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최립 묘지문(崔岦墓誌文)/허목(許穆) 撰

야촌(1) 2014. 1. 1. 23:58

■ 간이당 묘지(簡易堂 墓誌)

 

     최립『崔岦, 1539년(중종 34) ~ 1612년(광해군 4)』

 

    지은이>허목(許穆, 1595 ~ 1682).

 

공의 휘는 입(岦), 자는 입지(立之), 성은 최씨(崔氏)이다. 별호를 동고(東皐)라고 했다가, 《역(易)》을 읽고 나서 호를 간이당으로 바꾸었다 한다. 우리 공헌왕(恭憲王-明宗) 말년에 고문(古文)을 잘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공의 문집 서문에 “공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작문할 적에 그들의 투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편의 글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돌려가며 암송하였다.” 하였다.

 

20세를 갓 지나 장원에 뽑혀 문장은 더욱 명성이 났으나 시대의 어려움을 만나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그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겨 직책에 구애받지 말고 승문원(承文院)의 일을 주관하게 하여 외교문서를 맡게 하였다. 

 

그 뒤에 외직으로 나아가 간성태수(杆城太守)가 된지 3년 만에 《주역구결(周易口訣)》 4권을 임금께 바쳤고, 4년 뒤에 〈홍범학기(洪範學記)〉 500여자를 지었으니, 모두 백대에 전할 만한 글들이었다.

 

그의 문장은 규모가 크고 깊으며 간결하고 장엄하며 예스럽고 우아하여 법이 될 만하였으니, 동방(東方)의 문학에 있어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물이었다. 국가에 인재가 많았던 시기는 공헌ㆍ소경(昭敬) 연간에 극에 달하여 덕 있고 유능한 이들이 모두 등용되었는데, 공의 높은 재주와 총명하고 박식함은 천고에 특출하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를 만나 명나라에 사신을 빈번하게 보내 천자의 위력을 움직여 환란을 해소하였는데, 그 당시 외교문서는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다. 이리하여 그 글이 구정(九鼎)이나 대려(大呂)보다도 중시되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의 《기성시권(箕城詩卷)》 발문에 “나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하였다. 태어난 해는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32)으로 목종황제(穆宗皇帝)가 생후 3년 만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던 그해이다. 

 

만력(萬曆) 2년(1574, 선조7) 연간에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어 공물과 세금의 문안을 상정(詳定)하였는데, 그 서문에 “현(縣)에서 도호부(都護府)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번 임용되고서 진주 목사가 되었다.”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의주(義州)로 피난 간 이듬해에 견성 윤(甄城尹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대신해 직접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을 수행하며 외교문서를 관장하였는데, 명나라에 올린 크고 작은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이 모두 44건이었고, 전후로 세 번이나 명나라에 들어가서 올린 글이 33건이었는데, 그중 4건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반포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국가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에 관련된 급박한 사안들이었다.

 

그 뒤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아갔는데, 그때는 일본의 관백(關白)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평수길(平秀吉) 종족을 멸망시키고는 와서 화친을 청한 해였다. 그 뒤 4년에 풍병의 증세가 있어서 휴가를 청할 적에 경상 감사 최관(崔瓘)에게 답한 편지에서 “치사(致仕)할 나이인데 임금의 상을 입고 있는 관계로 사직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4년 뒤에 공이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유문(遺文) 9권이 희년록(稀年錄)에 이르러 중단되었다.

 

아버지는 자양(自陽)으로 성균관 진사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이다. 공은 어려서 말이 늦어서 열 살이 되어서야 책을 읽었으나 15세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되었으니, 문장은 배우지 않고서도 잘하였던 것이다. 문장에 통달한 뒤에는 도덕에 관한 방대한 서적을 섭렵하였다. 죽남공(竹南公 오준(吳竣))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공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엄중하게 위의를 갖추어 사람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였다.

 

아들 동망(東望)은 만력 16년(1588, 선조21)에 급제하였지만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죽었는데 후사가 없다. 또 서자가 둘인데 동문(東聞)과 동관(東觀)이다. 현재 동문은 나이가 60세로 가문의 옛 법을 대물림하며 고양(高陽)의 오리섬[鳧嶼]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선산이 있는 고향이다.

 

인조 때 사신(詞臣)이 임금께 아뢰기를 “최립(崔岦)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는데, 죽은 뒤에 그 글이 전해지지 않으니 간행해 주십시오.” 하여, 공이 별세한 지 40년 만에 그 글이 비로소 간행되었다.

 

 

[주01]구정(九鼎)이나 대려(大呂) : 구정은 하우씨(夏禹氏)가 주조한 솥이며, 대려는 큰 종인데, 이 둘은 나라의 중대한 보물임으로, 여기서는 최립의 글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을 말한다.

 

[주02]공이 별세한 지 40년 :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최립이 죽은 지 20년 뒤인 인조 9년(1631)에 이정귀(李廷龜)와 교서관(校書館) 관원들의 주청에 의해 《간이집》 9책을 목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40년은 20년의 잘못이 아닌가 의심된다.

 

記言卷之十八 中篇>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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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文) 

 

簡易堂墓誌

 

公諱岦。字立之。姓崔氏。別自號東皐。嘗讀易。易其號曰簡易堂云。我恭憲末。以古文進。其序曰。公好讀班固,韓愈書。爲文章。不得不書。每一篇出。人爭傳誦之。弱任冠。擢壯元。文章益有名。顧阨於時。官不大顯。然上奇其才。毋拘以分職。令管承文院事。委之以詞令。後出爲杆城太守。三年。上周易口訣四卷。後四年。著洪範學記五百餘言。皆百代之文。其文章閎深簡嚴。古雅可法。東方文學。殆千載一人。國家人才之盛。極於我恭憲,昭敬間。賢能竝用。公高才敏識。卓出千古。當國難兵連之日。使价交道。動天子威靈。以排患釋難。一時詞命。多出於公。於是其文重於九鼎大呂。鵝谿箕城詩卷跋云。岦與公同年生。同年及第。其生蓋嘉靖十六年穆宗皇帝生後三年冊封皇太子之歲也。萬曆二年間。爲晉州。詳定貢賦。其文案序曰。自縣至都護府。凡五任而來牧晉州云。及壬辰大亂。車駕西狩之明年。代甄城尹。自從上行在所。因掌詞命。咨奏書大小四十四。前後三入京師。上書三十三。其四。頒行會典事也。餘皆存國亡國之急也。後出東郡。時則日本關白家康。旣滅平氏族類。來請和之年也。後四年。以濕痿病。乞休沐時。答嶺南崔使相書曰。年至致仕。君喪在身。不得自引辭就云。又四年。公歿。故遺文九卷。至稀年錄而止。父自陽。成均進士。母茂松尹氏。公幼。不慧於言。過卜年始讀書。甫成童。陞太學。於文蓋不學而能也。旣通於文以窺道德之博。竹南公曰。嘗師事之。嚴重有儀。使人莫敢慢易云。子東望。萬曆十六年及第。仕不達。終龍岡縣令。無子。又有庶孼子二人。曰東聞,東觀。今東聞年六十。能傳家世古事。居高陽之鳧嶼。爲丘墓鄕云。仁祖世。有詞臣白上言。岦以文名世。死而其書無傳。請刊行之。公沒四十年。其文始行。

 

기언 > 記言卷之十八○中篇 / 丘墓[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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刑曹參判簡易崔公墓碣銘 - 崔錫鼎 撰

 

公諱岦。字立之。簡易其號也。系通川。以嘉靖己亥生。童年進士。弱冠擢魁科。官至刑曹參判。贈考進士自陽兵曹參判。祖世瀛左承旨。曾祖湘宗簿正。壽七十四。葬高陽鴨島先兆。配貞夫人禮安李氏祔。公地素寒。能以文章顯名。淹貫百家。尤䆳於易。性淸高簡貴。諸公重之。當壬辰亂。久帶槐院提調。事大咨奏。皆出公手。公之文奧深有法。談者謂谿谷可與方駕。仁廟朝命印行遺稿。子東望文科京畿都事。早沒。女適別坐李誠元。側子東聞,東觀。孫曾十數人。公沒旣久。曾孫嗣曾來請銘。銘曰。

於乎簡易。天與斯文。百世之下。可永厥聞。

 

명곡집 > 明谷集卷之二十四 / 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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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易堂崔公行狀 丙辰四月 - 李選 

 

公姓崔。諱岦。字立之。通川人。自號東皐。晩又以簡易扁其堂。高祖某。大護軍。曾祖有池。贈某官。祖世瀛。贈左承旨。考自陽。成均進士贈兵曹參判。三世之贈。以公貴也。護軍公工隷書。受知光陵。階至折衝參判。公少從徐花潭遊。有文行。娶坡平尹芸弼女。以嘉靖己亥五月初三日。生公。公有異質。幼不慧於語。至十歲。始讀書。文名卽大噪。與一時才子。李山海,崔慶昌,宋翼弼,李純仁,河應臨,白光勳,尹卓然。 有八文章之稱。甲寅。年十六。赴監試。俱中兩場。辛酉。魁文科。擢拜典籍。時年二十三也。明年。以南省郞。出拜長淵縣監。後宰饔津。以事罷。歸通津別業。丁卯。莅載寧。秩滿而還。旋除林川。不赴。先是。國家以宗系受誣。連遣使价。陳辨請雪。必抄選一代文章士。萬曆丁丑曁辛巳之行。皆以質正官與焉。而至甲午歲。則國家方多故。遼燕之道。冠蓋相望。導達事情。解紛釋難。尤重在詞令。公以奏請副使。一歲再赴皇都。前後所製咨奏上書。動被華人歎賞。非薰盥。不敢讀。於是乎公之文章。動天下矣。壬午。拜成川府使。癸未。上北邊攻守議。丁亥。掌隷院判決事。以微事罷。己丑。牧晉州。及遞歸。以軍職。嘗宿衛。壬辰。見任長湍府使。避兵入江華行朝。遙授全州府尹。癸巳。以西樞召還行在。掌撰咨奏。丙申。兼槐院提調。專管事大文書。明年。兼摠管上封事。陳四事。又明年。奉使▦州。病稽。復命置對。遞職。自是。僑居松都。轉寓西京。凡數年。辛丑。敍拜驪州牧使。未久。解歸。寓京口之麻浦。壬寅。又差槐院提調。周易校正廳堂上。上疏乞守一郡。畢所著書。用除杆城郡守。卽歲癸卯也。居歲餘。所著周易本義口訣成。具疏投進。丙午。以接待朱,梁詔使。又自東郡召還。蓋朝廷之嘗所處公者。不過州郡米鹽之間。而及其以詞翰有需於公。則雖無不召之。不過以西樞散秩。兼摠管而已。終不任以職事。宣廟末。以病乞暇。寓箕城玄福峴下。聞龍馭上賓。卽入臨。大臣畀以撰次大行行狀之役。公以衰病。讓不敢當。還箕城。辛亥。東歸京師舊第居焉。乃以翌年七月十三日。卒于高陽之鴨島先隴下。享年七十四。葬于某向原。配貞夫人李嗣宗之女。有一男一女。男曰東望。己丑文科。官終工曹正郞。早歿。無后。女適禁火署別坐李誠元。有四女。庶子東聞,東觀。念惟評公文章。谿谷序文備矣。今不敢贅。平生所著述甚多。嘗手定詩文爲九冊。卒後十四年。在朝諸公。始得以印布。周易本義口訣附說二冊。閔尙書維重。頃又入梓。此外所抄史漢列傳,昌黎文口訣。並傳於世。而拜罷錄四冊。則藏於家。蓋聞公不特其爲文奇杰。雄視東方。卽天性亦極高簡。意不可一世士。其所與好者。必世之所謂賢人君子。其所與惡者。必世之所謂宵人鄙夫。故於李文成。自童丱之好。而最所敬慕。於李山海。非不少年之父。而並與其詩。而不之取焉。李亦以是。於公之詩。嘗加疵纇云。此可見公之爲人也。噫。公旣抱絶藝持峻操。又能妙年魁科。而顧阨於時。官不大顯。卒困頓以沒身。豈不惜哉。然其英華之發於外者。炳炳烺烺。生而動一世。歿而垂千古。雖所乏者位。而所饒者名。其視夫世之無其才而有其位。身歿而名磨滅者。得失何如也。顧余非嫺於辭者。特惜公身後寥落。迄未有爲公操筆記行者。恐久益昧昧無徵。玆敢僭爲之論述如右。以備立言君子有所採取云爾。<끝>

 

 

지호집 > 芝湖集卷之十一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