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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야촌(1) 2009. 7. 18. 03:51

신독재 김집선생 문인록(愼獨齋 金集先生文人錄)

 

윤선거(尹宣擧)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이고, 경술생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아들로서, 생원이며, 관직은 유일로 집의(執義)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봉향되었으며, 문집을 남겼다.
유 계(兪 棨)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고, 정미생이며, 관향은 기계(杞溪)이다. 문과로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정축년에 척화(斥和)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천(林川)의 칠산서원(七山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집을 남겼다.
이 선(李 選)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이고, 관향은 전주(全州)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아들이다. 문과로 이조 참판을 역임했으며 기사년에 귀양지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고, 문집을 남겼다.
윤문거(尹文擧)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이고, 관향은 파평이며, 팔송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관직은 문과로 참판을 지냈고 정축년에 척화(斥和)했으며,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에 봉향되었다.
이 상(李 翔) 자는 운거(雲擧), 호는 타우(打愚)이고, 관향은 우봉(牛峯)이며, 만회당(晚悔堂) 이유겸(李有謙)의 아들이다. 관직은 유일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기사년에 화를 당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고, 문집을 남겼다.
조석윤(趙錫胤)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樂靜)이고, 관향은 배천(白川)이다. 관직은 문과로 이조 참판과 문형(文衡)을 역임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집을 남겼다.
민유중(閔維重)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고, 관향은 여흥(驪興)이다. 관직은 문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냈고,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으로 숙종(肅宗)의 국구(國舅)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기후(宋基厚) 자는 성백(誠伯), 호는 문도재(問道齋)이고, 관향은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의 종질이며, 관직은 유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조 속(趙 涑)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이고, 관향은 풍양(豐壤)이며,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의 아들이다. 관직은 유일로 장령을 지냈고, 서천(舒川)의 명곡서원(鳴谷書院)에 봉향되었다.
한성보(韓聖輔) 관향은 청주(淸州)이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한덕급(韓德及)의 손자이며, 관직은 부윤(府尹)이다.
송광식(宋光栻) 자는 희장(希張)이고, 관향은 은진이다. 동춘당 송준길의 아들이며, 관직은 정랑(正郞)이다.
이세장(李世長) 관향은 경주(慶州)이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다. 관직은 문과로 이조 좌랑을 지냈다.
이상진(李尙眞)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晚庵)이고, 관향은 전의(全義)이며, 참봉 이영선(李榮先)의 아들이다. 관직은 문과로 우상(右相)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전주(全州)의 학봉사(鶴峯祠)에 봉향되었다.
권성원(權聖源) 자는 호연(浩然), 관향은 안동이고, 관직은 문과로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손자가 유일로 좌상을 지낸 권상하(權尙夏)이다.
선우협(鮮于浹) 자는 중윤(仲潤), 호는 돈암(遯庵)이고, 관향은 평양(平壤)이다. 학행(學行)으로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을 제수받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평양의 용곡서원(龍谷書院)에 봉향되었다.
이유겸(李惟謙) 자는 퇴지(退之), 호는 동가(東嘉)이고, 관향은 경주이다. 초려 이유태의 아우이며, 관직은 현감(縣監)이다.
이태연(李泰淵) 자는 정숙(靜叔), 호는 눌재(訥齋)이고, 관향은 한산이다. 삼죽(三竹) 이홍연(李弘淵)의 종제이며, 관직은 문과로 감사(監司)를 지냈다.
송시도(宋時燾) 자는 성보(誠甫)이고, 관향은 은진이다. 우암 송시열의 아우이며, 관직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이다.
이유부(李惟孚) 자는 신지(信之), 호는 동정(東亭)이고, 관향은 경주이다. 초려 이유태의 형이며, 관직은 참봉이다.
송시묵(宋時默) 관향은 은진(恩津)이고, 우암 송시열의 형이며, 관직은 군수이다.
한성익(韓聖翼) 관향은 청주이고, 동지돈녕부사 한덕급의 손자이며, 관직은 판관이다.
이문재(李文載) 호는 석동(石洞)이고, 관향은 전주이다. 천묵재(天默齋) 이상형(李尙馨)의 아들이며, 관직은 참봉이다. - 남원(南原)에서 살았다.
송시걸(宋時杰) 관향은 은진이고, 우암 송시열의 아우이며, 관직은 부사(府使)이다.
이 경(李 憬) 자는 사오(士悟)이고, 관향은 연안(延安)이다. 죽창(竹牕) 이시직(李時稷)의 아들이며, 관직은 감역(監役)이다.
조이숙(趙爾䎘) 자는 경휘(景翬)이고, 관향은 양주(楊州)이다. 시암(時庵) 조상우(趙相禹)의 아들이며, 관직은 호조 좌랑이다.
박세성(朴世城) 관향은 나주(羅州)이고, 군수 박환(朴煥)의 아들이며, 관직은 문과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송기륭(宋基隆) 관향은 은진이고, 우암 송시열의 종질이며, 찰방(察訪) 관직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
이경휘(李慶徽)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춘전(春田)이고, 관향은 경주이며, 관직은 문과로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경억(李慶億) 형조판서(刑曹判書) 벽오(碧梧) 시발(時發)의 아들로 자는 석보(錫甫), 호는 화곡(華谷), 관향은 경주이다. 이조판서 춘전 경휘(慶徽)의 아우로, 관직은 문과, 좌상(左相)을 지냈다.
윤 증(尹 拯)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고, 기사생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며, 관직은 유일로 우상을 지냈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윤 추(尹 推) 자는 자서(子恕), 호는 농은(農隱)이고, 관향은 파평이다. 미촌 윤선거의 아들이며, 관직은 유일로 장령을 지냈다.
유 도(柳 棹) 자는 용제(用濟), 호는 반곡(盤谷)이고, 관향은 문화(文化)이다. 백석(白石) 유집(柳楫)의 아우이며, 관직은 교관(敎官)이다.
이흥직(李興稷) 관향은 한산(韓山)이고, 삼죽(三竹) 이홍연(李弘淵)의 아들이며, 관직은 남양부사이다.
이우직(李虞稷) 관향은 한산이고, 군수 이흥직의 아우이며, 관직은 현감이다.
이기직(李基稷) 관향은 한산이고, 삼죽(三竹) 이홍연(李弘淵)의 둘째 아들이며, 관직은 안산군수이다.
이 옹(李 顒) 자는 백첨(伯瞻)이고, 관향은 경주이다. 초려 이유태의 아들이며, 생원으로 관직은 별좌(別坐)이다.
나성두(羅星斗) 자는 우천(于天)이고, 관향은 안정(安定)이며, 관직은 목사(牧使)이다.
윤경교(尹敬敎) 관향은 파평이고, 미촌 윤선거의 종손이며, 관직은 감사(監司)이다.
최석유(崔碩儒) 자는 도경(道卿)이고, 관향은 해주(海州)이며, 관직은 현감인데, 아들이 영상(領相) 최규서(崔奎瑞)이다.
최석영(崔碩英) 자는 거경(巨卿)이고, 관향은 해주이다. 현감 최석유의 아우이며, 관직은 부사(府使)이다.
김지백(金之白) 호는 담허재(澹虛齋)이고, 관향은 부안(扶安)이다. 관직은 교관(敎官)이며, 남원 육계서원(蓼溪書院)에 봉향되었다. - 남원에서 살았다.
서필원(徐必遠) 자는 재이(載爾), 호는 육곡(六谷)이고, 관향은 부여(扶餘)이며, 관직은 문과로 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동직(李東稷) 자는 순필(舜弼)이고, 관향은 한산(韓山)이다. 삼죽 이홍연의 종질이며, 관직은 감사이다.
유 무(柳 懋) 호는 휴계(休溪)이고, 관향은 문화(文化)이다. 관직은 찰방(察訪)이며, 연산(連山)의 휴정서원(休亭書院)에 봉향되었다.
김정열(金廷說) 자는 숙량(叔良), 호는 어은(漁隱)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진사로 참봉에 추천되었다. - 연산(連山)에서 살았다.
윤 염(尹 掞) 자는 중서(仲舒)이고, 관향은 파평이다. 서윤(庶尹) 윤흡(尹熻)의 손자이며, 관직은 찰방이다.
윤 개(尹 揩) 자는 원례(元禮)이고, 관향은 파평이다. 전부(典簿) 윤희(尹熺)의 손자이며, 진사(進士)이다.
홍주삼(洪柱三) 관향은 풍산(豐山)이고,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손자이며, 관직은 문과로 참판을 지냈다.
유 항(柳 沆) 호는 운강(雲江)이고, 관향은 문화이다. 유성하(柳成廈)의 아들이며, 진사로 관직은 현감이다.
황세정(黃世楨) 본관은 회덕(懷德). 자는 주경(周卿), 호는 제곡(霽谷).조부는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영남(穎男)이고, 父는 덕윤(德潤)이다.벼슬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전 해(田 瀣) 자는 원숙(元叔)이고, 관향은 남양(南陽)이다. 전석규(田錫圭)의 아들이며, 관직은 현감이다.
이유익(李惟益) 자는 익지(益之), 호는 돈곡(遯谷)이고, 관향은 경주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아우이다.
김익렴(金益廉) 호는 요계(了溪)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관직은 문과로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기방(鄭基磅)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자후(子厚), 호는 행은(杏隱).조부는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이고 부친은 군수(郡守)를 지낸 정묵(鄭黙)이다.관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조윤석(趙胤錫)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백승(伯承), 호는 용은(慵隱).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말생(末生)의 후손이며, 증좌찬성 남(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존성(存性)이고, 아버지는 인조의 국구(國舅) 창원(昌遠)이며,관직은 호조참의·예조참의·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 경(申 炅) 호는 화은(華隱)이고, 관향은 평산(平山)이다.
이 적(李 頔) 자는 미중(美仲)이고, 관향은 경주이다. 초려 이유태의 아들이며, 관직은 주부(主簿)이다.
최서림(崔瑞琳) 호는 관곡(寬谷)이고, 태인(泰仁)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봉향되었다.
김성영(金聲永) 호는 송헌(松軒)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만덕(晚德) 김대기(金大器)의 손자이다. - 담양(潭陽)에서 살았다.
송유전(宋有佺) 자는 방형(邦衡)이고, 관향은 진천(鎭川)이다.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의 손자이며, 관직은 군수이다.
이상우(李商雨) 자는 패연(沛然)이고, 관향은 한산(韓山)이다. 참봉 이준성(李畯成)의 조카이며, 관직은 군수이다.
박세지(朴世址) 관향은 나주(羅州)이고, 목사(牧使) 박병(朴炳)의 아들이다.
박세구(朴世耈) 관향은 나주이고, 박휘(朴輝)의 아들이다.
민주범(閔周範) 자는 용오(用五)이고, 관향은 여흥이다. - 임천(林川)에서 살았다.
한여기(韓如琦) 관향은 청주(淸州)이고, 관직은 참봉이다. - 안성(安城)에서 살았다.
박호원(朴浩遠)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천경(天卿), 호(號)는 면헌(勉軒). 충민공(忠民公) 박순(朴淳)의 8대손이다.창경궁 중건(重建)의 편액(扁額)을 썼다.관직은 증 참판(贈 參判)이다.
정 변(丁 邊) 영광(靈光)에서 살았다.
이현로(李玄老) 이성(尼城)에서 살았다.
민양재(閔亮才) 관향이 여흥이다. - 공주(公州)에서 살았다.
유 후(柳 㷞) 진사(進士)이다. - 연산(連山)에서 살았다.
김중창(金重昌) 자는 사순(士順)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삼육재(三六齋) 김정망(金廷望)의 아들이고, 진사이며, 효도로 정려를 받았다. - 은진(恩津)에서 살았다.
김중형(金重亨) 자는 계상(季常), 호는 팔영당(八詠堂)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삼육재 김정망의 아들이다.
김하현(金夏鉉) 자는 기보(器寶)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진사 김자중(金自重)의 아들이고, 진사이며, 관직은 군수이다.
김구영(金久榮) 자는 영로(榮老)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자수(金自粹) 자는 여정(汝精)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진사 김자중의 아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윤상거(尹商擧) 자는 여임(汝任)이고, 관향은 파평이다. 팔송 윤황의 아들이며, 관직은 서윤(庶尹)이다.
김영달(金榮達) 진사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권 준(權 儁) 관직이 현감이다.
송국보(宋國輔) 관향은 은진이고, 판관 송희건(宋希建)의 아들이며, 관직은 현감이다.
이두양(李斗陽)  
민 윤(閔 昀) 관향은 여흥이고, 민대윤(閔大胤)의 아들이다.
김곤수(金坤粹) 자는 수보(粹普)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참봉 김곤원(金坤遠)의 아우이다.
김정면(金廷冕) 관향이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신 성(申 晟) 호는 후촌(後村)이고, 관향은 평산(平山)이다. - 진잠(鎭岑)에서 살았다.
김희영(金喜榮) 자는 인숙(仁叔)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김세걸(金世傑) 자는 여흥(汝興)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김사립(金斯立)의 아들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이석과(李碩果) 관향이 전의(全義)이다.
이 경(李 絅) - 이산(尼山)에서 살았다.
유 형(柳 炯) - 전주에서 살았다.
최 경(崔 勁) 관향은 전주(全州)이고,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아들이며, 관직은 현감이다.
홍우안(洪友顔) 자는 희성(希聖)이고, 관향은 남양(南陽)이며, 홍사도(洪思道)의 아들이다.
유진석(柳震錫) 관직이 참봉이다. - 담양(潭陽)에서 살았다.
황자후(黃自厚) 자는 재백(載伯), 호는 죽유(竹牖)이고, 관향은 우주(紆州)이며, 관직은 참봉이다. - 익산(益山)에서 살았다.
최석우(崔碩佑) 관향이 해주(海州)이다.
홍태래(洪泰來) 관직이 감역(監役)이다. - 이성(尼城)에서 살았다.
한양오(韓養吾) 자는 호연(浩然), 호는 반환정(盤桓亭)이고, 관향은 청주(淸州)이며, 관직은 참봉이다. - 남원(南原)에서 살았다.
조석록(趙錫祿) 자는 형지(亨之)이고, 관향은 배천(白川)이다.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의 종제이고, 관직은 군수이다.
민진량(閔晉亮) 자는 명윤(明允), 호는 난가(爛柯)이고, 관향은 여흥이다. 판서(判書) 민성휘(閔聖徽)의 아들이며, 관직은 목사(牧使)이다.
이신직(李臣稷) 관향은 한산이고,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의 재종손이며, 관직은 군수이다.
조 연(趙 演) 관향은 양주(楊州)이고, 관직은 참봉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송두장(宋斗章)  
한성익(韓聖翊) 관향이 청주이다.
송국신(宋國藎) 관향이 은진이다. - 회덕(懷德)에서 살았다.
이희필(李希苾) 자는 숙청(叔淸)이고, 관향은 전의이며, 도사(都事) 이복길(李復吉)의 아들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이후성(李後晟) 자는 재명(再明)이고, 관향은 가평(加平)이다.
유창한(柳昌漢)  
이후응(李後膺) 자는 사규(士規)이고, 관향은 가평이다.
김진성(金震聲) 자는 성백(成伯)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진사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한여태(韓如泰) 관향이 청주이다.
한극인(韓克寅) 관향이 청주이다.
이백규(李百揆)  
김곤서(金坤瑞) 자는 사상(士祥)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필성(金必聲) 자는 명백(鳴伯)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문성(金聞聲) 자는 여명(汝鳴)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백이수(白以水)  
김성진(金聲振)  
김세성(金世聲) 자는 청원(聽遠)이고, 기사생이며, 군수 김현(金灦)의 종손(從孫)으로, 관향은 광산이다.
이 관(李 寬)  
유 흡(柳 熻)  
이 식(李 湜) 자는 취숙(就叔)이고, 관향은 가평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안종희(安宗喜) 자는 원경(元慶)이고, 관향은 순흥(順興)이다. 호군(護軍) 안적(安績)의 아들이며, 관직은 승지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안중희(安仲喜) 자는 중경(仲慶)이고, 안종희의 아우이다.
김두갑(金斗甲) - 일명은 두인(斗仁)이다. -자는 인서(仁瑞), 호는 수암(壽巖)이고, 관향은 김해(金海)이다. 증 참판(贈參判) 김홍(金弘)의 아들로서, 병자년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 나주(羅州)에서 살았다.
안필원(安必遠) 관향이 순흥(順興)이다.
이유복(李惟復) 관향은 경주이고,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종제이다.
김여옥(金汝玉)  
박이성(朴以星)  
이귀민(李貴民)  
김 기(金 機)  
안정흡(安廷熻) 관향이 순흥이다.
한취업(韓就業)  
이유제(李惟濟) 관향은 경주, 국당공(菊堂公) 천(蒨)의 후손, 승지(承旨) 대방(大邦)의 손자 부호군(副護軍) 오(晤)의 아들이다.
이상익(李尙益)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소헌(素軒). 이약동(李約東)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흥선이다. 동생 상필(尙苾)과 함께 신독재의 문인이고 형제가 모두 김천 지역에서 효행을 행하였다.1622년(현종 2) 방백의 효천(孝薦)으로 조정에서 공양미를 내렸다. 그리고 1707년(숙종 33) 조정에서 호조좌랑에 증직하였다.
홍지해(洪之海) 자는 대호(大浩), 호는 노동재(魯東齋)이고, 무신생이다. 관향은 남양(南陽)이고, 관직은 감역이다.
박홍우(朴鴻遇) 관향이 무안(務安)이다.
박홍규(朴鴻逵) 관향이 무안이다.
이희명(李希蓂) 관향이 전의(全義)이다.
최준성(崔俊成)  
이계영(李繼榮)  
정지흡(鄭之熻)  
홍 석(洪 錫) 호가 손우당(遜愚堂)이다.
이선기(李善基) 관직이 군수이다.
한성신(韓聖臣)  
박호언(朴浩彦)  
김남식(金南式) 자는 군언(君彦), 호는 의촌(義村)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증 지평(贈持平) 김여성(金汝聲)의 아들이다. 병자년에 창의(倡義)하고 이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칭했는데, 그에게 특별히 이조 참의가 추증되었다. - 고부(古阜)에서 살았다.
김내창(金來昌)  
박세기(朴世耆) 관향이 나주(羅州)이다.
안 적(安 績) - 일명은 우(宇)이다. -자는 대유(大有), 호는 사필당(四必堂)이고, 관향은 순흥이다. 안경흥(安景興)의 아들이며, 관직은 호군(護軍)이다.
이오륜(李五倫) 호는 화산처사(花山處士)이고, 관향은 전주이다. 참봉 이봉주(李鳳柱)의 아들이며, 관직은 참봉이다.
김희진(金希振) 자는 백기(伯起)이고, 관향은 안동(安東)이다.
최 담(崔 曇)  
이석록(李錫祿) 관직이 찰방이다.
정지증(鄭志曾) 자가 노부(魯夫)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진영(金振榮) 관향이 광산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수환(金守煥) 자는 군회(君晦)이고, 진사이다. - 은진(恩津)에서 살았다.
정만세(鄭晚世) 관향은 하동(河東)이고, 진사이다. - 부여에서 살았다.
김이사(金履四) 자는 사행(士行)이고, 관향은 광산이다. - 담양에서 살았다.
임계욱(林啓旭) 진사이다. - 부여에서 살았다.
홍우주(洪友周) 자는 계성(繼性)이고, 관향은 남양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유경한(柳景漢) 관향이 문화(文化)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민성재(閔聖才) 관향이 여흥이다. - 공주(公州)에서 살았다.
김덕린(金德麟) 자는 언길(彦吉), 을유생이고, 호는 삼외재(三畏齋)이며, 관향은 경주(慶州)이다. 임진왜란의 원종공신 김홍운(金鴻運)의 아들로서, 병자년 이후로 벼슬하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를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칭한다. - 영광(靈光)에서 살았다.
이 량(李 湸) 자는 잠부(潛夫)이고, 관향은 가평(加平)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김 오(金 浯) 자는 중원(仲源), 호는 칠매당(七梅堂)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진사이다. - 광주(光州)에서 살았다.
안재도(安載道) 자는 면숙(勉叔), 호는 백계(白溪)이고, 관향은 순흥이며, 정축생으로, 주부(主簿) 안삼석(安三錫)의 아들이다. 남원의 남계사(藍溪祠)에 봉향되었다. - 남원에서 살았다.
신희달(申希達) 자는 여명(汝明), 호는 덕촌(德村)이고, 경인생이며, 관향은 평산(平山)이다. 참봉 신철수(申鐵壽)의 아들이며, 관직은 동지중추부사이다. - 연산에서 살았다.
조 혼(曺 混) 자는 도원(道源)이고, 관향은 창녕(昌寧)이며, 참봉 조부(曺溥)의 아우이다. - 창평(昌平)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