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76

김방경 묘지명(金方慶墓誌銘)/이진(李瑱) 찬(撰)

■ 고려국 상락공 묘지명(高麗國上洛公墓誌銘) - 이진(李瑱) (구 안동김씨) 대저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이 하나이고, 나이[齒]가 하나이고, 작(爵)이 하나이다. 군자가 세상을 살면서 그 중 하나나 둘을 얻는 것도 오히려 힘들거니와 하물며 셋을 얻겠는가. 그 셋을 얻어서 빠진 것이 없는 이는 오직 우리 상락공 뿐이다. 공의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방경(方慶)으로, 영가군(永嘉郡-안동의 고려시대 이름)사람이다. 증조 의화(義和)는 사호(司戶)였으나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 兼 直史館) 민성(敏誠)으로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

縣監贈判書金弘翼公墓誌銘

■縣監贈判書金公墓誌銘 유언호(兪彦鎬) 撰 自古忠臣烈士。爲國家見危授命。其人豈必受國厚恩官位高顯哉。彼官高矣。一朝臨禍難。或賣國遺君。不然則雉兎逃。而誠忠坌涌。勇於一死。自盡天性者。往往出於人主不識何狀之中。如金公弘翼。身未甞登朝。官不過監縣。而從主帥。任事在軍。將逸矣師潰矣而不去。獨挺身力戰而死。豈不偉哉。公慶州人。字翼之。號默齋。宣祖辛巳生。中癸丑生員。筮仕義禁府都事,掌樂院直長,司憲府監察,工曹佐郞,連山縣監。爲連山五年而値丙子之亂。虜圍南漢。上命徵三南兵。忠淸監司鄭世䂓檄守令。領兵赴期。守令望風逃匿。莫有至者。時公父母年皆七十餘。在瑞山。弟文貞公弘郁。以翰林從上於圍中。公慷慨泣曰。吾雖有父母。君父急。安忍不赴。卽杖劍馳詣世䂓。藍浦縣監李慶善亦至。世䂓兵二千四百。使公掌兵械。慶善主餽餫。遂進兵屯廣州之險川。謀入南漢。時虜伏山上。因天大霧。忽馳下而掩擊之。我軍皆披靡。死者相枕。..

이색의 조모님 묘지명

대원 제봉 요양현군 고려 삼한국대부인 이씨 묘지명 유서 (大元 制封 遼陽縣君 高麗三韓國大夫人 李氏 墓誌銘 有序) ◇이색의 조모님 묘지명입니다. 李齊賢 撰 대부인(大夫人)의 성(性)은 이(李)씨이니 흥례부(興禮府=울산의 고려시대 지명)가 본향이다. 증조부의 휘는 순광(淳匡)이니 사재 주부(司宰注簿)이며, 조부의 휘는 우(祐)이며 부친의 휘는 춘년(椿年)이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15세가 지나 한산 이 씨 정읍 감무(韓山李氏井邑監務) 휘 자성(自成)에게 시집가니 두 집이 원래부터 다른 성씨이요, 같은 이 씨(李氏)는 아니다.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배(培) 요,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곡(穀)이다. 딸은 장 씨(張氏)에게 출가했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정읍 부군(井邑府君)이..

文正公 靜庵 趙光祖 墓志銘

■ 문정공 묘지명(文正公墓志銘) [생졸년] 1482년(성종 13)~1519년(중종 14) 정덕(正德) 연간, 기묘(己卯,1519)년 12월 20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께서 화순 능주(綾州)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다음 해 선영(先塋)을 따라 용인(龍仁) 심곡리(深谷里)에 이장하여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만력(萬曆) 연간, 경진(庚辰,1580) 년에 성균관의 모든 유생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직 선생의 여덕(餘德)이 다하지 않아 선비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은덕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의 덕을 숭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마땅히 성대하게 의례를 다 하여야 할진대, 오늘날 묘소 가는 길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없고유택(幽宅)에는 지석(誌石)이 없어, 선생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

최항 묘지명(崔沆墓誌銘) -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이고,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감수국사 판이부 어사대사 대자대사 진평군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1,000호(特進 金紫光祿大夫 守大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柱國 上將軍 監修國史 判吏部 御史臺事 大子大師 晉平郡開國公 食邑 三千戶 食實封 一千戶)이며, 추증된 시호가 광정공(光正公)인 최공(崔公) 묘지명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에는 작위(爵位)와 공명(功名)은 들어 있지 않다. 수(壽)를 누린 것을 첫째로 치기 때문에, 만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젊은 나이[妙㱓]에 공명을 얻고 부귀를 누렸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어찌 감히 장수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겠는가. 생각하건대 공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공의 성은 최씨(崔氏)..

청천 신유한선생 묘지명(靑泉 申維翰先生 墓誌銘)

봉상시 첨정 청천 신공 묘지명 (奉常寺僉正 靑泉 申公 墓誌銘) 嶺之南。多名山水。淑氣之鍾於人者。必生瓌偉碩德之士。如近世靑泉申公是已。公諱維翰。字周伯。申氏本壯節公諱崇謙之裔。有文貞公諱贒。封寧海。子孫因貫焉。世列冠冕。高祖諱應龍。以學行聞。曾祖諱龜年。以孝聞。拜禮賓僉正。至南原府使。祖諱省吾。進士。考諱泰始。生考諱泰來。幷以文章屢解不利。本生妣金海金氏。宣務郞碩玄女。公生肅廟辛酉四月十五日。卒當宁壬申六月九日。享年七十二。葬縣西佐郞峰乾坐之原。配高陽金氏。護軍鼎重女。有二男一女。男夢騏,夢駿。女適士人金世鍵。畢齋之後。夢騏娶生貟金鳳章女。栢巖先生之裔。生四男一女。男慶集,聖集,義集,永集。女適士人李埴,朴宗文。夢駿娶金天柱女。生四女無子。以永集爲嗣。女適士人鄭維爀,李天奎,全以孝,權寀。金世鍵有一男二女。男壽增。女適士人卞宅臣。餘未適。公天資豪俊。氣質淸粹。學識則以羲易魯論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