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76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만] 묘지명 병서

의정부 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묘지명 [병서] 議政府 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墓誌銘 [幷序]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이식 찬(成均館大司成 知製敎 李植 撰)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겨울에 진무(振武)의 원훈(元勳)인 옥성부원군 장공이 한성(漢城) 반송방(盤松坊 >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 지역) 저택에 병들어 눕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고 내복약을 계속 대주게 했으며, 날마다 액정(掖庭)의 감사(監史)를 파견하여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1월 모일(某日)에 결국 공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상이 애도(哀悼)하며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다. 그리고 중관(中官)을 보내 조문(弔問)하고 예관(禮官)에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였으며, 염..

정인지 선생 묘지명(鄭麟趾 先生 墓誌銘)

삼탄집(三灘集) 卷之十四/이승소(李承召) 삼탄집 제14권 / 묘지(墓誌) 하동부원군 정 문성공의 묘지명(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 이승소(李承召) 撰 조선의 명신인 하동부원군 시(諡) 문성공(文成公)께서 향년 83세로 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는데, 실로 성화(成化) 14년 무술(1478, 성종 9) 11월 25일이었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애도하기를 좌우의 손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였으며, 부증(賻贈)을 규례보다 더 내리게 하였다. 다음해 춘3월 기미일에 충주(忠州) 불정촌(佛頂村)에 있는 인좌 신향(寅坐申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의 휘는 인지(麟趾)이고, 자는 백저(伯雎)이며, 하동정씨(河東鄭氏)이다. 고려 충선왕조(忠宣王朝) 때 휘 지연(芝衍)이란 분이 있어 벼슬길에 나..

한음 이덕형선생 묘지명 - 백사 이항복 지음

한원부원군 이공 덕형 묘지명(漢原府院君李公墓 효충분의병기익사분충병의결기형난공신(效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決幾亨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世子師)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백사 이항복 지음 만력(萬曆) 계축년 10월에 명보(明甫)가 용진(龍津 :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리)의 강가에서 작고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상(上)이 몹시 슬퍼하면서 명하여 관작을 복구시켰다. 그러자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였고, 심지어 이서(吏胥), 군민(軍民), 상려(商旅), 노유(老幼)들까지도 외롭고 아득하여 의지할 곳이 없게 여기면서 각각 ..

자찬 묘지명을 쓰신 인물

■자찬 묘지명을 쓰신 인물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묘비명을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다. 자찬묘지명自讚墓地名이다. 더러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죽음에 부쳐 시 한 수를 남겨놓기도 했다. 자만시自挽詩다. 실학의 거두 다산 정약용이 그랬고 대학자 미수 허목도 그랬다.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유서와는 사뭇 다르다. 유서가 남에게 하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유서가 짐을 내려놓으며 남기는 말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칼날을 더 시퍼렇게 세우며 적는 말이다. 유서가 용서와 화해와 안식을 위한 글이라면 자찬묘지명이나 자만시는 절차와 탁마와 혁파를 위한 글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글을 지었던 걸까. 왜 자신의 죽음 마저도 객관화하고자 했던 것일까!..

안축 묘지명(安軸墓誌銘) - 이곡(李穀)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흥령부원군 영예문관사 시문정 안공묘지명 (大元 故 將仕郎 遼陽路盖州判官 高麗國 三重大匡興寧府院君 領藝文館事 謚文貞 安公墓誌銘) [생졸년] 안축『安軸, 1282년(충렬왕 8) ~ 1348년(충목왕 4)』 / 향년 66歲 내(묘지 찬자인 李穀)가 원나라 수도에 있을 때 근재(謹齋 : 안축)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와서 문병을 하였다.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며, 그 아들 종원(宗源)을 가르키면서, “자네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 하였다. 또 묘지명을 부탁하면서, “내 평생에 아무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무릇 백성들이 강제로 노비가 된 것을 반드시 다..

이조년 묘지명(李兆年墓誌銘) - 이제현 지음

유원고려국 성근익찬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문열공 이공묘지명 (有元高麗國 誠勤翊贊勁節功臣 重大匡 星山君 贈諡文烈公 李公墓誌銘) ◇생몰년 : 1269년(원종 10) ~ 1343년(충혜왕 4) 무덤에 지석(誌石)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무덤이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보면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간직해 둔 것인 줄을 알게 되어, 진실로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성산군(星山君) 이공(李公)이 죽은 지 1년이 넘어서 내가 비로소 공을 위하여 묘지명을 찬술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적(曺頔)의 변란때 영릉(永陵 : 충혜왕)이 불려가 천자를 알현하였다. 승상 백안(伯顔)이 묵은 감정(宿感)을 품고 영릉을..

민지 선생 묘지명 병서(閔漬先生墓誌銘 幷序)

유원 고려국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판첨의부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 시문인 민공 묘지명 병서(有元 高麗國 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判僉議府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 諡文仁 閔公 墓誌銘 幷序) 추성양절공신 대광 삼사사 예문관 상호군(推誠亮節功臣 大匡 三司使 藝文館 上護軍) 이제현(李齊賢) 지음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는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 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元宗)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 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인 여흥부원군 민공(驪興..

최해 묘지명(崔瀣 墓誌銘)

『가정집 제11권 / 묘지명(墓誌銘) 』 『동문선(東文選 卷124)』 ■ 최해 묘지명(崔瀣 墓誌銘)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이곡 (李穀) 찬(撰) 대원 고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정순대부 검교성균관대사성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군묘지 (大元 故將仕郞 遼陽路蓋州判官 高麗國 正順大夫 檢校成均館大司成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崔君墓誌) 황조(皇朝)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동방에 유명한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계림(雞林)의 최수옹(崔壽翁)이다. 처음에 개주 판관에 제수되었는데, 그 지역이 외지고 직무가 번잡스럽자 다섯 달 동안 있다가 병을 핑계로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황조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국에서도 벼슬하기는 하였지만 재질이 기이하고 지조가 고상해서 시대에 용납되지 못하다가, 나이 54세인..

정안대군묘지명(定安大君 墓誌銘)

■ 정안대군 상혜공 허종 묘지명(定安大君尙惠公許琮墓誌銘) [지은이] 이제현 [형태사항] 크기>51.0 x 98.0/한자 [비고] 識記 : 至正五年(1345) 五月日書備考 : 忠宣王公主駙馬許琮(미상-1345)의 墓誌銘임 소장처분 류기 호: 54 [소장정보] 현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이 자료는 찬자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서자와 각자는 모두 미상으로 해서(楷書)로 쓰여진 탁본(拓本) 1장의 금석문이다. 전액(篆額)이 ‘정안대군묘지명(定安..

김훤(金晅) 묘지명 - 자찬 묘지명

■ 도첨의 찬성사 김공 훤 묘지명 (都僉議 贊成事 金公 晅 墓誌銘) 대덕(大德) 9년 을사년(충렬 31, 1305) 2월 30일에 도첨의찬성사(都簽議贊成事) 김훤(金晅)이 스스로 지은 묘지명 광정대부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한 김훤이 스스로 지음 김훤(金晅)의 자는 용회(用晦)이고, 의성현(義城縣)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굉(閎)인데 비서랑(秘書郞)이고, 어머니는 토산군부인(兔山郡夫人) 몽씨(蒙氏)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양정(養正)의 딸이다. 훤은 갑오년(고종 21, 1234) 6월 30일에 태어나 20세에 벼슬길[士板]에 오르고, 무오년(고종 45, 1258)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이방균(李方均)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