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사진 |
1984년 사진 |
■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414년(장수왕 2)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넓이 1.5m, 두께 l.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중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적었다. 능비는 1880년경에 재발견되었는데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87년경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군 참모 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酒匈景信]에 의해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었다. 또 99년경부터는 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 매매를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감행함으로써, 비면이 마멸되고, 일부 문자가 오독되었다.
현재는 쌍구본이나 석회부도[石灰付塗]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추모왕[鄒牟王-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둘째 부분은 대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셋째 부분은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이 비문에 실려 있는 글은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제2부의 정복기사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형식상 8개 기년기사[紀年記事]와 2개의 종합기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신묘년기사에는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는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신묘년기사>가 있어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은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능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근 100여년간 한국· 중국· 일본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주로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가 능비연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능비를 재발견한 중국에서는 주로 비의 건립연대 고증, 재발견 경위에 대한 보고, 비문의 해독, 비문 서체의 가치 등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역사학적 연구로서의 진전은 보지 못했다.
일본의 비에 대한 연구는 초기의 탁본 과정에서 변조 또는 오독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것은 능비의 신묘년기사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근거로 제시하기 위하여 <왜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는 모순된 견해를 일본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어, 고대 동아시아 교섭사에 있어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려는 기본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0년대 한말에 비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일반적인 능비연구는 정인보[鄭寅普]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서 일본학설에 대한 비판으로 부터 그 연구사적 출발을 가진다.
그 뒤 정인보[鄭寅普]의 학설을 토대로 박시형[朴時亨], 김석형[金錫亨]의 수정·보완된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으며, 이진희[李進熙]의 비문변조설[碑文變造說]은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을 해명하고자 하는 능비 본연의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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