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그때 그시절 55

일제강점기 사진

▲일제의 강제 노역에 동원된 앳된 소년들이 제물포에서 월미도로 연결하기 위 한 해저 케이블(전선)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고 있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 박물관장이 16일 공개한 일제 강점기 사진, 전선으로 출발하는 일본 지휘관에게 술을 따라 주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 여인 들이 손에 술 주전자를 들고 기차역에 서있다. 일제가 조선의 어린 소년들을 노역에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처음 나왔다. 아울러 기차역에서 전선(戰線)으로 가는 일본 지휘관에게 술을 따르게 하기 위 해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한 사진도 공개됐다.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 물관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근무한 일본군 장교의 개인 앨범에서 이같은 사 진을 찾아냈다고 16일 밝혔다. 이 사진에는 제물포에서 앳된 얼굴의 소년들이 인천..

임화수의 사형집행과 야인시대 실존 인물들의 사진들

임화수의 사형집행과 야인시대 실존 인물들의 그 당시 사진들... 임화수(林和秀, 1921년~ 1961년 1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정치 깡패이다. 본명은 권중각(權重珏)이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정치 깡패로 악명을 날렸다. 영화 제작에 관여하였고, '연예계의 황제'라는 별칭이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오늘날 그들의 의리와 정의가 그리워 짐은 무었일까!? 바람처럼 스쳐간 그들의 정열과 낭만...알다가도 모를 일이다.ㅎ 김좌진 장군 모습 김두한 아버지인 백야 김좌진(金佐鎭) 장군, [생졸년] 1889년(고종26)~1930년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1960년대 농촌풍경

↑전형적인 초가마을로, 당시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들이 많았었다. ↑어머니와 아이들 ↑손으로 하루 종일 모내기 하고나면 허리도 이웃집과 품아씨로 함께 모여 모내기 했었다. ↑당시엔 수리시설이 잘되어있지 않아 가물면 논가에 우물을 파고 물을 퍼 올렸다. ↑동네 아이들의 노는 모습...여름이면 매미잡고 구슬치기하고 놀았다(1968년 수원) ↑예날엔 벼를 지면에서 약 20mm 높이에서 낫으로 벤후 현지에서 건조시킨후 탈곡이 용이하게끔 께딴을 묶어 각자 집에서 탈곡을 하였었다. 탈곡후 집단은 집동이라 해서 잘 저장한 후 지붕도 이고 동절기 소 여 물(사료)로 사용했다. ↑보리와 콩은 도리깨로 타작을 하고, 타작 후엔 바람개비나 풍구로 알곡을 골라내었다. ↑식량 증산운동의 일환으로 마을 마다 풀베기 운동(퇴비용)을..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주요 도시모습

↑1920년 남대문통의 모습. ↑1935년 청량리 역앞의 모습 ↑1910년 용산역 모습 ↑덕수궁에서 경성(서울) 시내를 바라본 모습 ↑1905년 경의 보신각 주변(전차가 지나가고 있다). ↑오늘날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이다. 콜로니엄 양식의 건물들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길 우측 붉은색 벽돌 건물은 지금의 우리은행이다.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서울의 중심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거리 양쪽에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 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3월의 광화문 거리 ↑헤르만 잔더가 1907년 9월 무악재를 넘다가 찍은 사진. 저 멀리 보이는 ..

1960년대의 추석 귀향풍경

↑"싼 것이나 사 입혀야죠" 추석 한산한 시장에 나온 어머니(동대문시장. 1962년 9월 10일)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 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열차(1968년 10월 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 적이다.기적이 울리는 가운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1969년 9월 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변하기도(1969년 9월 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 (1969년 9월 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야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야기 1936년 9월27일 전남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속칭 유쟁이(柳井)마을이라는 상유리에서 장정국 씨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고흥읍에서 녹동을 잇는 국도 16km 지점에 위치한 장세동장군의 생가는 50여 호의 조용한 농촌부락이다. 3km로 떨어진 곳에 나환자병원이 있는 소록도가 위치해 있다. 장 장군이 태어난 생가는 30여평 되는 평범한 기와집이었다. 상유리는 타성 받지가 별로 없는 인동 장 씨의 집성촌이기는 하나 아버지가 독자였던 관계로 4촌 이내의 친족은 없다. 장 장군의 모친은 “모다 지 운명이제. 팔자여!. 우리 둘째는 나라에 바쳤어, 월남에서. 아웅산에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 라면서 착실하기는 한데 요령이 없어 큰일이다“고 한숨지었다. 장 장군이 ..

1954년 당시 대구 컬러사진 공개 '화제'

1954년 당시 대구 컬러사진 120장 공개 '화제' 한국전쟁 직후 대구의 생활상을 담은 슬라이드 컬러사진이 한꺼번에 120여점이 나왔다. 이 사진들은 현재 미국에 사는 아담(80)씨가 1954년부터 2년간 대구에 거주할 때 촬영한 것으로 한 웹사이트에 맛보기로 올려놓은 것을 매일신문이 아담씨를 통해 입수한 것. 강위원 경일대교수(사진학)는 "지난 50년대의 대구모습을 담은 컬러사진은 매우 희귀하다"며 "이처럼 많은 컬러사진이 무더기로 나오고, 게다가 정확한 연대와 장소가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윤용진 전 경북대 박물관장은 사진속에 담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종전 직후 재건하는 대구의 모습을 다시 보니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매일신문] 안상호기자 shahn@msnet.co.kr ↑아..