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문제공 박충좌 묘지명(文齊公 朴忠佐 墓誌銘)

야촌(1) 2013. 8. 4. 21:58

◇시대 : 고려

◇연대 : 1349년(충정왕 1년)

◇유형 : 재질 묘지명· 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94cm  x 너비 44cm

◇출토지 :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속촌리

◇소재지 : (한국)불명-

◇서체 : 해서

◇찬자 : 안진安震 /서자 미상 /각자 미상

◯개요(槪要)

 

박충좌『朴忠佐, 1287년(충렬왕 13)~1349년(충정왕 1)』의 묘지명(墓誌銘)은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고, 자손이 글씨를 기록한 것이다.

 

전언에 의하면 묘지석(墓誌石)은 북한의 개성(開城)에서 공단부지 조성때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중국에서 반입하여 대구시(大邱市) 남구(南區) 이천동(梨泉洞) 고미술점(古美術店)에 있는 것을 2005년 8월 22일 탁본을 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작성연대는 1349년(충정왕 1)으로 안진이 묘지명을 지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박충좌(朴忠佐)의 자(字)는 자화(子華)이며, 호(號)는 치암(恥菴)이고. 시호(諡號)는 문제(文齊), 함양군 사람이다.

 

시조(始祖) 선(善)은 고려조(高麗朝) 예부상서(禮部尙書)이다. 증조부는 신유(臣蕤), 조부는 지빈(之彬)이다. 아버지는 장(莊)이고,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 존비(尊庇)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박충좌는 1313년(충숙왕 즉위년) 과거에 급제한 이래로 충숙(忠肅)·충혜(忠惠)·충목(忠穆)·충정왕(忠定王)때까지 내서사인(內書舍人) 밀직제학(密直提學)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처서 삼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고 1344년(충혜왕 복위 5)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천(李蒨)과 진사(進士)를 뽑아, 하을지(河乙址) 등 33인에게 급제를 내었고 제조관(提調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를 역임하여 (충목왕1)찬성사(贊成事)가 되어서 왕(王)에게《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에 책록되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7년(충목왕 3) 역대 명신 시호 중 가장 처음으로 시호인 ‘문제(文齊)’가 내려졌다.

 

(단행본)민족문화추진회 편, 1966, 『국역 동문선』, 민족문화추진회 ; 1998, 도서출판 솔

(단행본)(고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연복사종(演福寺鐘)

文齊公朴忠佐墓誌銘

 

1. 大元高麗國純誠輔德協贊功臣三重大匡咸陽府院君贈諡文齊公朴公墓誌銘幷敍」

 

2. 勅授將仕郞匡靖大夫檢校都僉議參理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安山君安 震 撰」

 

3. 公諱冲佐 字子華 姓朴氏 咸陽郡人也 曾王父諱臣蕤 大府卿致仕 王父諱之彬 衛尉尹致仕 生四子皆登第

    一代罕」

 

4. 倫 其長曰莊 㝡有名 官至軍簿摠郞 是爲公父 母夫人李氏 政堂文學諱尊庇之女 公遵內外家訓 幼而好學

    中南省」

 

5. 試 入大學 才貌出羣 初拜惠民局判官 登癸丑年第 爲賀▨▨▨官 朝京師」

 

6. 忠宣王承其位 寓都下 公常隨從忠宣王子 視瀋王暠 爲王師傅 公從忠義 不阿附 故竟無非議 五遷爲興福

     都」

 

7. 監判官 知提敎 按部全羅道事 有使怨必力爲 有嬖人 私受內旨 以良民爲賤 公堅執不許 遂讒公曰 按部不

    敬 王旨棄如」

 

8. 弊紙 宜加責讓 上大怒 遣使者於全州 流海島一方 皆拊心泣血 而後召還 除監察持平 移病不出入 除典校

    寺 又遷通禮門」

 

9. 副使 藝文應敎 使監鹽稅慶尙道 三謝本職不就 尋移內書舍人 直寶文閣 出按楊廣道 未朞還之 司議大夫

    又按慶尙道」

 

10. 其觀風三道 盖因前日爲民受命 歷判小府典校二寺事 除密直提學 又除開城尹 至正甲申 授都僉議贊成事

       爲王師傅 朝納誨」

 

11. 是冬掌試 春闈得河乙址等三十三人 再遷弘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判軍簿司事 加純誠輔德協贊功臣三

       重大匡 判三事 封咸」

 

12. 陽府院君 公嘗疾病 徙其所大華嚴宗都僧統▨峰方丈 要以法喜 意▨▨愈 返其私第 ▨而病早卒 盖己丑

      後七月十八日也享」

 

13. 年六十三 卜九月癸酉 葬于粟村▨▨ 公娶韓氏 密直副使致仕 諱安之女 封漢陽郡夫人 生男女七人 男曰

       玿爲典儀錄先歿 次曰珽」

 

14. 永福都監判官 次曰瓊軍簿判書 次曰璠郞將 次曰璵衛尉注簿 女適內侍崔自敬 夫沒落巖爲屍 次適千牛衛

       錄事參軍事有龍公」

 

15. 天資溫厚而儉 睦於族親 信於朋友 雖爲官至府院君 不興其居 室無丹雘 衣不至美 號其所寓 曰恥菴 上嘗

       重公儼慤無俾」

 

16. 莅軍簿之職 公辨其東西各將 勤怠賢不肖 爲陟黜 其愜衆望 於是諸領府數十人 各出布納於佛寺 欲爲公

      長年祝禧 公聞之」

 

17. 曰 爲政 善不得係王恩 若如此重 吾不德所致之 以其布施諸困窮 後又▨▨▨祈堂 題品 東西衆官臧否 欲

       遏奔競 時公嬰罹」

 

18. 羸 不能策略 薨日 國人惜之 震與公▨▨ 姑座▨一 銘曰 詞謙說儼 心和志剛 有德不好 惟君子常 胡不眉

       壽」

 

19. 吁嗟彼蒼 啓心納忠 吾君一心 推恩人民 己閏七逝 銘以紀德 子孫其保」

 

至正 九年 己丑 九月 日」

文齊公朴忠佐墓誌銘 譯文

 

大元高麗國 純誠輔德 協贊功臣 三重大匡 咸陽府院君 贈諡文齊公 朴公墓誌銘. 서문을 곁드림.

勅授將仕郞 匡靖大夫 檢校都僉議參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安山君 安震이 撰함.

 

公의 諱는 冲佐 字는 子華, 姓은 朴氏이며, 咸陽郡 사람이다. 曾祖父 이름은 臣蕤로 大府卿으로 벼슬을 마쳤으며, 祖父의 이름은 之彬으로 衛尉尹으로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4子를 낳았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니 한 시대에 비교하기 드문 일이었다.

 

그의 큰 아들 莊은 가장 이름이 뛰어났으니 벼슬은 軍簿摠郞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李씨는 政堂文學을 지낸 諱 李尊庇의 따님이다. 公은 內外 家訓을 준수하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南省試에 합격하여 太學에 들어갔다.

 

재주와 용모가 出衆하였는데, 처음으로 惠民局 判官에 임명되었고, 癸丑年에(1313〈忠肅王 즉위년〉) 급제하여 賀▨▨▨官이 되어 京師(元都)를 조회한 것은, 忠宣王이 왕위를 계승하여 원나라 首都에 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公은 언제나 忠宣王子(뒷날 忠肅王)을 수행하면서, 瀋王 暠를 뵙고 왕의 師傅가 되어서는 공은 忠義를 좇아 아부하지 않아 마침내 話題거리가 되지 않음이 없었다.

 

다섯 번이나 옮겨 興福都監判官 知提敎와 全羅道事를 맡아 관리하면서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힘써 해결하였다. 어떤 嬖人(嬖人은 고려사에 朴忠佐傳에 의하면 朴連이 內旨를 받아 良民을 賤民으로 만들려 하니 굳게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드디어 공을 讒訴하기를 “按部<全羅道事를 맡은 박충좌를 지칭>가 不敬하게도 王旨를 헌 종이처럼 버렸다.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大怒하여 사자를 全州에 보내어 바다 한 귀퉁이로 유배를 보냈다.

 

모두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렸다. 이후 召還되어 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典校寺에 임명되었다가 또 通禮門副使 藝文應敎로 옮겼다가 경상도 鹽稅를 감독하게 하였으나 세 번이나 직책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곧 있다가 內書舍人과 直寶文閣으로 옮겼고, 楊廣道를 按部하러갔다가 일년이 안 되어 돌아와서 司議大夫로 또 慶尙道를 按部하였다. 이렇게 세 번이나 풍속을 살펴본 것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다시 少府寺와 典校寺 判事를 거쳐 密直提學에 임명되었고 또 開城尹에 임명되었다.

 

至正 甲申(1344 : 忠惠王 復位5)년에 겨울에 春闈(일명 禮部試라고도 함)의 掌試官(知貢擧라고도 함)이 되어 河乙址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忠穆王 1년(1345)都僉議贊成事를 除授받고 王의 師傅가 되어 朝夕으로 올바른 말을 올렸다.

 

다시 弘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判軍簿司事로 옮겼다가 純誠輔德協贊功臣 三重大匡判三司事가 加해지고 咸陽府院君에 封해졌다. 公은 일찍 질병으로 그 居處를 大華嚴宗都僧統▨峰 方丈室로 옮겨 法喜로서 병을 치료하고자 했다가, 사제로 돌아와 병으로 일찍 돌아가니 己丑년(1349년 忠定王 1) 閏 7월18일로 향년 63세이다. 9월 癸酉(15일)에 粟村▨▨에 장사지냈다.

 

공은 韓씨에 장가들었으니 密直副使를 지낸 韓安之의 딸로 漢陽郡夫人에 봉하여졌는데 남녀 7명을 두었다. 장남은 소(玿)로 典儀錄事가 되었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정(珽)으로 永福都監判官을 지내었고, 다음은 경(瓊)으로 軍簿判書를 지냈고, 다음은 번(璠)으로 郎將을 지냈고, 다음은 여(璵)로 衛尉注簿다. 딸은 內侍 崔自敬에 시집갔으나 남편이 죽자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고, 다음 딸은 千牛衛錄事參軍事 洪有龍에게 시집갔다.

 

公은 天資가 온후하고 친족에게 화목하고 벗에게 신의가 있었고, 官은 府院君에 이르렀으나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거나 단청도 하지 않았고, 옷은 아름다운 것을 입지 않았으며, 우거하는 곳을 치암(恥菴)이라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공이 엄격하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것을 중히 여겨 軍簿의 직분을 맡겼다. 公이 동반과 서반 장수들의 勤·怠와 賢·不肖를 분별하여 黜陟으로 삼으니 여기서 衆望에 만족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領府의 수 10인이 각각 베를 내어 사찰에 施納하여 공을 위하여 장수하고 축복 받기를 빌었다.

 

公이 듣고 말하기를 “정치를 하면서 왕의 은혜에 잘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이같이 소중히 여기신다면 저의 不德의 所致일 뿐입니다” 하고는 베를 모든 곤궁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후에 또 ▨▨▨ 文武 모든 관원의 臧否를 판단하고 奔競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 때는 공이 이미 초췌하고 병에 걸리어 대책을 세울 수 가 없었다. 세상을 떠나는 날에 나라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나(安震)와 공은 ▨▨ 하였으니 잠시 동안 ▨▨에 앉아 있노라

誌石에 새기기를

 

“글은 겸손하고 말은 엄정하며

마음은 따뜻하고 뜻은 강직했지,

 

덕이 있어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나니

오직 군자의 떳떳함이었네.

 

어찌하여 長壽하지 못했는가!

아 슬프다! 저 푸른 하늘이여,

 

마음 활짝 열어 충절을 받쳤으니

우리 그대 한결같은 마음이었네.

 

은혜는 백성들에게 돌리고

己丑年 閏 7월 저 세상으로 가셨네.

 

그 덕행 기록해 새기나니

자손들은 길이 보전하리라.

 

至正 9년 己丑(1349, 忠定王 1년) 9월 일

西紀 2012年 12月 8日

23代孫 魯龍 判讀 譯文 謹書

 

2.文齊公墓誌 탁본 사진

 

朴忠佐 墓誌銘에 대하여 [秦星圭] 193

 

3.文齊公 親筆 (함양박씨 가장

출처 : 함양박씨 자료실 ㅣ 만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