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76

정안대군 허종 묘지명(定安大君 許琮墓誌銘)

■ 정안대군 상혜공 허종 묘지명(題額) (定安大君 尙惠公 許琮 墓誌銘) 이제현(李齊賢) 지음. 삼중대광 정안부원대군(三重大匡 定安府院大君)이고 추증된 시호는 상혜공(尙惠公)이다.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 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 孝思觀事) 죽헌(竹軒) 김정승(金政丞 : 金倫)이 나에게 부탁하며 “작고한 정안부원대군(定安大君)은 우리 외삼촌의 아들[昆弟]로 우애가 매우 깊었는데 불행하게도 복(福)이 다하여, 이제 지정(至正) 5년(1345 : 충목 1) 5월 병신일에 장례를 지내려고 합니다. 그대의 글로 ▨ 돌에 써서 무덤에 넣고자 하니, 그대는 반드시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 뜻에 감동되어 명(銘)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양천..

문공유 묘지명(文公裕墓誌銘) - 고려의종때의 문신 및 필예가(筆藝家)

■ 문공유 묘지명(文公裕 墓誌銘) [시대] 고려의종(毅宗) [연대] 1159년(의종13년, 금(金) 제량(帝亮) 정륭(正隆) 4년) [재질] 돌 [비(碑)의 크기] 세로 51cm, 가로 66cm, 글자크기 1.5cm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두 미상 ● 개관 문공유(文公裕)는 뒤에 이름을 고수(顧壽)로 고쳤고, 자는 항적(亢逈)으로, 남평군(南平郡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사람이다. 아버지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이다. 15세에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25세에 과거에 우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할 당시에는 모함을 받아 형 공인(公仁)과 함께 양주(梁州) 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복직하여 1129년에는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평원군 부인 원씨 묘지명(平原郡夫人元氏墓誌銘)

■ 평원군부인 원씨 묘지명(平原郡夫人元氏墓誌銘)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선생의 재취 장모(再娶丈母) ------------------------------------------------------------------- 최해 찬(崔瀣 撰) 고려의 대신(大臣) 가운데 휘(諱)가 항(恒)인 분이 있어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의 재상(宰相)을 지냈으니, 성(姓)은 박씨(朴氏)요.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諡號)는 문의(文懿)이다. 아들광정(光挺)이 처음으로 본국의 자제(子第)로 선발되어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고,천자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소신교위(昭信校尉) 고려 서경 등 처수 수군 부 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

회재 이언적 묘지명(晦齋李彦迪墓誌銘) - 여주이씨

■ 회재선생 묘지명(晦齋先生墓誌銘) 백사 이항복 찬(白沙 李恒福 撰) 아! 오래되었도다. 옛날 숙황제(肅皇帝) 24년인 을사년에 하늘이 우리나라에 혹독하게 재앙을 내리어 인묘(仁廟)가 승하하자 명묘(明廟)는 상중(喪中)에 있었고 모후(母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니, 인정(人情)이 흉흉하였다. 이 때 이기(李芑)라는 신하가 있어 신인(神人)을 속이고 임금의 밝음을 뒤바꾸어, 이에 두세 원흉(元兇)과 함께 임금은 어린 사람이라서 옛날의 일을 미처 알지 못할 것이라 하고, 대궐을 들어가서 상변(上變)을 하였다. 그래서 이 날 양전(兩殿 문정왕후와 명종을 가리킴)이 충순당(忠順堂)에 함께 나왔는데, 이기 등이 장차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대역(大逆)으로 무고하려고 하자, 조정에 있는..

한강 정구 선생 묘지명(寒岡 鄭逑先生 墓誌銘)

記言卷之三十九 / 東序記言[二] 한강 정구선생 묘지명(寒岡鄭逑先生墓誌銘) [생졸년]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허목(許穆) 찬(撰) 선생의 휘는 구(逑), 자는 도가(道可)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다. 정씨의 선계(先系)는 청주(淸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 의(顗)가 사실 시조이다. 상장군 뒤로 감찰 어사(監察御史) 현(儇), 첨의찬성(僉議贊成) 해(瑎), 청하군(淸河君) 책(㥽),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포(誧), 청원군(淸原君) 추(樞), 정당문학(政堂文學) 총(摠), 상호군(上護軍) 효충(孝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옥경(沃卿) 등 9대가 세상에 드러나 대족(大族)으로 불리었다. 집의가 철산 군수(鐵山郡守) 윤증(胤曾)을 낳고, 군수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

송시도 묘지명 병서(宋時燾 墓誌銘 幷序)

■ 종5대조 세한재부군 묘지명 병서 (從五代祖 歲寒齋府君墓誌銘 幷序) ◇우암 송시열의 동생임 배위 숙인이씨는 경주이씨 청호공 후→24世 눌헌 이사균(李思均) 현손녀(玄孫女)임. 성담 송환기 찬(性潭 宋煥箕 撰), (찬인은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임. 惟我先祖尤菴文正公有弟監正公。德望甚偉。爲一時名勝所推重。歿後權文純公嘗語人曰。正丈當時穪小尤菴。三山士風之不變。莫非其功。可無俎豆之禮乎。噫。夫以文純公之贒而誦慕公如此。豈不盛矣哉。公諱時燾字誠甫。系出恩津。高麗判院事諱大原爲鼻祖。歷二世有諱明誼官司憲府執端。以淸裁直節。與鄭圃隱諸賢相推重。入我朝有諱愉。隱德不仕。號雙淸堂。寔公八世祖也。高祖諱世良。始仕爲齋郞。棄歸以遺逸終。贈戶曹參判。曾祖諱龜壽。宗廟署奉事。贈吏曹判書。號西阜。性至孝居喪致哀。有白燕巢廬之異。祖諱應期。儀賓府都事。贈議政府左贊成。操履純篤。..

변한국대부인유씨묘지명 병서(卞韓國大夫人柳氏墓誌銘 幷序)

■ 변한국 대부인 유씨 묘지명 병서 (卞韓國 大夫人 柳氏 墓誌銘 幷書) ◇국재공 권부 배위(菊齋公 權溥 配位) ◇익재 이제현의 장모님 이제현 찬(李齊賢 撰) 자서(子壻) 추성량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이동사 영예문관사 상호군(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二同事領藝文館事上護軍) 이제현(李齊賢)이 찬(撰)하고, 증손(曾孫) 선무장군 합포진변 만호부만호 봉익대부우상시(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 권용(權鏞)이 전자(篆字)로 쓰다. 시령 유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이 있었는데 태조(太祖)를 도와 공이 있었고, 그의 7세손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은 문학으로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우복야(右僕射) 택(澤)을 낳았으며, 복야공이 시중 문정공(侍中文..

영가부원군 권보 묘지명/익재 이제현 찬

■ 영가부원군 증시문정권공묘지명 병서 / 익재 이제현 장인 (永嘉府院君 贈諡文正權公墓誌銘 幷序) 이제현 찬(李齊賢 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 삼중대광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 영가부원군 증시문정권공묘지명 병서 (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 三重大匡 脩文殿大提學 領都僉議使司事 永嘉府院君 贈諡文正權公墓誌銘幷序) 사위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良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이제현(李齊賢)이 짓고, 증손 선무장군 합포등처 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武將軍 合浦等處 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玄成君) 권용(權鏞)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씀. 대덕(大德)신축년(1301년 충렬 27)에 국재(菊齋) 권문정공(權文正公)이 과거[春官]를 맡았을 때에 제현(齊賢)이 다행히 병제(丙第)에..

다산자찬 묘지명(茶山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

■ 다산의 자찬 묘지명(茶山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 [생졸년] 1762(영조 38)~1836(헌종 2) / 74歲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오늘날 楊洲郡 瓦阜面 陵內里)에서 용(鏞)을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 ..

서모 김씨 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 - 다산 정약용

■ 서모 김 씨 묘지명(庶母 金氏 墓誌銘) 정약용 찬(丁若鏞 撰) 서모 김씨는 사역원 정(司譯院正)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의택(金宜澤)의 딸이다. 본관은 잠성(岑城)이니 지금 금천군(金川郡)에 합하여졌다. 우리 선고(先考)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주 목사(晋州牧使) 휘 재원(載遠)이 건륭(乾隆) 경인년(1770, 영조 46)에 우리 어머니 숙인(淑人)을 잃고 그 이듬해 금화현(金化縣)의 처녀 황씨(黃氏)를 취하여 측실(側室)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요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에 또 서울에서 처녀 김씨를 취하여 측실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 20이었으니 곧 서모(庶母)이다. 천성이 명민(明敏)하고 작은 체구에 말이 적었으며 또 부드럽고 화평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