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언 별집 제21권 - 미수 허목 저
구묘문(丘墓文)
■정 장령(鄭 掌令)의 묘지명(墓誌銘)
공은 휘는 백형(百亨), 자는 덕후(德後), 성은 정씨(鄭氏)로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세종조의 명신(名臣)으로 정척(鄭陟)이란 분이 있었는데, 문학으로 가문을 일으켜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가 되었고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작고한 뒤에는 시호를 공대(恭戴)라고 하였다. 학사(學士)는 승지 정성근(鄭誠謹)을 낳았는데, 그는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폐주(廢主)의 미움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 정주신(鄭舟臣)은 승문원 박사인데, 아버지가 비명(非命)에 돌아가심을 원통히 여겨 음식을 먹지 않고 너무도 슬퍼하다 죽었는데, 공에게는 3세조(고조)가 된다. 중종 때에 모두 충신(忠臣)으로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할아버지 정원린(鄭元麟)은 처음 벼슬이 능서랑(陵署郞)이었는데, 그도 지극한 효행으로 효자(孝子)로 정표되었고, 아버지 정효성(鄭孝成)은 선조 때 청렴한 선비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한 선행이 있었으므로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인조 때에 와서 발탁되어 호서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작고한 뒤에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신천 군수(信川郡守) 홍의필(洪義弼)의 딸로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정백창(鄭百昌)은 박학하여 기송(記誦)을 잘하였고, 문장(文章)으로 명예를 얻어서 벼슬이 경기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둘째 아들로서 젊어서부터 지조(志操)와 덕행이 있었으며 탁월한 것을 좋아하여 절대로 속인들이 가는 길을 따르지 않았고, 과거 공부를 하는 데에도 자질구레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28세에 박사 제자(博士弟子)로 뽑혔고, 국가가 중흥(中興)하던 해에는 재선(才選)으로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이 되었다. 다음해에 증광시(增廣試)에 뽑힌 뒤 3년 만에 승문원 저작으로 있다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뽑혀 봉교(奉敎)에 올랐다.
정묘의 난에 인조가 강도(江都)에 파천(播遷)하였는데, 난이 평정되자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功勞)로 상을 받아 사헌부 감찰에 올라서 여러 번 옮겨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구하여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었는데, 공명(公明)하고 청렴 정직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뒤에 다시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그때에 장묘(章廟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묘호임)를 추존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공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고집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다시는 현직(顯職)에 등용되지 못하였고 한산직(閑散職)에 있게 되었다.
3년 뒤 병자년(1636, 인조14)에 오랑캐가 침범한 지 3일 만에 오랑캐의 선봉대(先鋒隊)가 국도를 덮쳐 오니 도성이 요란해졌고, 종묘와 백관과 모든 비빈(妃嬪)들이 강도(江都)로 들어갔고, 임금의 거가(車駕)가 나오는데 오랑캐의 기마대가 급히 닥쳐서 길이 뚫리지 않게 되었다.
임금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오랑캐에게 에워싸인 지 40여 일인 정월(正月)에 오랑캐는 강도를 함락하였는데, 병마(兵馬)를 주관하는 자들은 모두 달아났고 우상(右相)인 김상용(金尙容)만이 스스로 불에 타 죽었으며 모든 비빈과 희첩(姬妾)과 부녀자와 백관들은 오랑캐에게 몰리게 되었다.
아버지 관찰공(觀察公)은 늙고 병들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은 ‘부자(父子)가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십중팔구 보전할 리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부자(父子)가 영결하고 조의(朝衣)를 입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멀리 거둥할 때 임시 머무는 곳)를 향해 네 번 절한 뒤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성(城)이 함락되고 나서 온 집안이 모두 죽었다.
공의 형의 아들 정선흥(鄭善興)이 시신(尸身)을 거두어 염(殮)하여 광주(廣州) 서쪽 정씨(鄭氏)의 족장지(族葬地)로 돌아와 장사 지냈다. 오랑캐가 이미 화친을 맺고 떠나자 임금이 사부(祠部 장례원(掌隷院))에 명하여 제사를 내리고, 충신으로 정려(旌閭)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10년(1669)에 재상이 이러한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하였다.
공은 고조와 증조로부터 공(公)에 이르기까지 5세에 걸쳐 충신과 효자로 정려되었다. 공은 평생 동안 정도(正道)를 좋아하였고, 한결같이 뛰어난 절개로써 스스로 노력하여 능히 선인(先人)의 유훈(遺訓)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죽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숙부인(淑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이시발(李時發)의 딸로서 공보다 32년 뒤인 74세에 작고하였다. 공은 아들은 없고 사위 권단(權偳)이 있다. 권단은 권유(權愈), 권헌(權憲), 권각(權愨)을 낳았는데, 권각은 일찍 죽었고, 권유는 지금 벼슬하여 문사(文詞)로 세상에 알려졌고, 권헌은 차자(次子)로서 실은 그 외가(外家)의 제사를 맡고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 嗚呼
정씨 6세에 / 鄭氏六世
청백리 효자 선행이 4세이고 / 淸白吏孝子善行四世
충신의 열조(烈操)가 2세이니 / 忠臣之烈二世
가깝게는 일세를 놀라게 하였고 / 近而驚一世
멀리는 백세에 교훈을 남겼다 / 遠而敎百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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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장헌왕(莊憲王) : 세종(世宗)의 시호이다.
[주-02] 폐주(廢主) :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주-03] 공희왕(恭僖王) : 중종(中宗)의 시호이다.
[주-04] 능서랑(陵署郞) : 능참봉(陵參奉)을 이른다.
[주-05] 헌문왕(憲文王) : 인조(仁祖)의 시호이다.
[주-06] 나라가 중흥(中興)하던 해 :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1623년을 가리킨다.
[주-07] 장묘(章廟) :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가리킨다. 당시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의 주도로 정원
군을 왕으로 추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후에 정원군은 결국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무덤의 이름이 장릉(章陵)이므로 장묘라 한 것이다.
[주-08] 형의 아들 선흥(善興) : 정백창의 아들이다. 정백창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사망하였으므로 정백형
이 부친을 모시고 간 것이다.
[주-09] 사부(祠部) : 예조(禮曹)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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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鄭掌令墓銘
公諱百亨。字德後。姓鄭氏。本晉陽人。有莊憲名臣鄭陟者。以文學起家。至脩文殿太學士。錄淸白吏。卒諡恭戴。學士生承旨誠謹。好直諫。廢主惡而殺之。男舟臣。承文院博士。痛父非命。不食哭以至滅性。於公爲三世祖。恭僖時。皆表忠臣閭。祖諱元麟。初筮仕。爲陵署郞。亦以至行表孝子閭者也。父諱孝成。昭敬時以淸士著名。亦有善行旌門。至憲文時。擢拜湖西道觀察使。卒贈左贊成。娶南陽洪氏。信川郡守義弼之女。生二男。長百昌。博學。善記誦。爲文章。早得名譽。官至京畿觀察使。公爲次子而少有志行。好卓犖。絶不蹂趨俗人蹊逕。爲擧子業。亦不以瑣屑爲工。二十八。選博士弟子。國家中興之年。以才選爲連源道察訪。其明年。擢增廣及第。後三年。以承文著作。選藝文檢閱。陞奉敎。丁卯之亂。上出幸江都。事平。賞從上勞。陞司憲府監察。累轉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求補外爲通津縣監。以公廉稱。後爲侍講院弼善。改司憲府掌令。時有章廟追尊之議。公執不可。忤上旨。不復顯用。居散班三年。丙子。奴來侵。三日。先驅已薄國都。都城擾亂。宗廟百官諸妃嬪。皆入江都。車駕出。奴騎急。道不通。上卽馳入南漢。受圍四十餘日。正月。奴陷江都。諸主兵者皆走。右相金尙容自燒殺。諸妃嬪姬妾婦女百官。皆被驅。先觀察公老病不能動。公以爲父子皆陷。無一二全理。寧不辱。父子訣。衣朝衣。望行在所。四拜而遂自經死▦。城旣陷。闔族皆死。公有兄子善興。收殮。以反葬廣州治西鄭氏族葬。奴旣約成而去。上命祠部。賜祭表忠臣閭。顯宗十年。宰相白上。追爵承政院都承旨。公自其高,曾以下及公之身。皆以忠臣孝子。旌閭者五世。公平生好直道。一以高節自力。能不墜先人之訓。死之時。年四十八。淑夫人慶州李氏。贈議政時發之女。後公三十二年七十四歿。公無子。有一壻權偳。偳生愈,憲,愨。愨早殀。愈方爲某官。以文詞顯。憲以次子。實主其外家祀事云。嗚呼。鄭氏六世淸白吏。孝子善行四世。忠臣之烈二世。近而驚一世。遠而敎百世。
출전>記言別集卷之二十一 / 丘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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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정백형(鄭百亨) 1590(선조 23)∼1637(인조 15). 조선후기의 문신./충익공 벽오 이시발의 둘째 사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후(德後). 조선 초 명신 척(陟)의 후손이며, 매신(梅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원린(元獜)이고, 아버지는 공청도관찰사 효성(孝成)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신천군수(信川郡守) 의필(義弼)의 딸이다. 경기감사 백창(百昌)의 아우이다.
1623년(인조 1) 박사제자(博士弟子)에 뽑혀 연원도찰방(連源道察訪)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저작ㆍ예문관검열을 거쳐 대교ㆍ봉교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을 따라 강화도에까지 갔던 공로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정언ㆍ지평ㆍ통진현감ㆍ시강원필선을 지냈으나, 1632년 정원군 부(定遠君琈)에 대한 원종(元宗) 추존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 면직되었다. 1634년 예조정랑ㆍ장령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효성과 함께 자결하였다.
이듬해 정문이 세워지고, 현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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