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76

민사평 묘지명 병서(閔思平 墓誌銘 幷序)

급암집[閔思平]- 묘지명 이 묘지명은 찬인 이달충(李達衷)의 문집『제정집(霽亭集)』권3과 『동문선(東文選)』권125에 실려 있으며,1359년(공민왕 8)에 이달충이 지었다. ■ 문온공 민사평 묘지명 병서 (文溫公 閔思平 墓誌銘 幷序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 공신 중대광 도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시 문온공 민공 묘지명 병서 광록대부 호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 이달충이 짓다.[高麗故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贈諡文溫公閔公墓誌銘 幷序 光祿大夫戶部尙書翰林學士知制誥李達衷譔] 이달충(李達衷) 撰 내가 어려서 대인(大人)선생의 문하에서 배울 때 모시고 담론을 하였는데, 사풍(士風)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어허’ 하고 탄식하며 “지금이 옛날만 못하..

윤언이 묘지명 병서(尹彦頤 墓誌銘 幷序)

■ 문강공 윤언이 묘지명 병서 (文康公 尹彦頤 墓誌銘 幷序) 중서시랑평장(中書侍郞平章) 문강공(文康公) 묘지명과 서문조청대부 우산기상시 한림학사 지제고(朝請大夫 右散騎常侍 翰林學士 知制誥)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자의(金子儀) 지음 황통(皇統) 8년(1148, 의종 2)에 임금이 바야흐로 덕망이 높은 원로에게 정권을 맡기고자 하여, 12월에 조서(制誥)를 내려 공을 은청광록대부 정당문학 판상서형부사(銀靑光祿大夫 政堂文學 判尙書刑部事)로 삼았다. 내려진 은혜가 두터웠으므로 공은 공손히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관직에 나가 도를 논하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려서, 나라 안으로는 백관을 바로잡고 나라 밖으로는 사이(四夷)를 다스려서 왕도가 다시 행해지니, 만세(..

충경공 정백형 묘지명(忠景公 鄭百亨 墓誌銘)/벽오 이시발의 둘째 사위

기언 별집 제21권 - 미수 허목 저 구묘문(丘墓文) ■정 장령(鄭 掌令)의 묘지명(墓誌銘) 공은 휘는 백형(百亨), 자는 덕후(德後), 성은 정씨(鄭氏)로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세종조의 명신(名臣)으로 정척(鄭陟)이란 분이 있었는데, 문학으로 가문을 일으켜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가 되었고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작고한 뒤에는 시호를 공대(恭戴)라고 하였다. 학사(學士)는 승지 정성근(鄭誠謹)을 낳았는데, 그는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폐주(廢主)의 미움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 정주신(鄭舟臣)은 승문원 박사인데, 아버지가 비명(非命)에 돌아가심을 원통히 여겨 음식을 먹지 않고 너무도 슬퍼하다 죽었는데, 공에게는 3세조(고조)가 된다. 중종 때에 모두 충신(忠臣)으로 정문을 세워 ..

회헌 안향선생 묘지명(晦軒安珦先生墓誌銘)

안문성공 회헌(안향)선생 묘지명 (安文成公 晦軒(安珦)先生墓誌銘) 14대손 府使(부사) 安應昌(안응창) 공의 성(性)은 안(安)이요. 처음 휘는 유(有)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후의 족보와 역사책에 모두 표덕(表德,자(字)를 가리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 조선(朝鮮)조에 들어와 현종(顯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처음 이름으로 쓰고 있으며,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칭하였다. 선계는 경상도(慶尙道) 순흥부(順興府)(현재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에서 나왔다. 증조(曾祖)는 자미(子美)인데 보승별장(保勝別將)으로 신호위 상호군(神號衛 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조고(祖考)는 영유(永儒)인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부(孚)인데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

최문도묘지명 병서(崔文度墓誌銘幷序)

■ 제액(題額) : 최 양경공(崔 良敬公) 묘지명 병서. ◈시대 : 고려 ◈연대 : 1345년(충목왕 1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크기 : 세로 88cm, 가로 54cm, 두께 5cm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이제현(李齊賢) . 미상 . 미상 ◈개요 최문도(崔文度 : 1292(충렬왕 18)~1345(충목왕 1)의 자는 희민(羲民)이고 호는 춘헌(春軒)이다. 아버지는 광양군(光陽君) 성지(誠之)이고, 어머니는 찬성사 대제학(賛成事 大提學)으로 치사(致仕)한 김훤(金晅)의 딸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얻어 기밀을 관장하고 인사를 전담한 것이 20여년이 되었으나, 교만하지 않고 학문에 부지런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벼슬이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호군(匡靖大夫 都僉議叅理 上護軍..

나익희 묘지명(羅益禧墓誌銘, 1227?~1344)

◈시대 : 고려 ◈연대 : 甲申 1344년(충혜왕 5)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 : 비지정 ◈찬자/서자/각자 : 이제현(李齊賢) / 미상 / 미상 ◈개요 묘지명은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되어 있고, 이제현(李齊賢)이 1344년(충목왕 즉위)에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나익희(羅益禧 : 1271(원종 12)~1344(충목왕 원년)는 나주(羅州)가 본관이며,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총례(聰禮)의 11대 손이다. 증조는 효전(孝全), 조부는 득황(得璜), 아버지는 유(裕)이며 어머니는 조문주(趙文柱)의 딸인 조씨이다. 무반 가문으로, 본인 역시 고려와 원나라에서 대부분 무신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나익희는 충선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하..

청천 신유한 선생 묘지명 병서

靑泉 申維翰先生 墓誌銘[李瀰] 幷序 嶺之南。多名山水。淑氣之鍾於人者。必生瓌偉碩德之士。如近世靑泉申公是已。公諱維翰。字周伯。申氏本壯節公諱崇謙之裔。有文貞公諱贒。封寧海。子孫因貫焉。世列冠冕。高祖諱應龍。以學行聞。曾祖諱龜年。以孝聞。拜禮賓僉正。至南原府使。祖諱省吾。進士。考諱泰始。生考諱泰來。幷以文章屢解不利。本生妣金海金氏。宣務郞碩玄女。公生肅廟辛酉四月十五日。卒當宁壬申六月九日。享年七十二。葬縣西佐郞峰乾坐之原。配高陽金氏。護軍鼎重女。有二男一女。男夢騏,夢駿。女適士人金世鍵。畢齋之後。夢騏娶生貟金鳳章女。栢巖先生之裔。生四男一女。男慶集,聖集,義集,永集。女適士人李埴,朴宗文。夢駿娶金天柱女。生四女無子。以永集爲嗣。女適士人鄭維爀,李天奎,全以孝,權寀。金世鍵有一男二女。男壽增。女適士人卞宅臣。餘未適。公天資豪俊。氣質淸粹。學識則以羲易魯論爲志道之元符。文藝則必以古人自期..

參判 李公[瓊仝(경동)] 母氏 墓誌銘/兪好仁 撰

■參判李公母氏墓誌銘 貞敬夫人李氏。享年八十有六。弘治辛亥(성종 22년-1491년) 二月 二十八日。告終于京師之第。其孤參判公。奉 柩南歸于善山。將以是年四月二十七日。窆于泠山之西麓。先以書走於靈川兪好仁曰。平生知孤無如子。唯先夫人銘是托。嗚呼。予於公。爲門生。且從游文翰久。義不可以辭。夫人考。尼山縣監諱種彌。王考。行首諱密。曾王考。驪興府使諱德林。謹按姓氏。慶州族望。世傳閥閱。至高麗益齋文忠公。大以文章德行。名振東方。其餘風偉烈。亹亹不衰。至于五世孫尼山府君。雖位不滿六品。而典刑可觀。尼山娶嘉善大夫判尙州牧使金士淸之女。生夫人。安東判官李公諱達城。完山人。自少英達夙成。華問大播。擇對。卽以夫人歸之。門闌嘖嘖。擬諸氷玉馬。夫人性稟柔惠。奉養尊姑。出於至誠。平生無疾言遽色。雖婢僕下賤。絶不以醜語詆之。遇倉卒。未嘗驚失聲。應接內外族黨。一以誠信。婦德之著於當世如此。參判少時。就養于季父..

최립 묘지문(崔岦墓誌文)/허목(許穆) 撰

■ 간이당 묘지(簡易堂 墓誌) 최립『崔岦, 1539년(중종 34) ~ 1612년(광해군 4)』 지은이>허목(許穆, 1595 ~ 1682). 공의 휘는 입(岦), 자는 입지(立之), 성은 최씨(崔氏)이다. 별호를 동고(東皐)라고 했다가, 《역(易)》을 읽고 나서 호를 간이당으로 바꾸었다 한다. 우리 공헌왕(恭憲王-明宗) 말년에 고문(古文)을 잘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공의 문집 서문에 “공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작문할 적에 그들의 투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편의 글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돌려가며 암송하였다.” 하였다. 20세를 갓 지나 장원에 뽑혀 문장은 더욱 명성이 났으나 시대의 어려움을 만나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그의 재능을 기..

문제공 박충좌 묘지명(文齊公 朴忠佐 墓誌銘)

◇시대 : 고려 ◇연대 : 1349년(충정왕 1년) ◇유형 : 재질 묘지명· 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94cm x 너비 44cm ◇출토지 :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속촌리 ◇소재지 : (한국)불명- ◇서체 : 해서 ◇찬자 : 안진安震 /서자 미상 /각자 미상 ◯개요(槪要) 박충좌『朴忠佐, 1287년(충렬왕 13)~1349년(충정왕 1)』의 묘지명(墓誌銘)은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고, 자손이 글씨를 기록한 것이다. 전언에 의하면 묘지석(墓誌石)은 북한의 개성(開城)에서 공단부지 조성때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중국에서 반입하여 대구시(大邱市) 남구(南區) 이천동(梨泉洞) 고미술점(古美術店)에 있는 것을 2005년 8월 22일 탁본을 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입수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