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평양박씨족보 서(平陽朴氏族譜 序)

야촌(1) 2009. 8. 7. 15:55

■ 평양박씨 족보서(平陽朴氏族譜書)

 

《고족성서(古族姓書)》에는 박씨(朴氏)라는 성씨가 없는데, 다만 우리나라에서 신라왕(新羅王) 삼성(三姓) 박(朴)ㆍ석(昔)ㆍ김(金) 가운데 하나가 박씨였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모두 대족(大族)이 되었으니, 평양 박씨가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충원 박씨(忠原 朴氏)는 그 세대(世代)가 워낙 먼 데다 흥체(興替 : 흥성함과 침체함)가 무상하여 또한 상민(常民)으로 강등되어 버린 자도 있다.

 

그 가운데 다만 평양 박 씨가 세상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원종(元宗)과 참판공(參判公) 휘(諱) 팽년(彭年) 때문이다. 평성부원군은 혼주(昏主 :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킴)를 폐(廢)하고 중종(中宗)을 보필해서 기묘년 간(己卯年間)의 문명(文明) 시대를 열었으니 그 공로가 크다 하겠다.

 

그러나 어찌 문장(文章)과 절의(節義)가 우주(宇宙)에서 빛나서 조선(祖先)과 종척(宗戚)들이 모두가 그 광휘(光輝)를 입게 한 참판 공 만 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평양 박 씨는 관작(官爵)의 융성함과 자손(子孫)의 번창함은 비록 타 족(他族)만 못할지라도 남들이 사모하고 존숭하는 것은 도리어 타족 들이 미칠 바가 아닌 것이다.

 

참판공이 죄(罪)에 걸려 멸족(滅族)의 화(禍)를 당할 때, 그 부인(夫人)도 아울러 잡혀갔으나 절개를 온전히 지켰는데, 다행히 유복자(遺腹子)가 있어 신명(神明)이 보호해 줌으로써 수대(數世)를 이어 내려왔다.

 

지금은 조정(朝廷)에서 비록 드러내서 숭보(崇報 융숭하게 보답함)해 주는 일은 없어도 공의 자손(子孫)들을 관직에 등용한 지가 벌써 양세(兩 世)가 되었다. 이제 금산 군수(金山郡守) 숭고(崇古)가 종인(宗人)인 세진(世振)ㆍ세휘(世輝) 등과 함께 자료들을 수습(收拾) 찬집(纂輯)하여 세보(世譜)를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대체로 족보란 세상에 전해서 후세에 고증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평양 박 씨는 이미 타 족(他族)의 미칠 바가 아니고 보면, 이른바 족보란 역시 꼭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인데, 더구나 서문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모두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시 서문이 있어야 한다.」고 하므로 마침내 이렇게 남긴다.

 

숭정 경술년(1670,현종11)중추일(仲秋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 보학 > 족보관련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학연구가 서수용  (0) 2009.09.03
유복지친(有服之親)  (0) 2009.08.25
팔고조도(八 高 祖圖)  (0) 2009.07.28
성균생원(成均生員)이란?  (0) 2009.07.12
선산(단천) 김씨와 족보에 관하여  (0) 2009.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