞,漢城庶尹。秋拜利川府使。壬寅。牛溪先生爲群小所搆誣。至於追罪。遂棄官歸。杜門屛居。光海戊申。拜忠州牧使。以親老乞遞。特命換授廣州。上疏伸牛溪冤。己酉。遞守朔寧郡。庚戌。有國慶。推恩百官。先生以師傅舊勞。特陞通政階。上封事十條。論時務。辛亥。拜工曹參議。又出牧楊州。壬子。以臨海獄。錄翊社勳。有藉先生爲說。以重其事者。遂陞嘉善。封靈川君。先生恥之。屢疏請削不獲。癸丑。以州事觸權倖。被劾。就理削職。丙辰。敍復高陽郡守。未幾。丁同知公憂。服闋。例授勳封。時 大妃遷西宮。先生歎曰。綱常絶矣。向所以遲回者。特以老親故耳。卽上章辭職。流寓于藍浦海曲。光海屢召。竟不還。 仁祖卽位。先生始得改正勳封。拜刑曹參議。俄入銀臺。爲同副承旨。轉至左副。經席論典學圖治之道。遞爲掌隷院判決事。秋。出春川府使。言路請留不能得。 天啓癸亥十二月二十二日。卒于官。壽七十一。 上臨筵。以未及大用爲恨。翌年二月十一日。葬于楊州金村里申向之原。淑夫人海州吳氏。先卒而祔其左。先生初娶觀察使金悌甲之女。再娶縣令權大勳之女。生二女。三娶吳氏。監役希文之女。有淑行。配德克敬。稱以女士。生一男一女。男曰湸。濟用監正。長女適金就白。早歿。次適刑曹判書李時發。季適戶曹判書李基祚。側室一男。曰渼。武科僉知。正三男。曰必相。主簿。翼相。吏曹參判。遇相。參奉。五女壻。曰郡守金光烒。次具鳳翊。次李奎齡。大司憲。申宗華。佐郞。權世經。牧使。刑判二男一女。慶徽。吏曹判書。慶億。左議政。女適府使徐貞履。戶判三男六女。星齡。郡守。斗齡,永齡。進士。女壻。曰沈若漢。次正郞金弘振,牧使申汝栻,參奉金夏振,進士鄭尙徵,金淰。曾孫曰泳。曰潚。曰濟。曰潤。而外出益蕃以顯。多不盡載。嗚呼。先生生稟剛方正大之資。躬篤孝友忠信之行。早從事於正學。望實甚隆。顧以謙卑自牧。嘗曰。吾儕出處。安敢摸擬於師門。仍値世道交喪。賢路否厄。棲遲下位者半世。晩際休明。若可以展其抱負。而遽已告終矣。士林莫不痛惜。而追慕之。始胤子正公。迹家狀。其於志事。知而傳之者備矣。請金文正公尙憲爲碣銘。則其於表裏。闡而志之者著矣。至孫參判公。又記遺事。言行之巨細。畢載矣。屬潘南朴公世采。題墓表。則德學之本末。槩擧矣。後世論先生之世而求先生之蘊者。庶乎於此而徵之矣。參判以誌文尙闕。又俾極記之。後生末學。安敢以昧識陋辭。僭有論撰。唯謹敍世系生卒歷官子姓如法。而謹以平日所聞於先人者。爲之銘以系之。銘曰。

天眷 聖朝。畀以斯文。 統緖相承。有的其源。 牛栗之作。若宋河南。 英才影從。蔚然成林。 於惟先生。特拔乎萃。 惟弘惟毅。所立實偉。 位不稱德。行未措業。 尙有流風。可垂來葉。 銘玆幽堂。用昭無極。 小子何知。庭聞是式。

誌文成於辛未。越四載甲戌。參判公擢陞吏曹判書。明年乙亥。進位右議政。於是累 贈先生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貽厥有慶。有此追 命。謹識于下方。<끝>

 

◇明齋先生遺稿卷之三十七 / 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