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고구려 동명왕릉 비.

■고구려 동명왕릉 비(高勾麗 東明王陵 碑) 동명왕릉비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애초에 동부여의 왕 금와가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나는 하백의 딸인데 이곳으로 쫓겨나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집에다가 거주하게 하였는데 해가 비추었으므로 몸을 끌어다 피했는데도 해가 따라와 비추니 그로 인해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을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애가 알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뛰어나고 영특하였으니 대개 천제의 아들이 해를 타고 내려 왔다고 한다. 7살에 스스로 신이한 지혜로 활을 만들었고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하였다. 장성하게 되어 동부여왕의 여러 아들들이 마음속으로 그의 능력을 해치고자 하여 그것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어머니가 그러한 음..

이계손 비명 병서(李繼孫 碑銘 幷書).

■ 유명조선국 경헌 이공 비명 병서 (有明朝鮮國 敬憲 李公 碑銘 幷序) 일찍 일어나서 일에 공손함[夙興恭事]이 경(敬)이요, 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 재능이 많은 것[博聞多能]이 헌(憲)이다. 전(前)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은 비문(碑文)을 짓고, 아울러 비문의 글씨를 쓰다. 성화(成化) 19년(1483, 성종 14) 9월 기해일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사망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다. 한해 지나서 근신(近臣)이 영안도(永安道)에 왕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 도(道)의 유생이 바친 사부(詞賦)를 올리고, 이어서 이공(李公)이 교화를 일으킨 연유에 대해 말하였다. 성상(聖上)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공을 장려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의논하라고 명하여 특별히 정헌대..

윤임(尹任) 신도비명 병서.

■ 증 영의정 윤공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이름은 임이고 자는 임지이다. 그 선조 윤신달은 파평현 사람이다. 고려 태조를 섬겨 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관평은 여진 사람으로 큰 공을 세워 관직이 태보문하시중 상주국에 올랐다. 이때부터 인물이 더욱 현달하였다. 고조 번(璠)은 판중추부사를 거쳐 파평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이름이 사균(士昀으로 정난좌익공신 판공조사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영평군이다. 조부는 이름이 보(甫)로 공조참판이며 증 영의정 파릉부원군이다. 부친은 이름이 여핗(汝弼)로 정국공신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이다. 모친은 순천부부인 박씨로 적개정난익대공신 판돈녕부사 평양군 증 영의정 중선(仲善)의 따님이다. ..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만] 묘지명 병서

의정부 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묘지명 [병서] 議政府 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墓誌銘 [幷序]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이식 찬(成均館大司成 知製敎 李植 撰)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겨울에 진무(振武)의 원훈(元勳)인 옥성부원군 장공이 한성(漢城) 반송방(盤松坊 >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 지역) 저택에 병들어 눕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고 내복약을 계속 대주게 했으며, 날마다 액정(掖庭)의 감사(監史)를 파견하여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1월 모일(某日)에 결국 공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상이 애도(哀悼)하며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다. 그리고 중관(中官)을 보내 조문(弔問)하고 예관(禮官)에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였으며, 염..

懼菴 禹伏龍 墓碑銘/墓表陰記。

■조선국 통정대부 수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구암 우복룡 묘비병 병서 [생졸년] 우복룡『禹伏龍, 1547년(명종 2) ~ 1613년(광해 5)』 서문을 병기함.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시고 한가한 때면, 문득 동네의 친구 중에 현명한 사람을 들어 칭찬하시면서 꼭 "우 아무개는 대범하고 뛰어난 자질에 예악으로 문체를 꾸몄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 집안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말이었다. 공의 이름은 우복룡(禹伏龍)이고 자는 견길(見吉)이며 호는 구암(懼菴) 이다. 우씨는 세대수가 멀리서부터 내려온다. 고려에서 시중으로 영달한 우중대로부터 5, 6대에 걸쳐 관직이 이어져 무성했다. 공의 증조 우효친은 현령을 지내고 좌통례를 증직받았다. 우효친이 우순좌를 낳았는..

콩쥐팥쥐전

■ 콩쥐팥쥐전 조선 시대 중엽, 전라도 전주 서문 밖에 최만춘이라는 한 퇴직 관리가 아내 조씨와 이십여 년을 같이 살아왔건만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근심하며 기도와 불공도 하고 곤궁한 사람에게 적선도 하였는데, 그러는 사이에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하루는 부부가 신기한 꿈을 얻고 이내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다. 열 달이 차자 갑자기 그윽한 향기가 방 안에 감돌며 문득 한 옥녀를 낳았으니, 딸아이의 이름을 콩쥐라 지어 애지중지 길렀다. 그러나 그 모친의 천명이 그만이었던지 조물주의 시기함인지 콩쥐가 태어난 지 겨 백일 만에 조씨 부인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니, 최만춘은 뜻하지 않게 중년에 홀아비 신세가 되어 버렸다. 만춘은 외롭고 쓸쓸할 때면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린 콩쥐를 안고 다니면서 동네 아낙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 김만중(金萬重) 지음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김만중[金萬重:1637년(인조 15)~1692년(숙종 18)] 지음 조선 숙종 연간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한글로 지은 고대소설. 《남정기(南征記)》라고도 한다. 확실한 창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장희빈(張嬉嬪)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南海島)로 유배, 배소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므로, 숙종 15년(1689)에서 작자가 세상을 뜬 숙종 18년(1692) 사이에 썼을 것으로 본다. 작자는 한국 문학이 마땅히 한글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 한문소설을 배격하고 이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이는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이후 잠잠하던 소설문학에 허균(許筠)의 뒤를 ..

불천위의 제사상에 날고기를 쓰는 연유.

작성일 : 2011. 09. 15 ----------------------------------------------- ■ 불천위의 제사상에 날고기를 쓰는 연유. 家禮 예법에 따르는 백성의 제사는 熟祭가 되고 五禮儀 법도에 의한 제사(廟院포함)는 血祭(생제)가 됩니다. 이에 따라 文廟 예법 역시 五禮儀 예법에 의하여 血祭가 되는데 不遷之位가 되면 文廟에 배향과 祠院 등에 주벽 혹은 배향이 되니 血祭의 예법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나라님으로부터 不遷位의 명을 받게 되면 그의 종손으로 이어지며 百世토록 영원히 봉사하게 되는데 家禮에는 그에 대한 예법은 달리 없습니다. 따라서 熟祭에는 수저가 있고 血祭는 氣를 흠향하기 때문에 수저가 없는 것입니다. ●周禮宗伯禮官之職大宗伯血祭祭社稷五祀五嶽山林川澤註陰祀自血起貴氣..

김태서 묘 - 전주김씨 시조 / 母岳山(794m)

■ 김태서(金台瑞) /전주김씨 시조 [생졸년] 미상∼1257년(고종 44). [고려문과] 명종(明宗) 미상(未詳)년미상(未詳) 명종 시년 미상(試年未詳) --------------------------------------------------------------------------------------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설(金殷說)의 9대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고려 제23대왕)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증조는 김경보(金景輔), 조부는 김세린(金世璘), 부(父)는 김봉모(金鳳毛)이다, 항몽전(抗蒙戰)에서 큰 전공을 세웠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경손(金慶孫)의 아버지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232년(고종 19) 한림학사가 되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